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화산검(4)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라고? 그건 좀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강아현이 살짝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운호가 보통 사람도 매농검을 익힐 방법을 강구했다고 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건만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라니.
그녀의 그 질문에 운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지.”
그 선선한 인정에 강아현이 고개를 갸웃할 때, 운호가 말을 이어갔다.
“너한테는. 어쩌면 호 사제한테도.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교본이야.”
“교본?”
“응,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는 내가 본 사람 가운데 가장 둔한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매농검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식의 숫자야. 물론 세상은 넓고 때때로 내 예상조차 빗나가는 사람도 존재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매농검을 익히는 데는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어.”
사람의 재능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거기서 다시 백을 들으면 천을 안다. 운호가 그와 같으며 검종의 무공은, 적어도 천중일검 목운평이 집대성했던 검종의 무공은 오직 그런 천재들만을 위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하나를 들어도 둘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고, 둘과 셋을 알려주면 다시 하나를 잊는 이도 드물지 않다.
“자하기공을 익히면서 생각했어. 왜, 사조님들도, 사숙도, 사백도 다들 그러셨잖아. 선심후수의 기종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대도이며, 검술일성의 검종은 오직 선택받은 소수만이 걸어갈 수 있는 좌도라고. 난 그걸 바꾸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나 되는 초식을 모조리 외우는 것은······.”
“조금 심하지.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기종의 무공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대도라고 하였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기종의 무공이라고 하여 재능을 타지 않는다면 운호와 이준형의 차이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물론 차이는 존재하지. 기종의 무공은 검종과 달리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어쨌든 꾸준히 나아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게으른 천재를 부지런한 범재가 따라잡을 수도 있고 말이야.”
기종의 무공은 쉽게 말하자면 완만한 비탈길이었다. 가진바 재능에 따라 걷는 속도는 다르겠지만 누구나 걸어가는 것을 시도할 수는 있다. 게다가 심지어 마교의 대제사장인 티샤 마이트레야가 그 비탈길 자체에도 약간의 사기를 쳐두었다. 빠를 수밖에 없다.
반면 검종의 무공은 절벽과도 같다. 그것을 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라면 완만한 비탈을 타고 오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빠르게 정상에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감히 시도해볼 엄두도 내기 힘들고, 설사 도전한다고 해도 십중팔구는 실패한다.
그렇기에 운호가 만든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는 일종의 계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가파른 절벽을 한 걸음 한 걸음 빙 둘러 오를 수 있게 만들어둔 계단이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기종의 무공은 설사 범재라고 해도 삼십 년을 하루 같이 수련한다면 그 성취가 꾸준히 성장하여 경지를 엿볼 수 있다지만 검종은 다르잖아. 삼십 년을 하루 같이 수련한다면 그 나이가 벌써 쉰 살을 넘어갈 테고. 그러면 결국 공 백부처럼······. 게다가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라니. 그건 삼십 년을 꼬박 수련한다고 해도 다 익히기 어려울 만큼 방대한 양이잖아. 심지어 검종의 공부는 검술 하나를 익힌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그 방대한 양의 공부를 모조리 꿴다고 해도 익히는 건 결국 매농검 하나일 뿐이고.”
운호가 아현이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맞아. 네 말처럼 재능이 부족한 이라면 평생 매농검 하나만 익힌다고 해도 경지에 오르기 어려울 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선심후수의 기종 역시 마찬가지야. 사람에 따라서는 평생을 수련해도 초절정은커녕 절정에도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물론 삼십 년을 하루 같이 수련하면 누구나 오를 수 있다는 말에는 동의해. 하지만 과연 삼십 년을 하루 같이 수련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실제로 결국 화산에 정식 제자로 남는 이들을 보면 보통 사람보다 경맥이 더 두껍거나 근골이 단단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무공에 재능이 남다른 이들이야. 심지어 그런 이들 가운데도 절정에 오르지 못하는 이는 절반에 가깝고. 난 그저 기종과 마찬가지로 검종 역시 모든 이들이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할 뿐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는······.”
그녀의 이야기에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야.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의 깨달음이지. 증무진인······. 아, 그러니까 나 말고 천중일검 목운평 사조님께서는 열일곱 개의 초식으로 그것에 이르는 길을 그려두셨어. 하지만 너무 불친절했지.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성큼성큼 절벽을 오를 수는 없어. 천천히 완만하게. 아이가 기는 법을 익히고, 두 발로 일어나 걷고, 마침내 뛰어다니는 것처럼. 매농검 역시 익숙해지면 결국 그 모든 변초들을 외울 필요 없이 그것을 관통하는 무리를 깨달을 수 있을 거야. 그게 누군가는 그저 열일곱 개의 초식만으로 가능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사백오십구 개의 응용식을 모두 익히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고, 또 누군가는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를 모두 익혀야 가능한 것뿐이야.”
“그렇구나. 혹시 그러면 네 사제도 저 변초들을 모두 익히기 전에 매농검을 깨달을 수도 있다는 말이겠네?”
“뭐, 그렇겠지? 하지만 그래도 저 녀석은 모든 변초를 다 한 번씩은 펼쳐봐야지. 명색에 대종사의 두 번째 제자인데. 앞으로 받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야 할 거 아니야.”
“어? 대종사? 하지만 검종의 대종사라면······.”
