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화 불화의 씨앗
교태전 처소에서 강과 은하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건조한 얼굴로 차를 마시던 강이 한숨을 쉬었다.
“벌써 석 달이 넘도록 제대로 된 비가 내리지 않고 있소.”
“민가의 백성들에게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있다고 하옵니까?”
“아직은 그렇지 않소. 허나 추수를 앞두고 비가 오지 않으니 모두들 슬슬 걱정하는 눈치였소.”
“머지않아 비가 내릴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가뭄은 백성들을 말려 죽이는 재앙이었다. 강이 즉위하고, 다행히 가뭄으로 인한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자 시절에 가뭄으로 땅이 마르고, 백성들이 죽어 가는 것을 목도한 강이었기에 걱정이 남달랐다.
“전하! 중전마마, 급히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조용하던 처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들라는 명이 떨어지자 김 상궁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소란인가.”
“송구하오나, 급히 귀인마마의 처소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귀인의 처소에는 왜?”
무미건조하게 듣고 있던 강이 귀인, 도아를 일컫는 말이 나오자 흥미가 생긴 듯 김 상궁을 응시했다.
“그것이…….”
“어허,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질 않는가.”
“두 숙의마마가 귀인마마의 처소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옵니다. 하온데 무슨 영문인지 안 숙의마마가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며 어의를 불렀다고 하옵니다.”
“갑자기 그랬단 말인가?”
“예, 그렇다 하옵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실로 황당한 이야기였다. 멀쩡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호흡 곤란이 왔다는 소리였다.
모두가 심각한 와중에 듣고 있던 강이 히죽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이에 은하와 김 상궁이 놀라 쳐다보았다.
“꽤 조용하다 생각했소.”
“예?”
“세 후궁이 화목하게 지낼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소. 설마 중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 것이오?”
“…….”
“저런,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소.”
물론 화목하게는 아니어도 어쩌면 암투를 벌이지 않고, 무난히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은하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자 강이 다시 히죽 웃었다.
“바로 대전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흥밋거리를 놓칠 순 없지. 과인도 함께 갑시다.”
“예, 그러시옵소서.”
두 사람이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이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 * *
어의가 도아의 처소에 당도했을 땐 이미 나은이 몸져누워 있었다. 어의는 서둘러 맥을 짚고, 의녀에게 탕약을 지시했다.
“안 숙의는 어떠한가?”
“소신의 견해로는 섭식으로 인해 호흡 곤란이 오신 것 같사옵니다. 목 안이 붓고, 손등과 목으로 붉은 반점이 올라오시는 것을 보아 필시 무언가 잘못 드신 듯하옵니다.”
“내가 알기로 음식으로 인한 것은 반응이 곧장 올라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 바로 알고 계시옵니다. 귀인마마.”
대답을 마친 어의는 능숙한 솜씨로 나은의 얼굴과 손에 침을 꽂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아는 저만치 다과상을 쳐다봤다.
‘설마 내 처소에서 음식을 먹고 저리됐단 건가?’
불안한 예상은 언제나 적중하는 법이었다. 그 모습을 저만치 앉아 지켜보던 청아는 숨죽여 미소를 지었다.
‘예, 바로 알고 계십니다. 귀인마마의 다과가 원흉입니다.’
그러나 청아는 이내 울상을 지으며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때 처소 문이 벌컥 열렸다.
“음식 탓이라면 조사를 해야지.”
“오셨사옵니까.”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어온 강이 그리 말하자 일어나 강을 맞이한 도아의 낯빛이 굳었다.
“과인의 말이 틀렸소?”
“소첩은 음식에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판단은 어의 몫이지.”
“그랬다면 안 숙의가 쓰러졌을 때 다과부터 치웠을 것입니다.”
도아의 반박에 은하가 긴박한 상황에 구석에 밀려 있던 다과를 보았다.
“안 숙의가 무언가 잘못 먹어서 저리된 것이라면 오늘 먹은 음식 모두를 조사해야 맞을 것이네. 그렇지 않사옵니까, 전하.”
“음……. 중전 말도 일리가 있소.”
“예, 김 상궁은 다과상을 물리고 오늘 안 숙의가 먹은 음식들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게.”
상황을 정리하려 은하가 나서 지휘했다. 김 상궁이 서둘러 상을 물리고, 모두 자리에 앉았다.
강은 정작 나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낯빛을 굳힌 도아만 쳐다보고 있었다.
“안 숙의, 정신이 드는가?”
그사이 어의의 침을 맞고, 나은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어의가 물었다.
“혹 드시면 안 되는 음식이 있으십니까?”
“하나 있네.”
“소신에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사과……. 어릴 적에 사과를 먹고 죽을 고비를 넘겼었네.”
어의의 물음에 나은이 말한 것은 사과였다. 어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은하는 도아를 곁에서 모시는 무이를 불렀다.
