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88화 (88/288)

88화

무한 혈사(7)

먼저 날아간 왼팔은 또 다시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평생 고련해온 화석 신공의 3할가량이 완전히 소실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경지가 갑자기 낮아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마치 높은 산을 오른 사람이 갑자기 그곳에서 사지 중 하나를 잃은 것과 같아서 산에 오른 사실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상실됐고, 그 경지 내에서도 무공의 수발이 이전과 같지 않을 뿐이다.

정말 큰 문제는 오른팔 쪽이었다.

이제는 뼈까지 풍화되어 사라진 그의 오른팔은 그의 내공이 완전히 소실된 것처럼, 마치 본래 그곳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팔 같은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마치 동상처럼 멈춰있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공했구나!!”

무신의 외침에는 자신의 팔을 잃었다는 상실이 아닌, 진정한 기쁨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파검 역시 그 감정에 응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파검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불괴(不壞)를 자랑하던 그의 검에 미세한 실금이 보였다.

베어내지 못했다.

파검이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먹을 듯 내뱉었다.

“이제······, 시작이죠.”

삼백의 고수를 옭아맨 고삐를 움켜쥐고 있던 괴물이 그 고삐를 팽개치고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쾅!! 쿵!! 콰아앙!!!!

무신의 몸이 여덟 장 튕겨 나갔다.

* * *

검왕 남궁벽이 화색이 되어 소리쳤다.

“여기다!!”

독공을 쓰는 마인은 어려운 상대였다. 하지만 그런 마인을 상대로 거의 승기를 다 잡아가고 있었건만, 가면인의 일격에 검강이 깨지는 바람에 그 승기는 완전히 날아갔다.

아니 단순히 승기만 날아간 정도가 아니었다. 완성된 검강이 깨어지는 순간 그의 기혈에 상당한 무리가 왔다.

이후로는 수세의 연속.

그런 와중에 절정 고수들이 풀려났으니 그 어찌 반갑지 않을까.

남궁벽의 아들.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남궁혜의 아비인 남궁강이 냉정하게 소리쳤다.

“독공과 유가밀공의 고수다. 숫자로 밀어붙이면 피해가 막대한 상대다. 청우진인과 청공진인 쪽이 우선이다.”

남궁벽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놈이 감히? 지 애비를 놔두고?

사실 남궁벽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절정고수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청우와 청공 쪽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앞에 선 절정고수가 화산의 외당주인 굉명진인이었던 탓이다. 그는 화산파 내부의 알력 다툼에서 상당히 먼 사람이었다. 천성이 둔하고 명리에 밝지 못하다. 누군가를 이끄는 데는 애당초 재주가 없는 위인이다.

하지만 화산의 무공은 오묘한 구석이 있다. 가장 똑똑한 이에게만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굉명진인은 조금 부족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이치를 따지지 않고 그저 일러주는 그대로 무공에 집중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

삼백의 절정 고수 가운데 단연 으뜸은 굉명이었다.

-쾅!!

청우, 청공과는 다른.

하지만 마찬가지로 똑같은 자하기공에서 시작된 염천주작퇴(炎天朱雀腿)가 마인의 하박을 강타했다.

물론 순수한 그의 능력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두 명의 초절정 고수가 만들어준 틈을 탄 일격이다. 신경질적으로 휘저은 마인의 손을 한 차례 막아내고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고작 한 번의 공방이었지만 이미 그의 몸은 최소한 반각은 운기해야 할만큼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비슷한 수준의 고수끼리 싸움에 이런 식의 한 수 한 수가 보태지는 것은 매우 크다. 물론 모든 절정고수들이 굉명처럼 성공적으로 공격을 집어넣고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뻐억!!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마인의 손에 곤륜파 고수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터져나갔다.

참혹하다.

하지만 그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모인 절정의 고수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들이 보기에 비록 어려운 싸움이기는 했지만, 이 싸움의 끝은 결국 승리로 귀결될 것이 분명했다. 승리할 싸움에서 동료의 희생은 분노를 일으키는 요소이지 공포를 일으키는 요소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무당파의 태극도인 일곱이 펼쳐낸 천강북두진(天罡北斗陣)이 걸왕이 상대하던 마인을 잠시 잡아뒀다. 물론 그 댓가는 참혹했다. 태극도인 일곱이 모조리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

걸왕 소진평이 호흡을 골랐다.

