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화산검(3)
“그래서 식은 언제 올릴 생각이야?”
“엄마!!”
“얘, 물론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 정도는 우리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본래 세상일이라는 게 딱 좋은 상황을 찾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법이야. 이제 아현이 네 나이도 스물여섯이고, 혼사를 치르기에 어린 나이도 아니잖아.”
두 모녀의 이야기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 말이 옳다. 너와 그 아이가 이런 관계로 지낸 것도 벌써 몇 년째더냐. 비록 얼마 전에 흉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됐건 잘 지나갔고, 오히려 경사를 치르는 것으로 흉사를 잊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강아현이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보아하니 아현이 너도 아무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구나. 하긴, 마음이 없었다면 거기서 이 애비만 홀로 보내고 남지는 않았었겠지. 역시 장인어른 말씀이 옳았어······. 딸 자식은 키워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더니.”
“여보!!”
“어험, 하여간. 운호에게는 이 애비가 알아서 다 잘 이야기 할 터이니 너는 마음의 준비만 잘하고 있거라.”
***
“사부 몸은 좀 괜찮아요?”
“그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주는 밥만 먹고 있자니 호강도 이런 호강이 없구나. 이대로 조금만 더 누워있다간 숟가락 들 근육까지 모조리 퇴화해버릴 것 같다.”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시래요? 상대가 동귀어진의 수를 쓰는데 그걸 그렇게······.”
“어허, 그건 누가 봐도 나를 물러나게 하고 저쪽으로 합류하려는 허장성세였다. 거기서 만약 내가 물러났더라면 마인들끼리 뭉쳤을 것이고, 아마 상황은 더 심각해졌겠지. 그래도 이 사부가 목숨을 걸고 막아준 덕분에 사태가 이 정도에서 그친 줄 알아야지. 나 아니었으면 네가 좋아하는 그 운ㅎ.”
“사부!!!”
종화가 벽운의 팔을 꾹 쥐었다.
“이 사부 귀 안먹었다. 하여간 제자라고 하나 쌔빠지게 키워놨더니, 늙고 병든 사부 괄시나 하고 말이야. 뭐, 이제 더는 배워갈 것도 없다 이거지.”
“늙고 병들기는 누가 늙고 병들었다고 그래요. 그리고 배워갈 게 없기는 왜 없어요. 아직 못 배운 게 한가득인데요. 그러니까 얼른 털고 일어나세요.”
벽운이 자신의 제자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종남에 존재하지 않았던 태을의 방식으로 초절정에 발을 디딘 자랑스러운 제자다. 그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태을검선이 새로운 법을 가르치려고 시도한 것은 종화 하나만이 아니었다. 정말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태을에 입문하는데 성공한 것은 종화가 유일했다. 태을의 법은 그만한 자질을 필요로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종남은 금녀의 문파였다. 아무리 태을검선이 문파 최고의 고수이자 큰어른이라고 해도 그 오랜 전통을 깨트리는 것이 어찌 쉬웠을까.
“정말 얼른 털고 일어나도 되겠느냐? 그래도 화산에 조금 더 머무르려면 내가 이렇게 누워서 못 일어나는 것이······.”
“사부!!”
“아 거 참. 이 사부 귀 안 먹었다니까.”
참으로 안타까웠다.
태을은 종남의 새로운 법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법이라 하여 어찌 기존의 영향을 무시할 수 있을까.
정양자가 순양자에게 법을 전한 이래 근 오백년 동안 종남은 순양을 목표로 해왔다. 음기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양기를 위하여 종남은 금녀를 고집했다. 하지만 태을은 어떠한가. 순양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을 근간으로 한 것이 아니다. 태을은 순양보다 오히려 더 근원적인 개념이고 그렇기에 음과 양이 조화롭다.
그의 제자인 종화는 다른 종남의 제자들이 그렇듯 이성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오직 수련에 몰두했다. 벽운은 늘 그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인 태을검선이 죽었고, 그의 사부이자 종남의 장문인 역시 그렇게 갔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을 이어야 하는 과중한 의무가 있었고, 마침내 초절정에 올라 그 의무에서 조금 자유로워졌을 때, 종화는 이미 마음에 너무 단단한 벽을 쌓아 올린 채였다.
“종화야. 어떠냐.”
“뭐가요.”
벽운의 뜬금없는 질문에 종화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답했다.
“순양진인께서 말씀 하시기를 그것은 시험이 아닌 삶의 시금석이라 하셨다. 너도 이제 그것이 그저 시금석으로 느껴지느냐?”
“뭐······. 대충은요.”
“그래, 그거면 됐다. 화산에 머무를 핑계는 내가 만들어줄 테니 넌 네 인생의 시금석을 조금 더 좋은 곳에 두도록 해보거라.”
“사부······.”
“물론 네 경쟁자를 생각해보면 그게 참······. 하필 상대가 섬서성 최고의 미녀라니. 뭐, 결과야 좀 뻔하겠다만 그래도 뭐 해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겠느냐? 게다가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더냐. 운호 그 녀석. 섬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이와 벌써 몇 년을 함께 지냈는데 아직인 걸 보면······. 취향이 아주 독특해서 너를 선택할지도.”
“사부!!!”
어쩌면 그의 인생에 만약 아이가 있었더라면 이와 같지 않았을까?
벽운이 빼액 소리지르는 자신의 제자를 참으로 기꺼운 눈으로 바라봤다.
***
운호가 호흡을 골랐다.
-좀 어떠냐?
‘글쎄요······.’
