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결착(8)
칠대세가와 구대문파 그리고 일방.
중원 각지에 퍼져있는 가장 거대한 사병집단들이 각자의 정예들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움직임에 관해 황실 역시 끊임없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그것은 그들의 병력이 움직이는 것을 꼬투리 잡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거기에 한 손을 보탤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것에 더 가까웠다.
“정말 괜찮을까? 지금 내각의 대학사들부터 도찰원 도사. 이부와 병부의 상서들까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아주 난리들이야.”
“폐하. 부디 성심을 굳게 다잡으소서. 비록 남쪽에 역적무리들이 그 세가 성하다고는 하나 결코 그것이 황조의 안위를 위협할만한 꺼리는 될 수 없사옵니다. 오히려 제국 내의 불순한 사병집단들이 자발적으로 그들을 제거하겠다 나섰으니 폐하께서는 그저 역적의 무리들과 사병집단들이 공멸하는 꼴을 지켜만 보시면 될 것이옵니다.”
“하지만 오늘 병부 상서의 말처럼 정말로 마교의 역적들이 그들을 모조리 해치울 만큼 성세가 커졌다면 어찌할 텐가. 그대 말처럼 황조의 안위를 위협할 수는 없다 해도 혹여 대월국이라도 통째로 삼켜버리는 날에는 두고두고 제국의 근심거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황제의 얼굴에 수심이 그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정무를 좀 볼랍시면 상소의 태반이 그와 관련된 내용들로 그득했다. 물론 그때마다 북방의 소란함을 핑계 삼아 상소를 물리고는 있었지만, 최근 그의 숙부가 보내온 서신이 그의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다.
“분명 최염 그대가 말하지 않았느냐. 숙부가 황실수호검을 쥐면 제국 최고의 고수인 자네도 쉽게 상대하기 어려울거라고.”
“네, 그랬지요.”
“헌데 그런 숙부가 마교의 대제사장 앞에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그랬다. 그런데도 정녕 아무런 문제가 없겠느냐?”
“폐하. 폐하께서는 선대의 황제들께서 늘 걱정하신 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아시잖사옵니까.”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삼대 대장군부의 독립이었지.”
“그렇습니다. 그들은 제국을 지키는 창칼이지만, 그들과 부딪히는 적의 창칼이 사라진다면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옵니다. 최근 청해대장군부가 서평왕부로 독립을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의 달단도 그 세가 점점 약해지고 있지요. 지금이야 살리답이 정정하니 버틴다지만 그의 나이가 벌써 백이십입니다. 그런 상화엥서 마교의 역적들이 대월국을 통째로 삼키는 것과 마교가 멸망당하고 광서대장군부가 남평왕부로 독립하는 것. 소신이 판단할 때 제국에 진정한 위협은 후자가 아닐까 싶사옵니다.”
“하지만 숙부의 말처럼 혹시라도 마교의 그 악적이 황도를 치기라도 한다면······.”
“폐하. 이곳 황도는 살리답에게도 뚫리지 않은 금성탕지이옵니다. 저를 비롯한 동창의 정예가 항시 주변을 순찰하고 있으며 전하의 곁을 교대로 지키는 수신호위들 역시 천하의 어떤 고수도 단시간에 뚫어낼 수 없사옵니다.”
“그래······. 알겠다. 허면 숙부는 어찌할 생각이더냐.”
“조왕 전하라면······.”
최염이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왕 주고수는 거기서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들고 간 황룡검이다.
“숙부는 이번 원정에 참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가득하다. 헌데 네 말처럼 마교와 그들이 공멸을 하거나, 여러 대신들의 말처럼 무림의 무뢰배들이 전멸하기라도 한다면 황실의 핏줄인 숙부가 위험해지는 것 아니냐.”
“그 부분이라면 동창의 창위들을 시켜 전하를 호위토록 하겠습니다.”
“숙부의 무공이 이미 하늘에 닿았거늘 그런 숙부가 위험해졌을 때 고작 동창의 창위 몇으로 도움이 되겠느냐?”
“박내관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장의 역도를 상대해본 경험도 이미 있으니까요. 혹시 그것으로도 성심이 편해지지 않으신다면 금의위에 대총관인 조충을 내보내는 건 어떠십니까.”
“금의위의 대총관을? 하지만 그자를 내보내면 금의위 일은 누가 본단 말이냐.”
“그 부분은 금의위의 실무야 어차피 북진과 남진의 총관들이 보는 것이고, 대총관 자리는 허직에 가까우니 괜찮을 겁니다.”
황제가 잠시 고민했다.
최염의 속셈이 엿보인다. 뻔하다. 최근 자신과 맞먹으려 드는 조충을 외부로 내돌림으로써 위세를 과시하겠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동시에 이 고자 놈의 충심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알겠다. 태감은 칙서의 초안을 작성해오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잠시 무공을 잃어버렸던 여파일까? 그래, 어쩌면 그럴 수도. 하지만 운호는 현무의 얼굴이 부쩍 늙어버린 것이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확신했다.
사부(師傅)라고도 하고 사부(師父)라고도 한다.
운호에게 공야찬이 전자와 같은 사부였다면 어쩌면 현무진인은 이준형에게 후자와 같은 사부였는지도 모르겠다.
“너도 알다시피 화산 본산의 제자는 지원해주기 어렵다.”