개방 비전의 무공인 항룡십팔장 가운데 최강의 일초인 항룡유회는 전신의 내력을 한 번에 뿜어내는 무서운 초식이다. 하지만 초식이 실로 정직하고 그 발동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상대방을 꼼짝 못 하게 잡아두고야 사용 가능한 몹시 비실용적인 초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제약들이 있는 만큼 그 위력은 그야말로 발군.

강호 최강을 다투는 걸왕 소진평의 삼갑자 내공이 그 일격에 담겼다.

항룡십팔장(亢龍十八掌)

항룡유회(亢龍有悔)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한 힘의 압축.

걸왕 소진평의 손끝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마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창끝으로 둥그런 기운이 모여들었다.

강환(罡環)

초절정을 증명하는 파괴의 결정체다.

걸왕 소진평의 항룡유회와 마인의 강환이 부딪혔다.

하지만 굉음 따윈 없었다.

그저 항룡유회가 지나간 그 자리가 마치 본래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삭제됐을 뿐이다. 그렇게 한 자루 묵빛 창을 귀신처럼 다루던 마인의 상체가 자신의 창과 함께 온전하게 삭제됐다.

-허억허억

늙은 걸왕이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벌어진 입에서 싯누런 침이 뚝뚝 떨어졌다. 이토록 전신이 후달리는 것도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않았다.

오른손이 박살난 벽산 진인과 왼팔이 뜯겨나간 공조 대사 쪽 상황은 더 좋지 못했다. 마인이 휘두르는 채찍이 유려하게 움직이는 곤륜파 절정고수의 다리를 ‘폭발’시켰다.

-쾅!!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한번 허공에서 몸을 띄워 무려 여덟 번을 움직일 수 있다는 강호 최고의 경신법을 익힌 곤륜의 무인이었지만 일순간 소리보다 빠르게 날아오는 마인의 채찍을 피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후읍

하지만 덕분에 양검(兩劍)에서 독검(獨劒)이 돼버린 벽산 진인은 한차례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근경(易筋經)을 완성하여 금강불괴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무색하게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있던 공조 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거 오늘 영 운수가 좋지 못하군요. 원시천존. 원시천존.”

“아미타불······. 저 가면인의 무공이 실로 괴이하군요. 소승의 무공은 이미 깨져버렸습니다. 단순히 팔이 부서진 것이 아니라 내공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혈도를 봉쇄했지만 요악한 기운이 태극기공을 갉아먹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승려와 도사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사이 또 하나의 무인이 피를 토하며 나가 떨어졌다.

“형님, 일단 물러나세요.”

남궁철이 답하는 대신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실없는 소리나 늘어놓던 남궁철이었지만 그런 그도 동생의 죽음 앞에서만큼은 이전과 같은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꼬맹아 너나 당장 도망쳐라!!

운호의 머릿속에 증무진인의 의지가 울려 퍼졌다. 마인의 채찍이 또 하나의 절정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머리통이 터지고 붉은 핏물과 회백질이 허공에 흩날렸다.

그리고 그 죽음으로 벽산 진인과 공조 대사가 또 한 걸음 마인에게 다가갔다.

“동생, 이 아이는 말일세 무가에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네. 검보다 바늘을 좋아했고 강호를 떠도는 여협 대신 멋진 도령을 만나 은애하며 서로를 닮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훌륭하게 기르고 그렇게······, 그렇게 늙어가는 삶을 꿈꿨다네. 나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네. 가문은 튼튼하니 동생 하나 정도는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내버려 두는 것도 진정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네.”

“형님······.”

남궁철이 자신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산산이 조각나 뒤섞인 시체들 사이. 그의 동생 남궁혜의 것이 분명하다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무명지 하나뿐이었다.

