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천중일검(5)
파검 좌부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의 무공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철저하게 실전성을 띠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삼류라는 표현이 적절한 시골의 무관에서 무공을 사사하였으며, 오로지 실전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개화시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연이 있기는 했지만, 초절정에 오르기까지 그의 무공체계를 구성한 것은 실전, 그리고 그것을 소화해낸 좌부원이라는 인간의 오성이었다.
그런 그의 무공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직후 있었던 태을검선과의 만남부터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만났던 기연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한 일이었다.
태을검선은 그에게 상승 무학에 있어 ‘철학’이라는 것이 어째서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 10년.
그의 절기 천하(天下)는 그렇게 태어났다.
운호의 탈을 쓴 괴인의 검술이 이어졌다.
모든 무공은 산의 정상을 오르기 위한 길이다. 다만 그 가운데는 정상까지 이어지지 않은 길도 있고, 험한 길도 있으며, 상대적으로 편한 길도 존재한다. 그리고 명문의 무공일수록 그 길은 평탄하고 쉽기 마련이다.
저자가 사용하는 검술들 역시 길이었다.
그의 무공과는 달랐다. 하지만 산의 정상에 올라 허공에 발을 디딘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실로 터무니없는 길이다.
산을 직선으로 오르지 않는다. 빙글빙글 돌아온다. 험로를 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험로에 몸을 던진다. 무공의 목적이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함임을 고려할 때, 저 무공은 참으로 어리석다.
그래, 분명 그래야 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무공은 산의 정상을 오르기 위한 길이다. 당연하다. 초절정의 고수는 초절정에 이르는 길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절정의 경지까지 안전하게 오르는 길을 알려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만 제대로 해낸다고 해도 신공절학이다.
하지만 대체 저 무공은 무엇인가.
만약 파검 좌부원이 마음의 검을 얻기 전이었다면 그저 비효율적이며 우스꽝스러운 무공이라 치부하고 말았을 것이다. 과연 화산의 검종이 망한 이유가 있구나. 세월의 흐름에 낙후된 백 년 전의 무공이로구나.
하지만 파검은 초절정으로 분류되는 기준 너머를 엿본 ‘천하’를 입에 담을만한 무인이었다. 또한, 지금 그가 상대했던 마교의 대제사장이라는 작자는 명백히 그 기준 너머에 위치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저 길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찌하여 굳이 저런 험로를 선택하고, 저렇게 빙빙 돌아 산을 오르는지를.
절정이 아니다.
저 검술들은 단지 저 무공들을 제대로 익혀내는 것만으로도 절정 그 너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백운호, 아니 목운평의 네 번째 검술.
광음(光陰)이 대제사장의 마음을 갈랐다.
그리 대단한 일격은 아니었다. 지극히 예리하지만, 뼈를 바수지는 못할 그저 작은 면도날 같은 일격이다.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다음, 그다음을 볼 수 있다면.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이의 몸에서 느껴지던 이질적인 기운이 한순간에 스르륵 사라졌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 편린 정도는 남아있다. 하지만 너무나도 미약하다. 파검 좌부원은 깨달았다. 여기까지구나. 참으로 아쉽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라 했다.
공자왈 맹자왈은 모른다.
하지만 검술. 검술에서라면 좌부원 자신은 문일지십의 기재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안다. 하물며 저렇게 친절하게 하나에서 넷까지 보여줬는데 그 뒤를 조금도 유추하지 못한다면 어찌 천무십칠성(天武十七星)이며 어찌 파검(波劍)이라는 이름을 사용할까.
검을 쥐자 절로 마음이 일었다.
사라져 보이지 않던 마음의 검이 또렷했다.
대제사장은 반응하지 못했다.
저 마교의 수괴 말 대로라면 저 괴물은 천축의 석가모니가 설법을 베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이천 년을 살아온 괴물이다. 전설에 나오는 용도 두 번은 승천할만한 시간이다. 그 정도면 저 거대한 마음의 나무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몸이 가볍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 같다. 당연하다. 마음에는 무게가 없으니.