“귀인마마가 사과를 좋아하지 않아 어떤 음식에도 넣지 않았사옵니다.”
“그래? 사과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지?”
“예, 그러하옵니다. 중전마마.”
다행히 처소에 준비된 다과에는 사과가 들어 있지 않다고 했다. 확답을 하고, 무이가 물러나자 침묵을 지키던 청아가 나섰다.
“귀인마마는 아니시옵니다.”
“어찌 장담하는가?”
단호한 말투였다. 이에 은하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에 그리 물었다.
“귀인마마는 안 숙의에게 사과가 독이란 것을 알고 계시옵니다. 그것을 알면서 음식에 사과를 넣진 않았을 것이옵니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예?”
“내가 알고 있다니, 무엇을? 도대체 무엇을 안단 말인가?”
가만히 듣고 있던 도아는 아연실색했다. 제 편을 들어주는 척하던 청아가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어찌 두 사람이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인가.”
“중전마마, 소첩은 안 숙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으나 사과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들은 것이옵니다.”
“허면 김 숙의가 지금 궤변을 늘어놓는단 것인가?”
“아니옵니다! 소첩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은하가 궤변이라 말하자 청아가 언성을 높여 억울함을 표출했다. 강은 기가 막힌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웃었다.
그때,
“귀인마마, 소첩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은이 나지막이 말하였다. 이에 도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말씀을 드렸사옵니다.”
“자네가 내게? 내게 그런 말을 했다고?”
“예, 처음 마마의 처소에 모였을 때 말씀을 드렸사옵니다.”
“하…….”
온몸의 기운이 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도아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은을 보았다.
그러다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틀자 강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악연.’
그날의 말이 떠올랐다.
* * *
한편, 한양으로 돌아가는 일을 두고 부원군과 부부인은 며칠째 대립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부원군은 챙겨 놓은 짐을 모두 한양으로 보냈다.
각자 사랑채와 안채에서 생활하던 부부는 며칠째 얼굴도 보지 않았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찰나에 점심이 지나서 부부인이 먼저 사랑채에 들었다. 부원군은 헛기침하면서 내심 반가운 모양이었다.
“한양으로 옷가지며 짐을 새벽에 모두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흠……. 맞소.”
“이미 마음을 그리 드셨다니 아녀자로 마땅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나라의 법이 그랬다. 아녀자는 지아비에게 순종하며 조용히 집안을 건사하는 일에 책임을 져야 했다.
“허나 하나 약조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약조라니, 무엇을 말이오?”
“한양으로 가시거든 누구와도, 세력을 도모하지 마십쇼.”
“…….”
“전하께서 중전마마의 세력인 우리를 이 먼 곳으로 보낸 까닭을 대감께서 잘 아실 겁니다.”
그러나 이미 부원군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다. 부부인은 그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세력을 만들어 힘을 키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십니다.”
“허나 부인, 중전마마께서 후궁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부모인 우리가 힘을 가져야 하는 것이오.”
“마마께는 잠시 쉴 수 있는 친정이면 족할 것이옵니다.”
부부인은 은하의 성정을 알고, 그 뜻을 잘 알았다. 반면, 부원군은 무지하여 제 밥그릇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자였다.
“또한 마마를 한결같이 아껴 주시는 전하가 계십니다. 두 분의 금실이 좋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괜히 대감의 야욕을 위해 섣불리 움직였다간 전하께서 마마께 등을 지실 수도 있습니다.”
이래도 세력을 도모해서 은하를 힘들게 할 거냐 묻는 것이었다. 부원군의 얼굴이 퍽 난처해 보였다.
“실은 이게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또 있소?”
“대감께서 남의 이목을 끌면 끌수록 분명 안 좋게 보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지는 법이오.”
“예, 허나 만약 그들이 마마의 과거를 물고 늘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과거? 부원군이 의문을 품다가 이내 인겸을 떠올렸다. 은하에게 유일한 약점, 과거가 정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저 어른들끼리 사이가 좋아서 몇 마디 주고받은 것이었소.”
“대감께서 그리 생각하셔도 이미 땅이 알고, 하늘이 알고 있습니다.”
“…….”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시고, 그저 조용히 계십쇼.”
부부인은 매섭게 눈을 뜬 채 부원군의 답을 기다렸다. 망설이던 부원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겠소. 내부인의 뜻에 따르겠소.”
“어길 시.”
“어길…… 시?”
그저 말로만 주고받은 것은 언제든 쉬이 깰 수 있었다.
“옷고름을 끊어 내겠습니다.”
“어허! 부인!”
“대감께서 약조를 어기지만 않으면 됩니다.”
옷고름을 끊어 내겠다는 것은, 곧 이혼하겠다는 뜻이었다.
“아시겠습니까?”
“음……. 알겠소.”