그의 사부인 공야찬은 운호에게 자하기공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것은 증무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자하기공을 수련해본 운호는 어째서 그리하였는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공부이기는 했다. 감히 신공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대자연에 존재하는 막대한 기운 가운데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힘은 불과 한줌이다. 포원공과 같은 공부는 그것을 운기를 통하여 정제하고 또 정제하여 나에게 가장 적합한 기운으로 변환하여 차근차근 기해혈을 단련, 확장해나간다. 말 그대로 단전(丹田). 몸의 밭이다.
반면 자하기공은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의 힘을 허투루 내보내지 않는다. 그 기운들은 묘한 형태로 조금씩 전환되어 전신의 근골에 분산된다. 동시에 기해혈만이 아닌 단중혈을 단련한다. 아니, 어떻게 보자면 심지어 그 핵이 기해가 아닌 단중에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대단하구나. 역시······.”
우화등선을 앞둔 반선답다.
청허가 뒷말을 삼켰다.
자하기공에 입문한 것이 고작 닷새.
운호는 벌써 자하기공의 삼단공을 성취했다. 실로 터무니없는 속도였다. 다룰 수 있는 힘의 크기가 턱도 없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만약 이 속도 그대로 발전한다면 앞으로 일 년도 안 돼서 청허 자신에 필적하는 성취를 얻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원하던 것은 좀 얻었느냐?”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쉽게도 아직입니다.”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냐?”
“아뇨, 다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아, 비유하자면 그저 바다로 떠내려가려는 배에 명주실 한올을 걸어둔 격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명주실 한 올이라······.”
결국 성취의 문제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삼단공에 이르른 성취가 고작 명주실 한 올이라니.
“허면 어느 정도는 되야 도움이 될 것 같으냐.”
“적어도 지금의 백 배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풍랑이 오는 바다까지는 아니더라도 평탄한 바다에서 떠밀려 가지 않으려면 말이죠.”
“적어도 육단공의 극성······. 혹은 칠단공에 올라야 한다 이 말이로구나. 그래도 다행이다. 이 속도대로라면 성취를 얻는데 그리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모두 사조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가르침은 무슨······. 쉰소리 그만 하고 얼른 내려가보거라.”
“네. 그러면 이만.”
운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주변의 풍광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극성에 이른 부운약표의 보신경이었다.
운대봉 정상에서 옥녀봉 중턱까지 이르는데 고작 몇 걸음.
그의 사부인 현종자 공야찬의 모옥에서 이제는 증무자 백운호의 모옥이 된 그곳에는 언제나와 같은 얼굴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형, 오셨습니까.”
“그래.”
공야찬의 희생 아래 목숨을 구한 장호는 그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자책하며 하루하루 뼈를 깎는 마음으로 검술을 수련했다. 그리고 운호는 굳이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물론 사람의 몸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고, 그것은 수련 역시 마찬가지다. 한계를 넘어서는 수련은 사람을 성장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하고 퇴보하여 결국 파멸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운호가 보기에 장씨 집안은 애당초 육체적인 재능을 너무 심각할 정도로 타고 태어났다. 하루에 다섯 시진씩 검을 휘둘러도 육체가 파열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는 아직 장호의 성장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점도 주요한 요인일 것이다. 아마 몇 년 후에 저런 수련을 한다면 오래가지 않아 어딘가 단단히 고장이 나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몇 년 후의 일이고, 지금은 저런 수련이 독은커녕 약이 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어제 가르쳐준 것은 조금 이해가 됐느냐?”
“네,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거듭 반복을 하다 보니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천재는 둔재를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장호는 둔재라고 할 만큼 부족하지 않았다. 그는 운호의 뒷 기수 제자들 가운데 발군의 재능을 지닌 인재였다. 하지만 그런 재능 조차도 운호와 비교하자면 천재와 둔재만큼 차이가 났다.
그렇기에 운호는 굳이 장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본래 매농검의 초식은 십칠 초. 운호는 그 열일곱 개의 초식을 통하여 매농검의 요체를 파악했고, 그것을 지금의 형태로까지 완성시켰다.
그렇다면 매농검의 요체는 무엇인가?
효율이다. 그것은 미시의 불합리가 거시의 합리성으로 이어지는 역설적인 이치였고 결국 그것을 깨닫는 것이 매농검을 익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호와 같은 재능을 타고 났을 때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운호는 매농검을 분해했다.
열일곱 개의 초식 하나하나에 수십 개의 응용식을 더하였다. 그리고 그 응용식에 따라 분화되는 수많은 변초들 가운데 가장 높은 빈도로 발생하는 변초들을 하나하나 장호에게 박아넣었다.
계단이 너무 높아 마치 절벽과 같다면 그 사이사이에 디딤돌을 만들어주면 그만이다. 그 디딤돌에 닿는 것조차도 너무 어렵다면 그 디딤돌을 향해 가는 길에 발자국을 새겨주면 그만이다.
천재는 천재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범인에게는 범인의 방식이 있다.
검종의 무공은 오직 하늘의 선택을 받은 재능에게만 자신을 허락한다고 했다.
그리고 하늘의 선택을 받았음에도 끝끝내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운호가 그러한 검종의 무공에 하늘의 선택을 받지 못한 범인들이 걸어올 길을 새겨넣기 시작했다.
양적인 축적이 임계점을 넘어가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했던가?
내공이 그러하다면 검술 역시 어찌 다를까.
열일곱 개의 초식에 따른 사백오십구 개의 응용식. 그리고 그 응용식에 따라 분화되는 삼만구천팔백사십칠 개의 변초.
운호가 장호의 머리에, 아니 장호의 몸뚱아리에 그 모든 식들을 억지로 욱여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