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천중일검(4)
-우웅
등 뒤편, 거대한 범종이 울리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려퍼졌다.
돌아보지 않았다.
“몸이 성한 이는 부상자를 업어라. 준비는?”
“네, 장인어른. 음식 재료를 날랐던 한상의 배가 아직 나루터에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아버지다. 초절정의 고수에게 일류가 수백, 수천이 덤빈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저 괴물에게는 절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말을 내뱉는 남궁강의 얼굴에 희미한 자괴감과 경멸이 감돌았다.
그는 초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에 상황을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자리의 누구보다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을 잘 알았다.
마지막 순간, 절정 고수들의 희생을 최대한 줄여가며 마인을 처단했다? 그것도 적의 수괴를 코 앞에 두고? 어불성설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검왕 남궁벽이라는 사람은 차라리 절정고수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내버려 둔 채, 가장 공헌이 큰 적의 수괴에게 바로 달려갈 사람이다.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겠지······.’
그의 시선이 사람들을 훑었다.
구대문파나 칠대세가라고 해도 절정의 고수가 무한정 넘쳐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절정 고수의 숫자가 많은 화산이라고 해도 팔십 남짓. 보통의 경우 오십도 채 되지 못한다. 이곳에 모인 삼백이라는 숫자는 구파와 칠대세가 전체 절정 고수 숫자의 삼 할에 달한다.
이들이 사라지면 문파에 따라서는 한 세대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급이야 문파의 장서고에 남아있겠지만 어디 무공이 비급만으로 익혀진다던가. 화산의 검종이 오태산 혈사로 맥이 끊겼을 때 죽어 나간 절정 고수의 숫자가 고작 삼십이다. 이들이 여기서 모조리 죽어 나간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무맥이 끊어질까?
그래서는 안된다.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한다.
남궁강의 시선이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격전을 벌이는 이들에게 향했다. 저 싸움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남궁강이 이를 악물었다.
“창궁대!! 아이가 없는 자, 장손이 아닌 자 가운데 지원자를 받겠다. 누가 나와 함께 남겠는가.”
“가······, 가주님!!”
“장인어른!!”
남궁강의 시선이 부상으로 쓰러진 아비에게 향했다.
참으로 합리적이며 현명하다. 하지만 옹졸하며 비겁하다. 개인으로 보자면 옳을지도 모른다. 아니, 문파로 봐도 마찬가지다. 초절정고수 하나가 얼마나 많은 것을 좌우하는가. 이곳에서 초절정고수를 잃은 문파들은 당분간 그 세력이 엄청나게 위축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도의 명문이란 때론 그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십 년, 백 년을 내다봤을 때 그것이 옳다.
백 년 전 화산이 그러했으며 지금의 화산이 그러하다. 또한 소림과 무당이 그러하며 모용 세가와 하북 팽가가 그러하다.
누군가가 생각하기에는 의미 없는 멍청한 희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파가 어찌하여 정파이며 명문이 어찌하여 명문인가. 이러한 순간의 결정이 쌓였을 때 그것이 명문 정파가 되는 법이다. 비록 초절정 고수는 아니지만 한 가문의 가주라는 이름 역시 가볍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혈도를 제압당해 끌려가는 자신의 아들에게 향했다. 얼음장 같던 얼굴이 한순간 풀어졌다. 남궁강은 자신의 아비를 닮지 않았다. 아비에게는 없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아비가 가진 많은 결점을 물려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일까? 남궁강은 남궁벽의 유일한 장점. 무인에게 가장 중요했던 무학의 재능 역시 물려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달랐다. 안휘성에 백년 내 처음 나온 사시장원(四試壯元)의 수재인 동시에 무공의 재능 역시 그에 못지않다. 고작 약관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절정을 넘본다.
여섯.
창궁대의 고수 가운데 여섯. 그리고 다른 문파 절정의 고수들 열하나가 자신의 목숨을 남궁 세가의 가주와 함께하겠노라 나섰다.