“그럼 대감의 말을 믿고, 돌아가 짐을 정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부부인은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약속을 어기면 이혼하겠다는 말이 진심임을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 * *
이리하여 숨 막혔던 반 시진의 시간이 흘렀다. 도아의 처소에 모인 이들은 아무 말도 없이 어의를 기다렸다.
이윽고 어의가 의녀를 대동하여 오늘 하루 나은이 먹었다는 음식을 들고 나타났다.
“내일 오는 줄 알았네.”
“예? 아, 마…… 망극하옵니다, 전하.”
“고하라.”
모두가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어의의 손짓에 의녀들이 각각 음식을 자리에 내려놓았다.
“안 숙의 마마의 처소에서 드신 음식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사옵니다.”
“그래, 그다음은?”
강의 턱 끝이 도아의 처소에서 먹은 다과로 향했다.
“약식과 약과에는 사과가 들어 있지 않았사옵니다.”
“그럼 안 숙의가 절로 숨이 막혀 쓰러졌다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옵고, 송구하옵게도 이 차에 사과가 들어 있었사옵니다.”
“어의는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곁에서 듣고 있던 도아가 꽤 매서운 투로 어의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어의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소신과 의녀가 먼저 확인하고, 정확도를 높이려 수라간 최고상궁이 기미를 하여 내린 결론이옵니다.”
“최고상궁이 기미를 했다?”
“예, 그렇사옵니다. 전하.”
“대궐 안 어느 누가 최고상궁보다 뛰어난 미각을 지녔겠느냐. 틀림없겠지.”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지만 지금 도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억울하다며 말을 늘어놓는 일이 전부였다.
“그럴 리가……. 귀인마마가 왜 저를…….”
“아닐세! 나는 결단코 그런 적 없네.”
“흑…… 흐윽……. 자칫 소인이 죽을 수도 있었사옵니다.”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일세.”
겨우 숨을 고르기 시작한 나은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가여운 행세를 했다. 이에 청아는 다가가 어깨를 쓸어 주었다.
“진정하세요. 이러다 또 쓰러지겠습니다, 안 숙의.”
“귀인의 처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책임을 귀인에게 물을 수는 없사옵니다, 전하.”
청아의 위로를 무 자르듯 자르며 은하가 나서 거들었다. 그것도 일리는 있었지만 모든 정황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대비 조 씨가 잔뜩 노기가 서린 얼굴로 처소에 들었다.
“귀인이 안 숙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 사실이더냐!”
“어마마마.”
처소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비를 맞이했다.
“말해 보라! 귀인이 진정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려 했느냐!”
“아니옵니다, 소첩은 이 일과 무관하옵니다.”
“무관하다? 내 이 처소에서 일어난 일을 빠짐없이 보고받았는데 그따위 말을 입에 담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사옵니다.”
꽤 강경한 태도에 강은 도아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파리한 안색과 달리 두 눈은 매섭게 억울함을 보이고 있었다.
“모든 진실은 조사해 보면 알겠지. 먼저 차가 이 사달의 원흉이니 다과를 차린 나인을 의금부에 하옥하도록 해라.”
“하옥이라니요?”
“무엇 하느냐! 어서 그 나인을 잡아다 가두래도!”
대비 조 씨의 무력 앞에 강과 은하는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어느새 관군이 들어와 무이를 잡아가려 했다.
그러자 그 앞을 도아가 막아서며 무이를 등 뒤로 감추었다.
“한낱 나인을 잡아 가두시어 심문하신들 원하시는 답을 들으시겠나이까?”
“이런 발칙한! 감히 뉘 앞이라고 입을 함부로!”
“소첩을 잡아가라 하시옵소서.”
“마마! 아니옵니다! 소인이 가겠사옵니다. 당장 갈 것이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뒤에서 눈물을 흘리던 무이가 대신 가겠다는 도아의 말에 저를 붙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관군에게 갔다.
“너를 보낼 수는 없다.”
“소인도 마마를 보낼 수는 없사옵니다.”
겨우 다시 무이의 손을 붙든 도아가 대비를 보다가 강을 쏘아보며 외쳤다.
“안 숙의를 진맥한 어의와 차를 기미한 최고상궁은 어찌하여 의심하지 않으십니까? 소첩의 처소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을 의심하고 조사하셔야 마땅하시옵니다!”
두 눈에 맺힌 눈물이 애써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었다. 도아는 한 마디도 흘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의 얼굴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나인을 끌고 가 가두고, 날이 밝으면 심문토록 하라.”
“예! 전하!”
결국 어명이 떨어지고, 도아의 손에 잡혀 있던 무이가 무자비하게 관군들에게 끌려갔다.
허공에 멈춰 선 손은 길을 잃었다. 그 손에 힘을 주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느새 다시 강과 도아의 시선이 맞닿아 있었다. 원망이 가득 서린 눈이 강을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