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결착(7)
무공을 잃어버린 무인은 어떻게 되는가.
세월은 인간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간다. 허나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은 그 고절한 무공으로 세월을 슬쩍 비껴낸다. 그렇기에 백세를 넘긴 무인이 무공을 잃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초인적인 힘을 잃어버렸다는 말에 국한될 수 없다.
근육이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미뤄놨던 노화가 순식간에 진행된다.
피부는 생기를 잃고 뼈는 단단함을 잃는다. 쌩쌩하게 돌아가던 두뇌는 그 힘을 잃어버리고 총기로 빛나던 눈동자에는 허연 백태가 낀다.
걸왕이 그러했다.
남궁강은 지금 자신의 앞에 누워있는 이가 그 걸왕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천하를 자신의 집처럼 주유하던 불굴의 무인이 이처럼 영락하다니.
“그래, 그랬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노인의 흐린 눈이 남궁강을 향했다.
그래, 오직 그뿐이다. 이 천하에서 걸왕 소진평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오는 내내 흐린 정신으로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가진 정보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고민의 끝에 다다른 결론은 하나였다.
“마교의 본거지를 찾았네.”
“여기.”
늙은 거지가 자신의 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평생을 쌓아 올린 무공.
천하를 떨치는 명성.
그리고 남은 목숨까지 모조리 던져버린 늙은 거지는 그 모든 것을 희생하여 얻어낸 한 장의 종이를 아무런 댓가를 말하지 않은 채 남궁강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인간의 냄새로 물든 그 종이를 남궁강이 무겁게 받아들었다.
“걸왕 어르신의 희생은 무림맹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았다네. 희생한 것은 개방뿐이지.”
“개방의 희생 역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허면 개방은 이제 무림맹의 일원인가?”
“네. 피로써 의를 증명했으니 개방은 무림맹의 형제입니다. 이제 무림맹에는 칠대 세가가 있고, 구대문파가 있으며 또한 일방이 있을겁니다.”
“허허, 좋군. 참으로 좋아. 칠가와 구파. 그리고 일방이라. 참으로 좋은 말이야.”
그저 한 마디 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걸왕은 한 장의 지도를 댓가로 남궁강에게 증서를 요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 보는 이를 두고 공증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대신 남궁강이 내뱉은 한마디의 약속을 선택했다. 그리고 남궁강 역시 걸왕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을 알았다.
한 장의 종이나 누군가의 공증보다도 남궁강이라는 인간이 진심으로 건 약속이 더 무겁다는 것을 걸왕 소진평은 알았고, 그것을 믿었다.
물론 이러한 약속이 천년만년을 갈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적어도 남궁강이라는 인간이 살아있는 한, 그가 힘을 잃지 않는 한 이 약속은 유효할 것이다.
그리고 걸왕 소진평이라는 인간이 평생에 걸려 뿌려둔 개방이라는 씨앗이 발아하여 세상의 풍파를 스스로 이겨낼 만큼 자라나기에 그만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어르신. 걸왕 어르신!!”
향년 94세.
걸왕 소진평이 세상을 떠났다.
“존자!!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신체(神體)를 복용하시겠다니요!!”
“성지의 위치가 특정됐다. 적들이 밀려온다.”
“하지만 호법께서 생존자는 없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들이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성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이 시대. 나의 대적자는 보통 인간이 아니다. 거짓된 천리가 그를 돕고 있다. 그러니 나 역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세상에는 참으로 여러 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무언가 실패를 했을 때 그 이유를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먼저 찾는 종류의 사람도 존재한다.
검왕이 그러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는 애당초 그의 마음에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외부의 요인 때문이고 이번 일의 경우 역시 그러했다.
“백운호······.”
불의의 일격으로 뒷통수를 얻어맞고 꼴사납게 바닥에 얼굴을 쳐박았다. 실로 낭패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패배였는가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혁리광의 사지 가운데 멀쩡한 것은 왼쪽 다리 하나 뿐이었고, 남궁벽은 다시 멀쩡하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그의 앞에는 망할 백운호가 서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이 정도면 그 걱정이라는 녀석 충분히 덜어드린 것 같은데요.”
“뭐라고?”
“아니면 맹주께서도 혁리 대협과 비무를 하느라 충분히 지치신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제가 상대해드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생각해보면 애당초 말이 안되는 승부였다.
설사 비무에서 이긴다고 해도 그에게는 딱히 남는 것이 없었다. 이기는 것이 너무 당연한 승부. 하지만 지금처럼 이기기까지 부끄러운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 자체로 손해인 승부다. 그 망할 도사놈의 요설에 넘어가는 바람에 손해밖에 없는 짓을 해버린 셈이다.
방문 밖을 나서기도 꺼려진다.
나가면 사람들이 대체 뭐라고 수군거릴지······.
그렇게 남궁벽은 벌써 사흘째 방문을 나서지 못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알고 마중을······. 아, 하긴. 할아버지도 마을 입구에만 누군가 들어서도 누가 왔는지 훤히 내다보시는데 운호 너는 오죽 할까. 나는 네가 앉은 자리에서 중원 전체를 내려다 본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하, 그냥 화산 정도라면 또 모를까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화산이라고? 설마 이 화산의 다섯 봉우리 전부? 맙소사. 화경이란 정말 대단한 경지로구나.”
“앉은 자리에서 중원 전부를 내려다봐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하시더니 겨우 화산 정도에 너무 놀라시는 거 아닙니까?”
