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262화 (262/288)

262화

화산검(17)

화산의 장서고는 몇 가지로 구분되어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정리된 서적이 모여있던 장서고부터 훑어보기 시작한 운호의 여정이 화산파 창립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화산파가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것은 진단노조(陳摶老祖) 진희이 선생 이후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송태조 조광윤과의 내기에서 이기고 이후 가르침을 전하는 것으로 영구적인 면세의 권리를 얻어낸 진단노조는 당시 화산에 난립하던 스물세 개의 도관을 하나로 통일했으니 그것이 현재 화산파의 시작이다.

하지만 화산파에서 시조로 섬기는 것은 진단노조 진희이 선생이 아니다. 이는 제국의 시조는 태조 홍무제이지만, 중화의 시조로는 태조 홍무제가 아닌 삼황오제를 꼽는 것과 흡사했다.

오백 년 이상 된 종이들이다.

물론 개중에는 아주 품질이 좋은 종이로 만들어져서 그 상태가 양호한 것들도 상당했다. 애당초 종이라는 것은 제대로 만들고 똑바로 관리만 해주면 천년도 너끈히 가는 튼튼한 물건이니까. 하지만 그 제대로 만든 종이라는 놈은 원체 비쌌고 화산에 난립했던 도관들 가운데는 재정이 그리 여유롭지 못한 도관들도 상당했다.

그리고 그런 도관에서 만들어진 서적들은 그것을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미세한 손상을 각오해야 하는, 혹은 이미 상당히 손상된 녀석들도 많았다. 쓸만한 서적이라 판단됐다면 아마 앞서 살펴본 장서고에 새롭게 필사한 필사본이 존재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자체가 윗선에서 별 쓸모 없는 서적이라 판단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운호는 그런 서적들조차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아······.”

그것은 진단노조 진희이가 통일했던 스물세 개의 도관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이름 모를 작은 도관의 이야기였다. 심지어 검술이나 도가의 이론에 관한 서적조차 아니었다. 그저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줄 법한 하나의 설화였다.

어떤 멍청한 사내가 멍청한 선택을 거듭했지만, 그 근간에는 선한 마음이 있었으며 거듭되는 실패에도 그 마음을 잃지 않았고 결국 그것이 복으로 돌아왔다는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운호는 놀랍게도 그 이야기에서 매농검의 흔적을 읽어냈다. 운호는 확신했다. 물론 세세한 초식들은 다른 검술들, 혹은 다른 무공에서 따왔겠지만, 매농검을 관통하는 그 기본적인 철학은 이 이야기에서 시작됐으리라.

물론 모든 검술이 매농검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화산검의 기본이 되는 납매검은 화산의 스물세 개 도관 가운데 스스로 전진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던 중양문의 검공을 집대성했고 광음검은 현재 화산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진단노조 진희이 선생의 무극선천도(無極先天圖)에서 따왔다. 그렇다면 과연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나머지 두 개의 검법은 어떠할까?

운호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게다가 운호가 자신의 검술을 보완하는데 모든 시간을 소비한 것도 아니었다. 강진이 연단한 선단을 통해서 당장 등선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완전한 해결이 아닌 긴 유예였다. 지상과 연결된 끈은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좋은 법이고 자하기공은 그것을 엮어내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이것은 문제라기보다는 자하기공의 장점이 워낙 대단해서 생기는 현상 같습니다. 사람이 절정 혹은 초절정이라 칭하는 과정으로 도약하는 데는 대단한 힘이 필요한데 보통은 집적된 내공과 영혼(靈魂)의 공명이 동시에 그것을 돕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자하기공의 경우 기해혈만이 아닌 단중혈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마치 두 개의 단전을 공명시키는 것 같은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영혼의 공명을 대신하죠. 결과적으로 혼이 그 본질인 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 없이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 그 말은······.”

“네, 말씀하신 자하기공의 문제점은 자하기공의 장점과 맞닿아있습니다. 제 생각에 장점만을 살리고 단점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겁니다. 물론 아직 제가 자하기공의 끝을 보지는 못했으니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에 불과하지만요.”

은퇴한 화산의 일대 제자들 가운데 자하기공 육단공에 이른 고수만 열일곱.

심지어 청허 본인의 경지는 팔단공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그 개량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운호의 자하기공이 오단공에 들어선 이후, 청허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운호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운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라는 것은 그들이 내렸던 결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시······.”

“하지만······.”

“하지만?”

“굳이 개량할 필요가 있을까요?”

운호의 질문에 청허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결국 문제가 되는 지점은 마교의 대제사장이 심어둔 함정이 존재하는 무공이라는 부분 아닌가요? 이것을 통해 등선에 성공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그 문제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 같은데요.”

청허진인이 멍한 표정으로 운호를 바라봤다.

그토록 많은 고수들이 모여 생각을 했음에도 어째서 그것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교의 대주교에게 농락당했다는 충격과 동시에 자하기공이라는 무공이 도사가 평생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우화등선에서 멀어지는 무공이었다는 충격이 겹쳐진 결과였다.

“확실히······.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게다가 전 자하기공의 논리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도는 본래 무문이고 자하기공 역시 문을 향해 나아가는 길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자하기공은 그 문이 닫힌 길 아니더냐.”