그리고 그 가운데 종남의 장문인 순양검 적하 진인이 있었다.
적하 진인이 검을 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남궁 가주, 자네는 훗날을 도모하게. 여기는 이 늙은이가 남겠네.”
“장문!! 안될 말씀입니다.”
“가주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네. 하지만 가주보다는 이 늙은이의 검이 더 낫지 않겠나? 물론 저 괴물 앞에선 별 의미가 없어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마교를 상대하는데 있어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본다면 내가 남는 것이 더 옳네. 가주도 잘 알지 않나.”
“······.”
“장인어른······.”
-쿠과광!!
초인들의 싸움이 이어졌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
남궁강이 다시 본래의 냉막한 얼굴을 되찾았다.
“알겠습니다. 부디 무운을······.”
본래 이번 회합을 위해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에서 모인 무인의 숫자는 총 삼백팔십팔 인. 그 가운데 절정의 숫자는 이백아흔일곱. 그리고 살아서 이곳을 떠난 이의 숫자는 백구십삼 인에 불과했다.
* * *
마교의 대제사장은 인정해야 했다.
개방의 비전인 항룡십팔장. 그 가운데 저 항룡유회의 초식은 이치를 넘어서지 못한 무공 가운데 발군이다. 물론 항룡유회의 초식은 그 준비가 매우 긴 만큼 어지간해서는 정타를 허용하지 않는 초식이다.
손에 가득한 강맹한 기운이 청허의 복부를 완전히 폭발시키다시피 했다. 이미 죽어 맥이 끊어진 그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이자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 그의 손을 잡아끌던 청허 진인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어이없이 공격을 허용할 일은 없었다.
“실로 괴물이로구나.”
칠공에서 피를 토하던 걸왕이 한탄했다. 청허진인이 목숨을 버렸고, 걸왕이 생명을 불태우며 내지른 일격을 막아내고도 마교의 수괴는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다.
“아니다. 타격이 있다.”
하지만 목운평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자의 심상에 새겨진 저 거대한 용화수(龍華樹)에 새겨진 또렷한 상흔을.
목운평의 몸이 표횰하게 움직였다.
부운약표(浮雲躍飄)
절정의 보신경이다. 그리고 그의 검이 -휘익 가볍게 움직였다. 그저 가벼운 견제처럼 느껴지는 일검이었다.
하지만 아니다. 대제사장은 목운평이 얼마나 무서운 검객이며 승부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 견제라고? 호흡을 고를 시간을 준다고?
그럴 리가.
가면인이 감히 그 공격을 경시하지 않았다. 그가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차피 힘의 차이는 크다. 잠시 흔들린 몸을 수습하면······.
목운평의 검이 대제사장의 몸을 따라 쭉 찔러왔다. 목운평의 보신경은 훌륭했지만, 상대는 그 이상이었다. 뒷걸음질임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를 상대하는 것은 목운평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나타난 청공 진인이 보랏빛 손바닥을 쭈욱 들이밀었다.
평생을 투덕거렸던 동문이 비참하게 사망했음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원을 터트리는 순간 이미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 각오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청우의 최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개죽음은 아니었으니까.
청공 진인의 비쩍 마른 주먹이 대제사장의 몸과 부딪혔다. 주먹을 타고 어마어마한 반탄력이 올라왔다.
청공 진인이 웃었다.
“그래, 운호 네 말이 옳다!! 타격이 있구나.”
지금까지 대제사장은 해석불가의 권능으로 그들의 공격을 상쇄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손 끝에 느껴지는 반탄력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정상적인 무공의 결과다. 홀로 다른 높이에서 그들을 농락하던 괴물이 마침내 같은 위치로 떨어졌다.
-후읍
청공 진인이 크게 호흡했다.