문파의 주력이라고 볼 수 있는 일대 제자 가운데 자하기공을 익히지 않은 제자의 숫자는 삼분지 일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대 제자는 운호의 활약 덕분에 검을 든 제자들이 많아 절반 정도. 그리고 자하기공을 익힌 제자들은 모두 이전의 전투로 인하여 몸이 크게 상했다. 당장 장문인에 오른 현무만 하더라도 이전의 무공을 찾으려면 적어도 삼사 년. 어쩌면 그 이상을 요양해야할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속가의 제자들 가운데 지원자를 엄선하여 선별했다. 절정이 둘. 그리고 일류가 일흔아홉이다.”
다른 문파의 경우 제갈세가와 같이 그 세력이 가장 작은 곳도 열하나의 명의 절정을 동원한 것을 생각해보면 강호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화산파의 인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 역시 화산파의 위엄이다. 본산의 제자들 하나 없이 속가의 제자만으로 이만한 인원을 만들어냈다. 칠대세가나 구대문파와 같은 대문파들이야 절정 고수만 수십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지방 현성의 경우 절정 고수가 하나도 없는 지역도 적지 않다.
즉 대부분의 중소문파에서 절정 고수는 그 문파에 하나뿐인 절대 전력이다. 그리고 아무리 공을 세울 기회라고 해도 하나의 문파가 기둥뿌리를 뽑아가면서까지 참가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심지어 본산의 고수들이 제대로 참여도 못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생각보다 대단한 전력이네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마도 속가 문파들에게 제법 많은 것을 베풀어야 했을 것이다. 앞으로 본산에 더 많은 제자를 받겠다던지 하는 약속 등으로 말이다.
“내가 못나 네게만 너무 큰 짐을 지우는 것이 참으로 미안하구나.”
“큰 짐이라니요. 아닙니다.”
“그리고······.”
현무 진인이 잠시 말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운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이해했다.
“준형이는 제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스스로가 참으로 뻔뻔하여 고맙다는 말조차 미안하다는 말조차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자리나 지키는 주제에 이런 터무니 없는 부탁까지 안겨주다니. 심지어 운호와 준형이의 관계를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화산의 장문인이 그저 고마움과 미안함을 가득 담아 아직 젊은 제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것은 내가 오래 보관해온 보양단과 요상단이다. 혹시 모르니 가져가도록 해라.”
“네, 요긴하게 잘 쓰겠습니다.”
“그래, 참으로 고맙다.”
“생각보다 화산의 피해가 훨씬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설마 출정단의 규모가 고작 이 정도일줄이야······. 덕분에 조금 애매해졌습니다.”
“신검의 활용 때문인가?”
“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신검을 비롯한 그와 함께하는 초절정 고수들의 활용이지요.”
운호과 주고수 그리고 혁리광까지.
무려 셋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들이다. 아니 심지어 그 가운데 운호는 일반적인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 극광오신이라는 거창한 명칭으로까지 칭해졌다.
“그만한 고수들의 뒤를 받쳐줄 병력으로는 너무 초라합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다른 문파의 병력과 합쳐버리자니 화산의 전력을 이끄는 것이 신검인데 무공이야 모두가 인정할만하지만, 배분도 그렇고······. 참 어렵군요.”
“어려울 것이 뭐 있겠는가.”
“네? 어려울 것이 없다면?”
“남궁세가의 무사들과 함께 맹주 직속으로 편성하게.”
“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좋긴 하겠습니다만······. 과연 신검이 그걸 응낙할까요? 장조부님의 무공이야 모두가 인정한다지만······.”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위를 대신해서 남궁강이 그 뒷말을 이어주었다.
“우리 아버지 성격이 아랫사람을 힘들게 하는 성격이시기는 하지.”
“하지만 신검이라면 괜찮을 걸세.”
“네, 그렇다면 일단 신검에게 그렇게 전달 하겠습니다.”
“뭐라고? 대체 누구 마음대로!!”
남궁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산파에 방을 하나 빌려서 나흘을 칩거하던 그가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고 다시 회음현에 돌아온 것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아, 그게 그러니까. 장인 어른 말씀으로는 장조부님께서 이미 화산과 함께하는 혁리대협에게 맹주 직속으로 올 것을 제안하셨다고······.”
아······.
그래, 그랬다. 분명 그랬드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혁리광의 발차기에 뒤통수를 맞고 꼴사납게 바닥에 얼굴을 처박기 전의 일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거기서 백운호 그 망할 녀석의 방해만 없었더라면······.
“아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아이가 딱히 갈 곳이 없어 보여 그리 권했던 것이고, 이미 화산이라는 문파에 함께 하기로 했다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화산과 남궁 세가라니. 그건 마치 물과 기름을 섞은 것처럼 엉망 아니겠는가.”
그 숫자도, 그 세력의 크기도 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대문파와 칠대세가를 각각의 덩어리로 묶어두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남궁벽의 말도 틀린 부분은 없었다.
소림의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이라든지, 무당의 진무육십사궤(眞武六十四軌)과 같이 각각의 문파들에는 그들 나름의 비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코 단시일 내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남궁 세가의 대연검진(大衍劍陳)만 하더라도 창천검을 소성이상 익히는 것이 거기에 참가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아,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화산의 문도들과 남궁의 식솔들을 모조리 섞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 개의 집단을 모두 맹주님 직할에 두겠다는 의미이니까요.”
“허어, 아니 화산도 구대문파라는 그 이름이 있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건 화산에 대한 모욕이야.”
제갈첨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평소 명예욕이 충만하던 남궁벽이라면 쌍수를 짚고 환영할 문제였다. 애초에 그가 화산을 걱정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는가. 자기 직속의 부하들이 더 생기면 생겼다고 좋아한다면 또 몰라도 말이다.
“그러실까봐 미리 화산의 허락도 받아왔습니다.”
“신검이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검왕에게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