“글쎄요······. 그 문은 닫힌 문이 아닌 너무 순탄하게 길을 걸어온 탓에 근력이 부족하여 열어젖히지 못하는 무거운 문일지도 모르죠. 다른 사람들은 길의 중간중간에서 그보다 훨씬 가벼운 문으로 문을 여는 요령을 익히지만 자하기공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자하기공은 문 여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길이다?”

“네, 그 대신 남들보다 문 앞에 훨씬 빨리 다가갈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요.”

또한, 그 와중에 기존에 하던 화산의 검술을 재정립하여 그 재능이 하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이라도 거듭 도전할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일 역시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좋다. 많이 늘었구나.”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기는 지금 속도만 하더라도 내 생각보다도 진도가 훨씬 빠르다.”

운호의 사제인 장호의 오성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나쁘지 않은 것을 넘어 중원 어느 곳을 가건 후기지수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열일곱개의 초식. 거기서 파생된 사백오십구 개의 응용식과 그것을 활용한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

매농검을 완전히 익히기 위해 필요한 초식의 숫자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운호는 매농검의 열일곱 개 초식만으로 그 오의를 깨달았다. 나머지는 그 깨달음의 주해에 불과하다. 장호의 경우 열일곱개의 초식으로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사백오십구 개의 응용식 가운데 절반이 넘게 익혔음에도 여전히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기는 요원했다.

하지만 결국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는 사백오십구 개의 응용식으로 귀결되고, 사백오십구 개의 응용식은 열일곱 개의 초식으로 귀결되며 그 모든 초식들은 매농검을 이루는 하나의 논리로 귀결된다.

그 결과, 장호의 머리는 아니더라도 그 몸이 초식 전체를 관통하는 뜻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응용식을 익히는 속도가 왜 조금씩 빨라지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씩 쉬워지는 건가? 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적응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운호가 원했던 형태 그대로였다. 기종의 무공이 그저 부단히 익히고 수련하는 것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검종의 무공 역시 이토록 부단히 익히고 수련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핵심을 깨달을 수 있는 구조가 되기를 원했다.

‘이대로라면 응용식을 전부 익히고 변초의 십 분지일 정도만 몸에 때려 박으면 성취를 얻을지도······.’

그야말로 하루 열두 시진을 모두 깨어있어도 다 해내기 힘들 것 같은 바쁜 시간들이 흘러갔다. 본래는 아무리 사람의 오성이 대단하다고 해도 절대적인 시간은 어찌할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운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몽원경.

그 세상을 통해서 운호는 남들의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을 영위할 수 있었다. 낮 동안 읽으며 외웠던 책의 내용을 궁구하고, 수천 권에 달하는 막대한 서적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동시에 자하기공을 수련했으며 매농검의 다음인 자운검을 마치 매농검과 같이 해부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다.

운호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은 사내에게 향했다.

반개한 눈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남방계 노인.

그는 마치 무기물이라도 된 것처럼 그렇게 앉아 주위의 풍광 속에 묻혀 있었다.

활불이라는 인간이 오백 년에 걸쳐 쌓아올린 백(魄).

그 모든 기억의 집합이 소진되고 남은 것은 그와 같은 껍데기뿐이었다. 현재 그에게 남은 것은 저렇게 앉아 명상을 한다는 기억뿐이었으니, 어느 순간 그조차 사라진다면 그때야말로 오백년을 내려온 활불이라는 이름의 전설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일 것이다.

그렇게 사멸해가는 활불을 바라보는 운호의 눈에 약간의 아쉬움이 감돌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몇 가지 생각들을 엮어냈다. 하지만 그것이 무공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머릿속에서 엮어낸 그것들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작동하는지를 시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열세 살.

운호는 처음 몽원경을 얻은 이후 지금까지 몇몇 순간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성취를 시험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증무진인 목운평이라는 절대자부터 파검 좌부원 그리고 활불에 이르기까지. 그가 몽원경에서 상대해야 했던 상대는 하나 같이 천하제일이라는 칭호에 합당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운호는 항상 전력을 다해 부딪혀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응? 네 녀석이 여긴 어떻게?”

“그야 당연히 초대를 받았으니까 왔겠지. 그러는 네 녀석이야말로 여긴 어떻게 온 거냐.”

“초대를 받았다고? 증무 도사에게?”

“설마 네 녀석도?”

지독하게 잘생긴 중년의 사내. 그리고 기골이 장대한 호한.

두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응? 저건 종 소저?”

저 멀리서 날아오는 한 자루의 대검.

운호와 마찬가지로 그 별호에서 소(小)자가 떨어져 명실상부하게 검후(劍后)라 불리는 종남의 종화였다.

-탁

그렇게 바닥에 내려앉은 검이 어느새 등에 검을 맨 한 명의 여협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순간 꾹 닫혀있던 모옥의 문이 열리고 집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시간 맞춰오시느라 고생들 하셨습니다. 그러면 긴 말 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하시죠.”

“잠깐, 나는 분명 증무 도사 자네가 비무첩을 날려 찾아왔네만. 여기 이 둘은 뭔가? 설마 참관인인가?”

“참관인?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야말로. 잠깐만······. 지금 설마?”

두 사내의 시선이 동시에 운호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사이.

종화의 검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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