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검술총론(10)
“하하하, 기다리게. 내 전력을 다하여 보여줄 터이니.”
제왕의 진기가 욱신거리는 혈맥을 타고 순환했다. 이래서야 적어도 하루 이틀. 꼼짝없이 요양해야 할 성싶다. 하지만 형님으로서 고작 그 정도쯤이야.
만인을 압도하는 제왕의 기세가 남궁철에게서 피어났다. 그리고 그 기세가 오롯하게 백운호에게 집중됐다.
단순한 기세가 아니다. 무형의 기운은 유의미한 형태로 운호의 자율신경계를 자극했다. 인간의 신체는 그 의지만으로 조절 가능한 것이 아니다.
불수의근(不隨意筋).
그것을 조절하는 것은 자율신경계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길항작용이다.
제왕검형의 압도적인 기세가 운호의 교감신경계를 자극했다. 과도한 긴장. 동공이 확대되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위와 장의 운동이 억제되고 간과 쓸개에서 당장 사용할 당을 활발하게 분해하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그 작용들은 빠르게 임계점을 넘어섰다.
과도한 긴장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운호가 천천히 검을 뻗었다.
돈오점수(頓悟漸修)라.
본래 깨달음은 벼락처럼 찾아오지만, 그 깨달음을 몸에 익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래,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그저 깨달은 것만으로 그것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
누군가는 천 번을 반복해야 하는 일을 단번에 해내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천재’라고 칭한다.
납매검 제 일 초식
설중개화(雪中開花)
거창한 초식명과 달리, 설중개화의 일초식은 대부분 기본 검술의 그것이 그러하듯 아주 곧은 세로 베기였다.
그렇게 운호의 검이 그저 세로로.
부
우
웅
단 한 번 그어졌다.
그 세로베기에는 세상을 할퀴는 검기 따위는 서려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처음 검을 잡았을 때 배우는 아주 기초적인 세로베기였다.
하지만 그것은 열 살에 검을 잡아 햇수로 칠 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휘두른 일검이자 이제 운호에게 가장 익숙하며, 어쩌면 태어나 지금까지 운호가 행했던 모든 단일 동작 가운데 가장 많았을 그런 동작이었다.
남궁철이 그런 운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주변 모든 이들은 남궁철을 ‘천재’라고 부른다. 안휘성의 인구는 대략 천육백만. 그 가운데 향시를 통과하는 이는 삼 년에 약 삼백. 남궁철은 그 과정까지 모든 과거를 장원으로 급제한 인물이었다. 최근 백 년 이내 안휘성에 그런 인물은 남궁철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남궁세가에서, 아니 안휘성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장 향시에 합격한 거인(擧人)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벼슬자리는 가능한 위치였다. 물론 남궁세가의 장자라는 입장이니 벼슬 자리에 나갈 일 없이 거인이 주는 면세 혜택만을 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무려 사시장원(四試壯元)이다. 가문에서는 그에게 은근히 회시의 응시를 권하고 있었다. 굳이 벼슬은 하지 않아도 괜찮다. 만약 회시와 전시까지 장원을 한다면 육시장원(六.試壯元). 과거 제도가 생긴 이래 최초다. 그야말로 가문의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재가 아니었다.
물론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주변의 또래들보다는 훨씬 명석할 것이다. 만약 진짜 천재를 보지 못했더라면, 그는 자신을 천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굳이 따지자면 수재 가운데 최고 수준 정도 될 것이다.
하지만 가문에서 평탄하게 다져둔 길 위에서 최고의 스승 아래, 네 살부터 오직 무공과 학문만을 익혔던 자신의 성취를 열 살에 처음 학문을 접한 녀석이 고작 오 년 만에 따라잡는 모습을 보았다.
향시 장원?
우습다.
자신의 가문이 남궁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남궁의 장자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곳이 남궁세가의 이름이 관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안휘성이 아니었다면 과연 향시 장원이 자신에게 돌아왔을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남궁철은 학문의 길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또 한 번 경험했다.
참으로 재밌는 일이었다.
만약 남궁철의 재능이 아예 부족했더라면, 그는 지금 운호의 그 내려치기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천재는 아니었으되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영역에 선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운호의 그 일격이 자신의 제왕검형이 주는 영향력을 완벽하게 벗어났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한계를 벗어나는 내공.
몸의 말단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특수한 기공.
혹은 인간의 한계선에 도달하는 절정의 경지.
그가 알고 있는 제왕검형의 효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들이다.
물론 저런 방법들도 제왕검형을 익힌 이가 다시 절정에 오른다면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한 남궁철의 제왕검형은 저런 방법들로 벗어날 수 있다.
“설마······.”
절정?
고작 열여섯에?
남궁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소림 역사상 최강의 고수인 혜가가 다시 살아온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눈을 반개한 채로 고요하게 내려친 자세 그대로 검을 쥔 채 잠시 서 있던 운호가 납검했다.
“감사합니다.”
남궁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감사 인사는 됐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나 좀 자세히 해보게. 내가 어지간한 일이라면 다 꿰뚫어 보는 천재적인 혜안을 지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이번 일은 도무지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군.”