아이의 눈이 휘둥그렇다.
참으로 재능 넘치는 아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결정적인 하나가 부족하다.
세월.
적어도 삼십 년. 아니다. 저 재능에 저러한 무공이라면 이십 년이면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아이가 이 싸움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그만한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면 오늘 싸움이 훨씬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저기 나자빠진 사람들 가운데 최소 절반은 살아 있었겠지.
고작 세 치.
대제사장의 몸이 움직였다. 어마어마한 세월이 만들어낸 거대한 마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다. 파검이 만들어낸 여덟 가닥의 굵직한 상처. 모용경 그 영감님이 기어코 만들어낸 패인 자국. 그래, 저기 멍같은 부분은 거지가 만든 상처로구나. 아마 저 작고 예리한 자국은 조금 전의 그 검격이 만든 상처겠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오래되고 더 치명적인 흉터들이 곳곳에 그득하다. 아, 그래. 오늘이 처음이 아니로구나.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람이 이 괴물과 싸워왔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괴물의 손에 죽어나갔던 것일까.
하지만 그것 역시 오늘로 끝이다.
파검 좌부원이 날카로운 마음이 거침없이 그 거대한 나무를 갈랐다.
밀도가 다르고 강도가 달랐다.
마교의 대제사장이 양손을 모았다.
한계를 넘어선 양을 단단히 뭉쳐냈다. 파검의 검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파검의 마음이 더 단단하고 더 날카롭다.
운호의 시야에 좌부원의 몸이 들어왔다.
신체의 말단. 좌부원의 몸이 조금씩 빛으로 흩어진다. 그윽한 향기가 그 흩어지는 빛을 타고 퍼져 나왔다.
마음은 무게가 없었기에 좌부원의 몸은 그의 마음과 같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그곳에 모인 이들 모두가 알았다. 이것을 지칭하는 수많은 단어가 있다. 탈각이니 우화등선이니 성불이니. 결국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인간이 인간의 탈을 벗는다.
가면인이 이를 악물고 웃었다.
당연하다. 인간을 벗어난 존재는 그에 걸맞은 곳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곳은 천상계도 아니고 수라계도 아니다. 인간계에 머무는 것은 오직 인간이며, 인간의 경계는 아라한까지다.
불(佛)? 아니다. 거기까지도 아니다. 그저 보리살타(菩提薩埵). 그는 이미 아미타불조차 이겨냈다. 하물며 보리살타쯤이야. 두터운 세월의 힘으로 그저 버텨낸다. 상처는 남겠지. 하지만 그뿐이다. 저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대로 진신의 상처 없이 버텨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여기까지로구나······.
그 빛의 소용돌이 사이.
운호의 머릿속에 목운평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조님?’
-그래도 나의 마지막 정도까지는 도달해주기를 바랬건만······. 이것은 그 이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더 이상 답은 없었다.
좌부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빛의 조각들이 점점 커졌다.
개천(開天)
하늘이 열렸다. 덩어리 진 빛의 조각들이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간다. 그래, 별빛이다. 그것은 마치 별빛을 닮아있었다. 별이 하늘에 머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 별빛 역시 하늘로 오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몸이 가벼워지는 만큼 검은 날카로워진다. 대제사장의 나무 깊숙한 곳까지 좌부원의 검이 뻗어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했다.
이천년(二千年)
수십 개의 왕조가 세워지고 또 멸망했다. 수백 명의 인간이 스스로를 천자라 칭했다. 그토록 긴 세월이다.
인간을 넘어서는 검으로도 단번에 베어버릴 수 없는 지독한 세월.
하늘과 통한 천인(天人) 좌부원은 알았다.
부족하다. 그것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던가. 어차피 인간사 흥망성쇠 돌아서면 피안인 것을.
인간 좌부원이 생각했다.