그건 운호 너 잖아.
굳이 입밖으로 내뱉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강아현의 얼굴 표정은 그런 이야기를 던지고 있었다. 운호가 그 말에 답했다.
“사부는 분명 마지막에 자신만의 화산검을 완성했어. 나와는 조금 달랐지만······.”
천리와 닿아있던 순간의 기억들은 희미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운호는 공야찬이 그 마지막 순간에 초월의 길에 손이 닿았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증무진인이 만들어낸, 그리고 운호가 걸어온 화산의 검과는 다른 갈래의 화산검이었으리라.
그렇기에 운호는 기대할 수 있었다. 그가 상세하게 만들어낼 모든 화산검의 주해 속에서 새롭게 탄생할 수많은 화산의 검들을.
“자, 그러면 이야기는 이쯤하고. 아현이 너도 익혀봐야지? 소원이었잖아. 매농검 익히는 거.”
“나는 응용식 정도면 충분하겠지?”
“글쎄? 그건 네가 하기에 달린 것 같은데?”
***
운호는 강진과 마주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노화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가.
물론 장구한 세월이라는 이름 앞에서 노화는 모두에게 공평하다. 결국 태어난 모든 것들은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니.
하지만 인간의 삶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봤을 때, 어쩌면 노화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이제 강진의 나이도 지천명을 훌쩍 넘어갔다.
본래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나이를 먹으며 새겨진 몇 개의 주름이 마치 장식인 것처럼 멋스러움을 더했다. 어디를 봐도 사십대 중반 이상으로 보긴 힘들다. 실제 나이는 그의 사부인 공야찬과 고작 한 살 차이였고, 딱히 자하기공을 익힌 것도 아님에도 도저히 한 살 차이라고 믿기 힘들 만한 차이였다.
“그래, 몸은 좀 괜찮고? 그러니까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안 그래도 사숙께 상담 드릴 것이 좀 있었습니다.”
“상담?”
“네.”
운호가 현재 자신의 상태를 강진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상과의 연결고리가 헐거워지고, 저 천상의 인력이 그를 끌어당기는 느낌이 든다는 것부터 자하기공을 익힌 이후 그 연결고리에 약간의 힘이 더해지기는 했지만, 과연 시간 내로 일정 이상의 성취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까지.
강진이 운호의 맥문을 잡고 한참을 진단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언가 기묘한 기구들을 이용하여 운호의 몸을 면밀하게 검진하던 그가 자신의 잘 정돈된 수염을 손가락으로 헝크러트리며 말했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로구나.”
사실 본래 강진이 운호를 부른 것은 아현이와의 혼례는 대체 언제 진행할 생각이냐며 따끔하게 꾸짖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은 쌔까맣게 사라진 이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운호의 상태는 그가, 아니 그의 사문이 필생의 숙원으로 여기던 것에 거의 근접해있었다. 게다가 운호는 가장 가까이에서 우화등선을 목격했으며, 심지어 본인이 그에 근접한 현상을 두 번이나 경험한 아주 보기 드문 귀한 실험체였다.
우화등선을 멈춘 반선이라니. 세상에 또 어디 가서 이런 경우를 볼 수 있단 말이던가.
안 그래도 최근 연구가 꽉 막혀있던 터였다. 어쩌면 운호를 통해 새로운 단초를 잡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운호가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들에 대하여 조금 더 소상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 가운데 강진이 아예 모르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강진은 어디까지나 ‘이론과 논리’를 통하여 ‘추측’을 하던 것들이었고 운호에게 그것들을 ‘경험’한 ‘사실’이었다.
그 차이는 실로 거대했다. 그저 추측하던 것들을 사실로 바꿔 넣었을 때, 그의 상상은 더욱 더 먼 곳을 향해 뻗어나갈 수 있었다.
“영혼백육이라······. 그래,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가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떨어지는 법이지. 역시 그것은 죽음만이 아니라 우화등선에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였겠군. 그렇다면 우화등선 시에 육신이 남지 않는 것은 결국 그 수많은 빛과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만드는 재료가 육과 백이라는 내 생각이 맞아 떨어지는 것인가? 허면 시해선이 격이 떨어지는 신선이라고 하는 것도······.”
강진의 눈이 번뜩였다.
“허면 나에게도 한 번 그걸 보여줄 수 있겠느냐?”
“네? 하지만······.”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잘 안다. 그런 일이 거듭될수록 너의 영혼은 하늘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겠지. 하지만 만약 내 생각이 맞다면 자하기공을 대성하는 것에 뒤지지 않을 선물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얼른 한번 보여주려무나.”
운호가 눈을 반개했다.
그리하여 그가 들이킨 호흡이 그의 코와 입을 통해 나오는 순간 더 이상 지상의 공기가 아닌 천상의 무언가로 변했다.
모두가 무채색인 곳에서 홀로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운호의 존재가 또렷해지고 또 또렷해졌다.
보통의 사람이 코앞에서 그 장엄한 광경을 목격한다면 압도되어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초절정의 고수인 청허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강진은 조금 달랐다.
운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 그의 곁에 맴도는 내음과 그 빛의 질감을 점검했다.
“그만!!! 그만하면 됐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운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강진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광인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종이 위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역시, 그랬구나. 바로 그게 문제였어. 운호야 내일!! 내일 다시 찾아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