이 와중에도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남궁철의 모습에 운호가 피식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본래 그리 장난기가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이 인간이 한 번 숙이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이 부족한 동생이 어찌 천재적인 형님께 설명이라는 걸 할 수 있겠습니까. 똑똑한 동생이 조금 우둔하고 부족한 형님께 설명을 드리는 거라면 몰라도 말이죠.”
남궁철의 이마가 씰룩였다.
격렬한 내적 갈등이었다. 궁금하다. 궁금해 미칠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 우둔하고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다니. 도저히 고를 수 없는 선택지다.
차라리 운호가 자신을 뛰어넘는 천재임을 깨닫기 전이라면 또 몰랐다. 잘난 놈이 겸손하게 못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못난 놈이 잘난 놈 앞에서 내가 너 보다 못났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 운호에게 스스로를 우형이라고 칭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다.
남궁철의 이마에서 진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조금 전 비무를 할 때도 나지 않았던 굵은 땀방울이었다.
“동생, 그, 그래도 방금 그거 이 형님의 도움 덕분 아니었나. 성취를 얻었으니 나의 사소한 궁금증 정도는 풀어주는 것이 어떠한가.”
“으음, 분명 그 도움은 제가 어떤 분을 형님으로 맞이하는 조건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걸 취소라도 해야 하는 걸까요?”
남궁철의 미간이 한층 더 좁혀졌다.
호형호제를 철회하느냐, 아니면 스스로를 우둔하고 부족하다고 칭하느냐. 그야말로 양쪽 모두 꽉 막힌 갈림길이다. 그렇다고 그대로 궁금한 채 넘어간다는 왔던 길을 돌아가는 선택을 할 수도 없다.
제법 긴 고민.
마침내 남궁철이 마치 불구대천의 생사 대적이라도 만난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현제, 부디 이 우형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를 설명 좀 해주게나.”
고민은 길었지만 질문은 짧았다.
그 질문에 운호가 피식 웃었다. 확실히 기인은 기인이다. 아니, 대체 이게 뭐라고 저토록 진지하게 고민을 한단 말인가.
“웃지 말고 얼른 이야기해보게. 설마 절정의 단초를 잡은 것인가?”
운호가 두 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멈춰서서 잠시 고민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 역시 절정의 단초이기는 단초이기 때문이다.
“아,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시원하게 말 좀 해보게나.”
“애매합니다.”
“애매해? 그게 무슨 뜻인가? 애매하다니?”
“이 길이 절정으로 가는 길임은 확실한 듯하지만, 형님의 질문은 그런 뜻이 아닌, 제가 절정의 경계에 발을 디뎠느냐 아니냐잖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저는 여전히 형님보다 훨씬 아래에 있습니다. 다만······.”
“다만?”
“납매검의 제일초식인 설중개화의 초식에 한정해서는 온전하게 저를 통제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온전하게 자신을 통제한다고?”
남궁철이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것은 운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운호의 말이 놀랍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작 열아홉의 나이에 절정을 코앞에 둔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운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절정의 무인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자체로 완성된 하나의 무인이다. 물론 그 완성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문파, 가문마다 각자의 주장과 이론이 다양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온전하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무인의 완성으로 꼽는 곳 역시 존재한다.
즉, 지금 운호의 이야기는 자신이 저 ‘설중개화’의 초식을 사용하는 순간만큼은 절정 고수의 경계에 포함된다는 이야기였다.
남궁철의 경악한 표정에서 운호가 그의 생각을 추측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닙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여전히 형님보다 아래에 있다고요. 게다가 온전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절정 고수의 조건이라니.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저기 살수 계통의 무공을 대성해서 심장의 움직임까지 조절하는 살수들은 모두 절정 고수게요? 그냥 이 길도 절정으로 가는 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 아닙니다. 이건 그냥 제 망상이라서 말씀드리기가 부끄럽네요.”
운호가 생각했다.
이제는 공야찬에게서 느껴지는 그 ‘특별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 운호가 펼치는 설중개화의 초식과 같은 것이다. 두뇌가 아닌 육체에 새겨진 기억이다. 설중개화를 펼치는 순간, 운호의 몸은 새겨진 최상의 움직임을 재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야찬의 모든 동작이 그러한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니다. 분명 공야찬 역시 모든 동작에서 그런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또한, 화산파에서 이야기하는 절정의 조건은 ‘소우주의 완성’이다.
하지만 운호의 본능은 이것을 완성 시키는 것으로도 ‘절정’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화산이 틀린 것일까?
그럴 리가.
절정은 말하자면 산의 봉우리다. 그리고 그 봉우리에 이르는 길은 실로 다양하다. 그것은 합리성을 극한까지 추구하여 초식의 완성을 볼 때도 가능할 것이고, 역설적인 효율을 체득하여 검리를 완성할 때도 가능할 것이며, 검을 이해하는 길로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화산의 검술은 실로 기이하다.
이것은 절정을 향해 질주하지 않는다. 그저 수없이 많은 절정에 이르는 길을 그저 ‘보여 줄’ 뿐이다.
화산에는 팔대 검술이 존재한다.
그리고 운호의 추측이 맞다면 그것은 모두 증무 진인의 손이 닿아있다. 그렇다면 과연 증무 진인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그저 확실한 것은 그것은 ‘고작’ 절정이라는 인간의 끝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