자하기공은 실로 신공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공부였다. 천하는 넓고 무공은 많았지만 젊은을 되찾아주는 무공은 흔치 않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자하기공은 으뜸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 본디 양이 있으면 음이 있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이다.
자하기공은 같은 수준의 진기 양일 때 위력 면에서 다른 신공에 비해 손색이 있다. 애당초 자하기공의 목표는 더 건강하고 젊은 몸으로 더 오래 수련하여 상대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공도, 청우도, 청허도 자하기공 팔단공에서 발전이 멈춘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취를 높이기 위해 이것저것을 건드렸고, 그 가운데는 자하기공의 가장 큰 약점인 ‘위력’을 보완하는 방법 역시 포함돼 있었다.
호천창월권(昊天創月拳)
연환식(連環式)
질이 부족하다면 양으로.
더 멋진 방법을 찾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청공이라는 부족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래, 그것은 청공이라는 비루한 무인이 지금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방법이다.
일격 일격을 취할 때마다 되돌아오는 반탄력이 청공진인의 몸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끊어지지 않는 연환식이 위력을 더해갔다. 처음에는 그저 주먹이 아렸지만, 그것은 이내 기맥을 뒤흔들고, 기혈을 상하게 했으며 그의 거죽을 찢고 속살을 파헤쳤다.
하지만 청공 진인은 피로 물든 양 주먹을 멈추지 않았다.
서른여덟 번째.
마침내 대제사장의 정신이 청공진인에게 향했다. 아미타는 위험한 존재였지만 그 화신의 몸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반면 저 늙은 도사의 공격은 지금의 자신에게 사뭇 위협적이다.
그리하여 서른아홉 번째.
청공 진인이 반쯤 부서진 자신의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그 자세는 가장 기본에 충실한 정권. 그가 처음 무공에 입문했을 때 배운 자세 그대로였다.
“훌륭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도(道)에 닿지 못했다.”
대제사장의 오른손이 그 주먹을 세로로 갈랐다.
찢어진 경맥과 부숴진 경혈. 이십대의 모습까지 젊어졌던 청공 진인은 여든이라는 나이에 걸맞은 모양새로 쓰러졌다. 말라비틀어진 늙은 고목처럼.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목운평의 검이 움직였다.
“아미타여!! 너무 뻔하구나!!”
상처투성이의 용화수였지만 한 번 정도는 무리 없이 힘을 끌어낼 수 있다. 중간중간 휘둘러지는 목운평의 자운검은 사뭇 위협적이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오직 마음만이 떠다니는 세계.
거대한 용화수 아래, 대제사장이 자신의 양손을 끌어모았다.
그리고 천중일검 목운평이 웃었다.
납매처럼 합리적이지 않았다.
매농처럼 효율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자운처럼 엄밀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상승의 경지이며 도(道)에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청우 진인이 배를 뜯겨 죽을 때도, 걸왕이 칠공에 피를 토할 때도, 청공이 자신의 생명을 불태울 때도 참았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하여.
천중일검 목운평은 나이 마흔에 황산의 마존을 참하여 자신이 천하를 논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광음검(光陰劍)
세월을 닮은 검이 대제사장의 마음에 부딪혔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운호의 몸에 깃들어있던 천중일검 목운평 그 자체였다.
-서걱.
하얀 손.
그리고 빨간 피.
무적과도 같았던 대제사장의 오른손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훌륭하구나. 그런 몸으로 이만한 공격이라니.”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가르지 못했다. 참하지 못했다. 그저 작은 상처뿐이었다. 마교의 대제사장은 여전히 오연하게 땅 위에 서 있었다.
태사조님?
전신에 느껴지는 막대한 통증.
지금까지 아무런 감각 없이 그저 바라만 보던 운호가 자신의 몸을 되찾았다. 증무진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대제사장이 손을 치켜들었다.
죽음?
“이제야 알겠다. 그런데 여전히 모르겠군.”
파검의 검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