“인석아. 그건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 아니냐. 허······. 화산. 화산이라니······.”
개개인을 정확히 특정할 수 있는 범위가 그 정도이고 마인과 같이 특이한 기운을 색적할 수 있는 것은 삼백리에 가깝다는 말은 굳이 더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가신 일은 다 잘 해결됐습니까?”
“그래. 구대문파와 칠대세가는 조율이 모두 끝났다. 다만 황실의 경우 최근 달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며 몸을 빼는 것이 직접적인 지원을 바라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더구나.”
“조왕 전하의 서신을 전달했는데도 그렇습니까?”
“그나마 그 서신이 있어서 이만큼이나 빠르게 답을 들을 수 있었다. 황도 놈들 꾸물거리는 건 유명하지 않더냐.”
“그렇군요······. 그러면 광서대장군부는 어떻습니까?”
운호의 질문에 남궁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설마 무슨 문제라도?”
“광서대장군부의 가장 큰 전력인 남로군의 최정예 병력 팔백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몰살당했다. 그들을 이끌던 궁익 좌장군도 함께.”
허리춤에 호피를 두르고 있던 거한이 기억났다.
대부를 휘두르던 그의 무공은 실로 무서웠다. 물론 지금이라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자신이 있었지만, 지난 육 년. 그가 발전하는 동안 궁익 역시 어느 정도 발전을 이뤘을 터. 게다가 남로군이라면 광서대장군부에서도 가장 정예한 병력으로 궁익이 직접 이끄는 남로군 팔백이라면 중원의 어지간한 대문파 전력을 상회한다.
“소문에 의하면 마교의 피해는 전무. 물론 남로군이 전멸한 만큼 그 소문 자체가 마교를 통해 흘러나왔을 테니 오히려 커다란 피해를 입고 흘린 역정보일 확률도 있다는 말도 있다만······. 나는 그것이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본다.”
“극광오신······.”
“그래. 아마도 서평왕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십만대산에 기거하는 괴물. 그자가 움직인 것이 아닌가 싶구나.”
십만 대산의 괴물.
그것이야말로 운호가 이미 이준형의 몸을 차지한 대제사장은 감당할 자신이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교를 쉽게 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좋은 소식도 있다.”
“좋은 소식이라면?”
“마교 본단의 위치가 특정됐다.”
“네? 대체 어떻게?”
십만 대산의 넓이는 어지간한 소국보다 넓다. 심지어 그 넓은 지역이 평야도 아닌 험난한 산지에 곳곳에 흉악한 마인들이 득실거린다. 덕분에 마교가 발호한 지도 천 년이 훌쩍 넘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그들의 본거지는 단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다.
본래 운호는 원정단이 꾸려지면 직접 원정단에 참여하여 그들의 본단을 추적해볼 생각이었다. 헌데 그 위치가 특정되다니. 이렇게 되면 예상했던 시간을 극적으로 줄여서 이준형의 몸을 차지한 대제사장을 더 크게 압박할 수 있다.
“걸왕 소노사께서 마교의 대제사장을 직접 추적하셨다고 하더구나.”
“맙소사······. 그러면 소 노사께서는 지금?”
“아버지께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게다가 개방의 피해도 막대했다고 하더구나.”
“문시진인······. 문시진인······.”
오늘 들은 두 번째 부고 소식.
운호가 잠시 도호를 읊조렸다.
-맙소사······. 거지가 그렇게 죽었다고?
파검 역시 걸왕의 부고 소식에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그의 인생에서 무공으로 호적수가 지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검왕 남궁벽이었다면 단체를 이끄는 입장에서 호적수는 걸왕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구대문파와 칠대세가가 함께 묶여서 불리는 것처럼 걸왕의 개방과 그의 해룡방 역시 호사가들에게는 함께 묶어 쌍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세력의 규모에서는 개방이 월등했으나 천무십칠성 가운데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에 속하지 않은 고수가 이끄는 방파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존재한 덕분이었다. 물론 그것도 해룡방이 그가 남긴 거대한 빚 덕분에 깔끔하게 사라져 버린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아, 그리고 남은 개방도들도 지금 토벌단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개방도들이요?”
“그래, 이제 정식으로 무림맹에 가입을 했으니 한 손을 보태겠다는 의미겠지.”
-뭐라고? 정식으로 무림맹에 가입? 개방이?
“아, 아버지께서 약속을 하셨다. 개방의 이름을 칠가와 구파 그리고 일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해주겠다고. 이번 일만 잘 풀린다면, 그리고 걸왕 노선배의 이번 공로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럴만한 일이지. 강호무림을 위협하는 가장 큰 대적을 상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셈이니 말이다.”
파검이 뭔가 알 수 없는 기묘한 패배감에 휩싸였다.
물론 무인으로써 가장 높은 성취를 얻은 것은 파검 좌부원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와 호적수로 꼽히던 검왕은 무림맹주에 올랐고 그 가문인 남궁세가는 모용세가를 넘어 천하제일의 세가로 꼽히고 있다.
게다가 자신이 죽은 뒤 물거품처럼 무너져 버린 해룡방과 달리 개방은 걸왕의 죽음으로 오히려 한 단계 더 도약한다.
그가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흥, 구파 칠가. 이 얼마나 입에 짝짝 달라붙는 이름이냐. 헌데 뭐? 구파 일방? 아서라. 아서. 장담하건데 그깟 거지들 집단 몇 년도 못 가서 와르르 무너질게 분명하다.
파검의 그 귀여운 질투에 운호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