“어리석었네. 내가 사는 세상은, 아니 우리가 밟고 선 이 세상은 이토록 칼과 피로 가득한 수라도였거늘 어찌 나는 그런 세상에서 그저 길쌈을 하고 수를 놓고 짝을 만나 살아가는 인생을 응원하였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네. 나는 동생에게 바늘 대신 검을 들라 독려했어야 했네. 진정 그러해야만 했네. 만약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형님!!!”

운호의 양손이 남궁철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정신 차리십쇼. 형님. 바늘 대신 검을 들었다면 대체 무엇이 달라졌단 말입니까. 이건 그저 재앙입니다. 보통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재앙. 남궁 소저는 그런 재앙에 휘말린 것뿐입니다.”

“하지만······.”

“형님과 남궁소저, 그리고 저의 차이는 단지 누가 운이 더 좋았냐. 혹은 더 좋지 않았냐. 그 뿐입니다. 만약 이곳에 선 사람이 남궁소저였다면. 형님은 남궁소저가 무의미하게 저 괴물에게 달려들기를 원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운호가 선언했다.

“그러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뭐라고?”

남궁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자리는 오직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끼어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마도 그 자격을 갖춘 것 같군요.”

-백운호!!!

운호의 검극이 무형의 기운으로 일렁거렸다.

“저······, 절정?”

* * *

여덟의 절정 무인이 죽거나 죽음에 가까워졌다. 그 여덟 중에는 소림, 그리고 무당의 소중한 제자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벽산 진인과 공조 대사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들은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들과 함께 수저를 들던 소중한 제자, 형제들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채찍을 휘두르는 마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태산북두라고 했다.

아주 오랜시간 그 단어는 오직 소림과 무당에게만 허락된 단어였다.

오른손을 잃어버린 양검과 왼팔을 잃어버린 대력이 나란히 섰다.

무당의 태극과 소림의 금강이 어우러졌다.

오랜 시간 무림의 태산북두를 놓고 경쟁했기에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경쟁자의 합공이었다.

물론 그것은 양의심공을 발휘하는 온전한 양검 하나만 못했다.

그렇기에 마인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채찍이 날아들었다.

방향은 검을 휘두르는 태극의 검사의 비어있는 오른편.

무당의 태극검은 완전에 가깝지만 평생동안 쌍검으로 각각 태극검을 펼치던 양검의 태극검은 완전하지 못했다.

파괴된 금강불괴가 몸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온전하던 오른팔이 반파됐다.

근육이 찢어지고 허연 뼈가 드러났다. 그 보호 아래 망가진 태극검이 본래의 기세 그대로 마인을 향하여 곧게 나아갔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

장포 아래 숨겨져 있던 마인의 오른발이 벽산 진인의 하복부로 날아들었다. 하루 이틀 연마했다고 믿기 힘든 날카로운 각법. 마인이 근접전을 대비하여 숨겨둔 비장의 한 수였다.

그의 오른발이 벽산 진인의 검보다 조금 빠르게 진인의 기해혈을 꿰뚫었다.

-뿌득!!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벽산진인을 뒤로하고 외팔의 노승이 움직였다. 왼팔은 이미 사라졌으며 오른팔 역시 반파된 상황.

마인의 시선이 그의 다리를 향했다. 대웅전의 대들보만큼이나 굵고 단단한 다리다. 이것만 피해내면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천무십칠성에 이름을 올린 고수 둘을 그가 해치운 것이 된다.

하지만

-뻐억!!

마인의 머리가 흔들렸다. 대체 무슨 일일까?

흔들리는 마인의 얼굴을 따라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의 머리에서 나온 핏물이 아니었다.

오른손.

반파돼있던 공조 대사의 오른손이었다.

피로 물든 공조 대사가 웃었다.

그래, 모용세가가 하는 것을 소림이 못해서야 어찌 소림을 무림의 태산북두라 할 수 있을까.

공조 대사의 공격이 쉴새 없이 마인의 몸을 두들겼다. 몸을 두들기는 대사의 몸이, 그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는 마인의 몸이 무너져갔다.

그 뜨거운 투혼에 사람들이 감탄했다.

그리고

-이 멍청한 자식!!

그렇게 감탄하는 사람들보다 두 걸음 빠르게 운호가 달려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