제 20 화 불화의 씨앗
순식간에 수족과도 같은 무이를 잃고, 처소를 가득 채우던 이들은 근신하라는 대비 조 씨의 말에 모두 흩어졌다.
도아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 허공을 쳐다보며 덩그러니 서 있었다.
모두 간 줄 알았으나 강이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기척에 도아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응시했다.
“모두의 적이 된 것 같은데.”
“…….”
“이번에도 과인이 묻지 않고, 귀인을 믿어 주길 바라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분간이 서지 않는 상황에,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전하는 이 상황을 즐기고 계십니다.”
“그렇게 보였소?”
강은 여유로운 얼굴로 미소까지 지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던 도아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소첩의 불행이, 전하께 기쁨이 되는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재미난 구경거리를 보듯 용안에 내내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아…….”
“전하께 쉬이 기쁨을 드리진 않을 것이니 기대하지 마십쇼.”
말을 마친 도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보료로 가 앉았다. 그만 가 보라는 뜻이었다.
“서로의 신뢰가 애초에 없었던 것은 귀인도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
“뭐, 상관없지.”
“…….”
“잘해 보시오.”
말을 마친 강은 문으로 걸어갔다. 문턱을 넘어가려다 멈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등지고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별로였다. 괜히 돌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처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운 나은이 모두가 가기를 기다렸다가 청아의 손을 잡았다.
청아는 나은의 성품이 무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 손을 잡은 나은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힘들었을 텐데 잘 견뎌 주었습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그런 마당에 이런 의문은 우리 두 사람을 위태롭게 만들 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무섭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귀인마마 자리에 안 숙의가 있었을 겁니다.”
몇 번을 다독이고, 말해 줘도 나은은 두려움을 떨쳐 내지 못했다.
“오늘은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하세요.”
“…….”
“앞으로는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대비마마께서 잘 이끌어 주실 겁니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이에 청아가 활짝 웃으며 나은을 다시 자리에 눕혀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큰 것을 걸고, 고생한 보람이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청아가 유유히 처소를 나갔다.
* * *
어제 대궐에서 일어난 변고를 둘러싸고 무수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연 중심에 선 인물은 도아였다.
“김 숙의마마가 아주 적당한 때에 묘수를 내셨네.”
“그러게 말일세. 전하께서 귀인을 자주 찾으신다 하여 내심 경계를 하시라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내 한발 늦었지.”
“누구를 닮았겠는가? 다방면에 두루 지식을 갖춘 부친 덕분이시지.”
도총관의 아부가 대제학도 싫지만은 않아 보였다. 도총관은 때가 때인 만큼 이목을 생각하여 대제학의 사저를 찾았다.
“그나저나 안 숙의 마마는 괜찮으신가?”
“다행히 사과가 든 차를 마시기 전에 한약으로 만든 환을 먹어서 증상을 완화시켰다고 하네. 그러니 큰 탈 없이 넘어가신 것이지.”
“음, 그랬군. 이 일로 귀인은 물론이고, 좌상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인데.”
“전하의 신임이 두터워서 좌상까지 몰기에는 힘에 부칠 것이네.”
두 사람이 이 일로 치열의 위태로움마저 넘보고 있었으나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
“맞네. 첫 일격에 좌상마저 무너뜨릴 순 없을 것이네. 허나, 좌상이 꽤나 여식을 아끼는 자라 하니 자상을 입을 것이네.”
“그나저나 부원군이 한양으로 돌아온다던데 소식 들었는가?”
부원군은 한때 드높은 가문의 명성으로 꽤나 이름을 날리던 자였다. 허나, 한순간에 강이 그 날개를 꺾어 지방에 처박았다.
이 일로 강과 대비 조 씨가 처음으로 대립을 하며 날을 세웠으나 결국은 확고한 왕명을 이길 수가 없어 뒤로 물러나야 했다.
“나는 금시초문이었네! 대제학은 어디서 들었는가?”
“쯧쯧……. 이미 알 사람은 모두 알고 있네. 절간 같던 사저에 활기가 돌고 있으니 어지간한 사람은 눈치를 챘네.”
“그래? 전하께서 달가워하지 않으실 텐데.”
“그게 지금 부원군 눈에 들어오겠는가? 중전을 두고 전하께서 후궁을 셋이나 들이셨는데 눈이 뒤집히겠지.”
말을 마친 대제학은 제 자식이 중전이 되었다며 설치고 다니던 부원군을 떠올렸다.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손 놓고 있다가 중전마마의 세력이 강해지면 어쩌나?”
“전하의 눈 밖에 나겠지.”
“하지만 중전마마를 꽤 아끼시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네.”
“상대를 두려워하면 이길 수 없네.”
겁이 많은 나은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피는 못 속이는 법이었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도총관이 잔뜩 움츠렸다.
“자네와 내게도 이젠 싸워야 할 명분이 생겼네.”