처가의 재산을 홀라당 날려 먹었음에도 말없이 옷을 다려주던 아내와 아비가 남긴 변변찮은 가업을 잇겠다고 데릴사위를 데려 온 당찬 딸. 그런 딸 때문에 머리가 빠지고 있는 사위. 다행히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를 많이 닮은 귀여운 손녀.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전답과 배, 해룡방의 모든 것을 담보로 맡겨 사들인 전쟁 채권.
좌부원이 빛으로 화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일 뿐이다. 속세의 것은 인간을 벗어난 이를 속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운호가 있었다.
증무진인 천중일검 목운평이 사라진 몸.
활짝 열린 백회와 용천.
천인합일에 이르러 융통무애하던 그 몸은 서서히 본래의 그것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이전과 같이 활짝 열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닫히지도 않은 몸.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부족하다.
하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저 싸움에는 감히 끼어들 수 없다.
저것은 인간을 벗어난 이들의 싸움이다.
‘잠깐만······.’
깨달음은 부족했다.
하지만 한 번 해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라면?
운호는 증무진인이 자신의 몸으로 했던 모든 것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한 번 본 것을 그대로 해내는 재능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정도가 있다.
목운평이 마지막으로 펼쳤던 그 광음검은 그의 백(魄)을 태워 만들어낸 일격이었다. 어찌 그것을 기억한다고 하여 그대로 펼쳐낼 수 있을까.
운호가 검을 치켜들었다.
단 한 번의 호흡에 막대한 기운이 전신을 순환했다. 그저 지켜 볼 때와 다르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막대한 힘. 하지만 휘둘리지 않았다.
기회는 단 한 번.
하지만 부담은 되지 않았다.
비록 십대고수라 하였지만, 천하를 논할 재능이라고 했다.
이제는 안다. 증무진인이 말하는 십대고수는 천무십칠성과 다르다는 것을. 그는 자존광대한 사람이다.
천하 십대 고수.
그것은 지금 저기서 저 하늘의 문을 열어젖힌 파검 좌부원과 같은 사람을 뜻함이다.
기운이 당연히 움직여야 하는 경로로 움직였다.
비유하자면 처음 말을 타는 이가 말의 잔등에 서서 활을 쏘아 백보 밖의 과녁을 명중시키는 묘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운호의 재능이, 그의 의지가 그 어려운 것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이뤄냈다. 그리하여 그 기운의 움직임에 맞춰 몸이 움직였다.
광음검(光陰劍)
천중일검 목운평이 보여주었던 그 마지막 일검이 운호의 손 아래 재현됐다. 물론 그것은 대제사장과 파검의 싸움 앞에서는 여전히 날카로운 면도칼 수준의 공격에 불과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팽팽하게 이어지던 균형을 깨트리는 일격이었다.
운호의 일격은 미약했지만, 언제나 잔을 넘치게 하는 것은 한 방울의 물방울인 법이다.
-뿌드득
그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공간이 일그러지는 굉음? 이해할 수 없는 소음과 함께 운호의 몸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튕겨 나갔다.
-쾅!!쾅!!!!쾅!!!!!!!!
마치 물수제비뜨듯 튕겨 나가는 몸.
그 사이 백회와 용천은 꾸준히 닫혀, 마침내 세 번째 충돌에서 언제 열린 적이 있었냐는 듯 완벽하게 메워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지 기맥에 가득하던 진기 역시 사그라든다.
남은 것은 압도적인 통증뿐.
저 멀리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이 더욱 진해졌다.
이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 것은 빛의 기둥뿐이다.
=이십 년=
그리고 그 기둥으로부터 30장.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검 좌부원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쉽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육합전성? 혜광심어? 아니, 그 소리를 들은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런 무림의 기예와는 다르다. 이것은 그야말로 신선의 이능 그 자체다.
활짝 열려있던 하늘이 서서히 닫혔다.
소용돌이치던 내음도, 하늘을 따라 오르던 별빛도 어느새 종적을 감췄다.
그리하여 남은 것은 오직 상처 입은 인간들과 파괴된 마인들. 그리고 시체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