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무한(1)
“뭐라고? 본산에 남을 생각이 없다고? 너 제정신이야? 어차피 물려받을 집안도 없다며. 그러면 당연히 본산에 남는 걸 목표로 해야하는 거 아니야? 욕심이 없는 거야? 아니면 멍청한 거야?”
장호가 열변을 토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이제 화산에 들어온 지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본산에 제자로 남는 것을 포기하는 녀석이 있다니.
백수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빨리 직시하는 거야. 허무맹랑한 목표를 갖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삼 년을 허비할 수는 없잖아? 차라리 속가로 돌아갈 것을 대비해서 최대한 필요한 것들을 습득하는 게 현명하지 않겠어?”
“허무맹랑이라니. 백팔십 명 중에서 삼십 명이니까 넌 그냥 여섯 명만 이기면 되는 거잖아.”
“그건 대체 어느 나라 식 산술법이야? 백팔십 명 중에서 삼십 등을 하려면 백오십 명을 이겨야지.”
“어느 나라 식 산술법이기는. 용기를 주는 나라 식 산술 법이다. 너 같이 부정적인 생각만 하면 나도 여기 못 남겠다.”
“워워, 그건 아니지. 넌 누가 봐도 백팔십 중에서 일 등인데.”
장호가 주변을 한 번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후,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해주려고 했는데. 네가 워낙에 한심한 소리를 해서 특별히 말해주는 거다.”
“뭔데 갑자기 이렇게 무게를 잡고 그래?”
“우리 지난 기수의 사형들 있잖아.”
“어.”
“거의 마지막까지 꼴찌를 하던 사형이 본산 입산 직전에 삼 년 내내 가장 강력하던 사형을 이겼다고 하더라. 심지어 그 사형은 본산에 입산하기 전에는 무공도 익힌 적이 없었대.”
“에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당장 백수한 자신만 하더라도 무공을 익힌 지 벌써 햇수로 오 년이다. 헌데 이것도 늦다. 여기 있는 아이 가운데는 서너 살에 무공에 입문한 녀석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을 고작 삼 년 만에 따라잡는다고?
“이거 우리 형이 해준 이야기야. 세상에는 그런 터무니 없는 사람도 있으니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쓸데 없는 짓 하지 말고 삼 년 동안 무공에만 전념하라고.”
“네 형이라면······, 장광 사형?”
“그래, 무공도 익히지 않았던 사람이 전체 일 등을 하는데, 너라고 삼십 등을 못하겠냐?”
장호의 이야기에 백수한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누굴까?
지난 한 달. 함께 밥을 먹고 무공을 지도했던 삼대 제자들을 떠올렸다.
“백운호 사형!!”
“응?”
“검술 총론 수업에서 그랬잖아. 기공보다는 검술이 성취가 빠르다고. 그리고 내가 알기로 화산 속가 가운데 이름난 백가는 우리 하현장 밖에 없어.”
그래, 소신검이라면 삼대 제자 가운데 최강이라고 할 만하다.
백수한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또 한 번 확신했다. 역시 검술이다. 장호의 말대로라면 그가 무공을 수련한 기간은 고작 육 년에 불과했다. 육 년 뒤 그만한 성취를 얻지 못해도 괜찮다. 십 년, 혹은 십오 년. 아니 길게 잡아 이십 년. 그때라도 지금 백운호만한 성취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강호의 모든 무인이 절정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못한 무인이 더 많다. 그렇기에 지금 백운호 정도의 무위라면 수한의 고향에서 방귀 꽤나 뀌고 사는 것은 일도 아니다.
백수한이 장호를 바라봤다.
그래, 화산의 본산에 남아 전 중원에 이름을 날리는 것은 이런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자리가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송충이가 날개를 편 나비를 선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 * *
운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저 녀석······.’
그리고 그때마다 항상 백수한이 눈에 밟혔다.
참으로 부족했다. 열심히 하지 않는가를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분명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 마치 최선을 다하여 조식과 행공에 임했지만 다른 아이들을 조금도 따라가지 못했던 백운호 자신처럼 말이다.
반면 저 장호라는 아이는 달랐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같았지만 그 성취의 속도가 다르다. 수한과는 다른 의미에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어쩌면 사숙, 사백님들이 이준형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것과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운호는 두 아이를 가르침에 차별이 없도록 노력했다. 그것은 과거, 그가 힘들던 시절 가장 바라던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어차피 다른 검술의 수련은 늘상 하던 일이다. 주마간산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이야기는 그저 지금처럼 꾸준히 초식 하나하나의 숙련도를 높여 모든 초식이 설중개화와 같아지도록 노력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렇기에 운호가 가장 집중한 것은 광음검의 수련이었다. 만약 이것이 증무진인의 의도가 숨어있는 검술이 아닌, 진짜 단순한 예식용 검술이라면 어쩌면 이것은 멍청한 시간 낭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중일검 증무진인이라는 고금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천하제일인이었던 사람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그렇게 운호가 수련에 열중하고, 화산이 새로운 삼대 제자들의 육성으로 바쁜 동안, 무림의 정세 역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무한.
정확히 말하자면 무창부와 한양부를 아우르는 이 거대 도시 권역은 인구수만 무려 사백만에 달한다. 섬서성 전체의 인구가 천이백만임을 감안하면 그 규모의 거대함을 실감할 수 있다.
실제로 인구밀도만 따지자면 제국의 수도인 북경의 2배에 달했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무한 인근의 넓은 평야에서 나오는 막대한 생산력. 그리고 동정호와 파양호를 아우르는 장강 경제권 물류의 중심지라는 이점 때문이었다.