“그렇지.”
“앞으로 일이 좀 더 급박하게 돌아갈 것이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네.”
대제학의 말에 도총관이 괜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두 후궁 마마 중 한 분이 회임을 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허나 쉬운 일은 아닐 것이네.”
“언젠가는 그 소임을 다해야 하네. 후사가 시급한 시점에 회임을 하게 된다면 승기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네.”
현재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임이었다. 도총관은 나은이 아직 승은을 입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
홀로 처소에 남은 도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처음에는 무이가 의금부에서 잔인한 고문을 받을까 걱정돼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두려움에 발목 잡혀 피 마르는 시간만 허비했다. 그러다 모든 것에 의문을 갖고 생각을 하게 됐다.
“차에서 사과가 나왔다는 것은, 누군가 무이의 시선을 따돌리고 넣었다는 것인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두 숙의의 나인들이겠지.”
밤이 깊어 갈수록 도아의 머릿속도 뒤엉켜 갔다. 청아와 나은이 손을 잡고 쳤으니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믿을 이 하나 없다더니 그 말이 맞네.”
유순하게 굴던 나은과 악의 없이 고울 것만 같았던 청아였다. 그런 두 사람이 별안간 찾아와 도아의 등에 칼을 꽂았다.
웃는 얼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하……. 아버지가 그리 조심하라 일렀는데 조용한 대궐에 속아 천하태평으로 마음을 놓고 있었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의금부로 끌려간 무이가 모진 고초를 겪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선잠을 자다가 날이 밝자 일어나 앉은 도아는 말끔하게 소세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경대를 세워 놓고,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머리를 올려 비녀를 찔러 넣었다. 뒤꽂이도 화려하게 양쪽으로 꽂았다.
연분홍 입술 위로 불그스름한 연지를 톡톡 찍어 바르고, 초승달처럼 얇게 휜 눈썹을 능숙하게 그려 넣었다.
모란꽃이 촘촘히 화려하게 놓인 당의를 입고, 그 위로 진귀한 옥이 들어간 노리개를 달아 주었다.
그러고는 예전에 나은이 잘 먹던 간식을 챙겨서 처소를 나섰다.
“귀, 귀인마마.”
“귀신이라도 본 듯 놀라는군.”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당도한 곳은 나은의 처소였다. 도아가 손수 간식을 들고 처소로 들어서자 누워 있던 나은이 화들짝 놀랐다.
“몸도 좋지 않을 텐데 누워 있게.”
“아니……. 아니옵니다.”
도아는 자리에 일어나 앉은 나은의 앞으로 활짝 웃으며 치마를 펼친 채 앉았다.
가만히 있어도 만발한 듯 꽃다운 자태가 마음먹고 화려하게 수놓으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내 처소에서 변고가 생겨 안 숙의가 고초를 겪고 있으니 마음이 쓰여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네.”
“…….”
“자네가 전에 내 처소에서 잘 먹던 간식이 생각나서 챙겨 왔네.”
도아가 들고 온 것을 내밀자 나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차, 내 처소에서 만든 음식이니 비위가 상할 수도 있겠군.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면 어의에게 보여도 좋고, 갖다 버려도 괜찮네.”
“버, 버리다니…… 당치 않사옵니다. 마마의 호의인 것을요.”
“그렇지. 내가 아는 안 숙의는 이런 사람이었지.”
도아가 그렇게 말하며 한 무릎 가까이 다가가 나은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이리 떠는 것을 보니 몸이 아직 안 좋은 모양일세.”
“예, 예…….”
“이 일이 나와 무관하다는 것이 꼭 밝혀졌으면 좋겠네.”
“…….”
“나는 안 숙의와 척을 지고 싶지 않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도아의 마음에는 철문이 내려진 지 오래였다. 그저 나은의 마음이 불편하라 지껄인 말이었다.
그때였다.
‘귀인마마의 처소에는 사가에서 데려온 아이 혼자 있으니 시선을 따돌리기 쉬울 겁니다.’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걱정 마세요. 우리 쪽 사람이 몇인데 한 사람 눈을 가리지 못하겠습니까?’
‘그럼 나는 김 숙의만 믿겠습니다.’
‘네, 미리 먹으라고 준 환은 먹었습니까?’
은은하게 머리와 귓가를 울리는 환청이 멈추었다. 한 목소리는 분명히 나은이었고, 남은 하나는 김 숙의라 칭한 청아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시된 정황에 도아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나은이 불편했는지 손을 빼냈다.
“안 숙의, 그거 아는가?”
“예……? 무엇을요?”
“어제 의금부로 압송된 나인.”
그렇게 말하는 동안 도아의 얼굴을 지배하고 있던 미소가 씻은 듯 가셨다.
“그 나인은 내 전부일세.”
“…….”
“나는 어제 그 전부를 빼앗겼네.”
다시 드러난 미소에는 살벌함이 곁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