그 막대한 이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에 위치한 문파는 전무했다. 단순히 대문파간의 알력 때문일까?
그럴 리가.
무한은 북직례, 남직례와 더불어 제국에서 직할하는 대표적인 도시다. 북경과 함께 황실의 대표적인 무력 단체인 동창에서 가장 신경 써서 관리하는 곳으로 기본적으로 면허를 소지하지 않은 무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또한 이곳에서 이뤄지는 상업은 과거 급제자와 도관, 불사에 주어지는 면세 혜택에서도 제외된다.
강호의 어떤 세력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
그런 특수성이 있기에 구대문파와 칠대세가는 이곳을 이번 회합의 개최지로 낙점했다.
“굉허야, 이번 회합은 한시적인 단체의 설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네, 사부님.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최근 강호의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화산에서는 조금 강한 패를 내밀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 삼대 제자를 키우는 기간이라 인력이 조금 빡빡하여 제자가 고민이 많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최선은 설매각주를 파견보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설매각주 굉원자 진무옥이라면 일대 제자 가운데는 외당주 굉명과 함께 수위를 다투는 절정의 고수다.
청허자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사부가 약간의 도움을 주고자 하는데 어떠냐?”
“도움 말씀이십니까? 설마 사부님께서 직접?”
청허자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나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이 사부는 전대의 장문인이라는 쓸데없이 무거운 직책이 있지 않더냐. 아무리 초유의 사태라고 해도 내가 나서는 것은 다른 문파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된다.”
“그렇다면?”
“청우 사형과 청공 사형은 어떠하냐.”
“두 분 사백님이요? 확실히, 청무 사백님이 나서는 것보다는 모양새도 좋고, 두분 사백님이 함께면 어지간한 천무십칠성에게도 부족함이 없긴 합니다만······. 그 두 분께서 과연 나서 주실까요?”
늙은 제자의 질문에 젊은 사부가 웃었다.
굉허자는 사부의 저 웃음이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화의 흐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다.
사부는 본인은 속을 잘 숨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당연한 일이다. 사부가 장문인으로 있던 당시, 화산의 성세는 명실상부 강호 최강이었다. 황실에서조차 큰소리를 치던 시절이다. 다른 이들이 눈치를 보면 봤지, 사부가 누군가의 눈치를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자면 굉허자 자신은 얼마나 쥐새끼 같은지.
“최근 그 두 분이 흥미를 갖는 아이가 있어서 말이다. 그 아이와 함께 내보낸다면 아마 기꺼이 나설 것이다.”
“흥미를 갖는 아이요? 설마?”
“그래, 그 검종의 아이다.”
사부의 득의양양한 미소에 굉허자가 직감했다.
사부는 여전히 화산에 눈과 귀가 있구나.
최근 새롭게 들어온 삼대 제자들 사이에 떠도는 바람에 대하여 굉허자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상당수, 특히 자질이 부족한 아이들 대부분이 검술에 매진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노력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향하여 똑바로 이야기하던 어린 제자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선심후수도 검술일성도 결국 모두 화산입니다. 그리고 오래전 선사들께서 화산에 두 가지의 길을 남긴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화가 가장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시기는 춘추전국시대입니다. 어쩌면 선사들께서 화산에 두 가지의 길을 남기셨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요?
그 제자는 검술일성 역시 화산의 선현들이 남긴 길이며 그것은 말살의 대상이 아닌 정당하게 경쟁하여 서로 간의 발전을 도모해야 할 길이라고 이야기했다.
굉허자 개인의 감정으로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종남이라는 고루한 거인이 변했으며, 이제 그대로 짓눌려 사멸할 것 같았던 마교가 비장의 칼날을 갈고 재등장했다.
강호가 급변하고 있었다.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그 길이야말로 이 급변하는 무림에서 화산이 도태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방치했다. 하지만 사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그 아이가 익힌 심법은 포원공이라고 하더구나. 포원공의 경우 삼단공에 이를 때까지 화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니 이런 일에 파견하기 딱 좋은 인재 아니더냐. 무엇보다 최근 화산의 이름을 가장 크게 높이고 있는 인재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 청우, 청공 사백과 함께 강호에 나간다면 그 두 이름에 묻혀 더 이상 크게 이름을 떨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는 여러 가지로 운이 따랐지만, 현재 강호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고작 약관도 되지 못한 아이가 이름을 떨치기에 너무 큰 일이니까.
굉허자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부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저야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허허, 감사는 무슨. 늙은 사부가 도움이 됐다니 그저 기쁘구나.”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얻어낸 청허자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늙은 제자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래, 이 늙은이도 노력이라는 것을 한번 해보마.’
* * *
“네? 무한을요? 하지만 사부님께서 빠지시면 검술총론 수업을 진행할만한 사백이나 사숙이 없지 않습니까.”
최근 들어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견제라니. 검술일성과 선심후수의 공존과 경쟁을 이해한 것 같았던 장문인의 그 표정은 거짓이었다는 뜻일까?
운호의 질문에 공야찬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누가 내가 함께 간다고 하더냐. 너만이다.”
“네?”
검술일성의 일맥을 전수하는 것은 아직 백운호가 아니다.
뿌리는 화산에서. 그리고 그 꽃은 화려함을 뽐낼 수 있는 무림에서.
종남에서 화산으로 돌아온 지 두 달.
운호의 강호행이 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