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서안행(1)
“당장 처벌해야 합니다!!”
접객당주 굉진자 이진섭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바로 어제, 약당 당주의 말이 떠올랐다.
‘상처가 너무 큽니다. 회복까지는 적어도 육 개월. 설사 회복한다고 해도 이전과 똑같기는 힘들 겁니다.’
결혼하지 않아 후계가 없는 그에게 조카손자 가운데 가장 영특한 이준형은 진짜 손자나 다름없었다. 그런 아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생겼다.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당한 비무 아니었습니까. 비무 중에 다치는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그 아이가 독수를 썼다고 볼 수도 없었고요.”
“맞습니다. 이제 고작 열세 살짜리 아이입니다. 그렇게 상처 입은 팔로 공격이 들어올 것을 미리 예상했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지요.”
하지만 다른 장로들이 그의 의견에 반대를 하고 나섰다.
이진섭의 눈가가 꿈틀댔다. 원리원칙? 웃기지도 않는다. 저들은 항상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고고한 척하는 재수 없는 놈들이다. 정작 자신들도 지금 자기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똑같게 행동할 것이 분명한 주제에 말이다.
그의 시선이 외당 당주 굉명에게 향했다. 외당은 그 특성상 재무각에 항상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곳이다.
“크흠, 물론 다 맞는 말씀들입니다만, 그래도 그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그, 그래!! 그 과실치사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의도가 없었더라도 결과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전례라는 것도 항상 중요한 것이, 이런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다른 아이들도 모두 이래도 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외당주, 말 한번 잘했습니다. 맞습니다. 애당초 비무라는 게 뭡니까. 그런 것을 각오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비무에서 상대를 다치게 한다고 처벌을 한다? 그러면 이후 비무에 임하는 아이들의 자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엇보다 백운 태사조님께서 지금의 제도를 만드신 이후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비무에서 다쳤다고 하여 처벌을 했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전례가 없던 일을, 문파 고위직의 친척이 다쳤다고 하여 처벌한다? 대체 강호의 동도들이 우리 화산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진섭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재무 각주님. 그쯤 하시지요. 속이 상한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전통을 어길 수는 없지요. 준형이 그 아이는 약당 당주님께 제가 특별히 부탁을 해둘 터이니 이번 일은 이렇게 넘어가도록 합시다.”
화산 장문 굉허가 이진섭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실상 이진섭의 가장 강력한 편이라고 볼 수 있는 장문인이 등을 돌렸다. 이건 이제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진섭이 고개를 떨궜다.
“분위기도 너무 과열된 것 같은데 잠깐 쉬었다가 갈까요? 아, 그리고 재무각주님은 잠깐 저 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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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합니까?”
“아닙니다.”
“아니기는요. 당연히 서운하겠죠. 혈육이 그런 꼴을 당했는데 어떻게 아니 그러겠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장문인이 주변을 한번 살핀 후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사백님들과 사부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네? 사백님들께서요?”
“알다시피 그분들은 몰락했던 화산이 재건되는 과정을 지켜보셨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화산의 전통을 확립시킨 분들입니다. 아무리 제가 장문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것을 깨트릴 수는 없는 노릇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진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산에 사는 네 명의 사백들. 화산 그 자체나 다름없는 그들의 개입이라면······.
장문인이 온화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비무에서 사고가 조금 있었다고 처벌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헌데 말입니다. 찬이 녀석 소속이 아마도 각주님과 친한 외당 당주님 소속 아니었던가요?”
이진섭이 장문인의 말을 이해했다.
* * *
“이제 드디어 걸음마를 뗐군,”
몽원경.
증무 태사조님이 모처럼 칭찬했다. 보통 사람의 기준으로는 비아냥일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증무 태사조님의 언행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건 그분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네 녀석의 경험 대부분이 나로 한정된 만큼 아직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헌데 태사조님의 무공이라면 조금 더 다양한 형태로 저에게 경험을 주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욕심부리기는. 그래, 물론 나는 만능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몽원경은 만능이 아니로구나. 지금 이것도 네가 조금 성장해준 덕분에 간신히 약간의 여유가 생긴 거니까. 하여간에 성격은 더러워서······.”
“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태사조님이 말을 아꼈다.
답답했다. 태사조님은 기본적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적었지만, 이렇게 가끔 대화를 나눌 때도 중요한 부분에서 꼭 말을 멈추곤 하셨다.
약간의 위화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말씀을 안하시는 게 아니라, 못하시는 게 아닐까?
“어찌됐건 지금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어차피 네 내공이야 당분간은 영약으로 높아진 그것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해야 할터이니 크게 진전을 보긴 힘들 것이다. 반면 검술은 다르다. 물론 네 환경을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많은 대련을 경험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태사조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나의 선물은 대체 언제 뜯어 볼 생각이더냐. 네 나이도 이제 열셋.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만큼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어릴 때 사용하는 쪽이 효과가 더 크다.”
“그게 보통 삼대 제자들은 문외로 나갈 기회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지라. 게다가 이제 다음 기수의 제자들도 들어오게 되면 해야 할 일들도 제법 늘어날 테고요. 물론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만······.”
“그래, 뭐 어차피 그건 내 손을 떠난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도록 해라.”
숙제에 대한 상.
육 개월 전, 내가 강아현과의 비무에서 패배했을 때, 태사조님은 모양새는 참으로 볼품없지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선물을 내려주신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170년 전인가? 서안 동남쪽 왕순산에서 영약이라고 할만한 영목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다.”
“네? 영약이요? 하지만 예전에 분명히 그런 게 있었으면 다 드시고 고금제일인이 됐을 거라고······.”
“그게, 좀 묘한 영약이라서 말이다. 게다가 내가 발견했을 때는 아직 좀 어렸어. 적어도 백 년은 더 묵어야 약효가 제대로 발휘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게 나한테는 필요 없는 종류의 영약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170년이나 흘렀는데 그 자리에 계속 있을까요?”
“워낙에 장소도 은밀하고, 사실 그게 알려진 영목도 아닌지라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확률이 높다.”
영약.
실로 가슴이 뛰는 단어다. 물론 나는 자소단이라고 추측되는 단환을 고작 여섯 달 전에 먹었기에 다른 영약을 복용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놀랍게도 그 영목으로 제련하는 단환은 일반적인 영단과는 다르게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다.
“근데 그게 또 하필 왕순산이란 말이죠······.”
이곳 섬서성에는 우리 화산을 제외하고 또 하나의 구파가 존재한다.
종남.
물론 같은 구파라고 해도 그 성세는 감히 화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화산이 소림, 무당과 함께 천하제일을 다투는 세력이라면 종남은 구파 가운데서도 최하위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왕순산은 종남산에서 너무 가깝다. 실제로 왕순산에 딱 붙어있는 서안현의 경우 종남의 속가문들이 크게 세력을 떨치는 곳이기도 했고 말이다.
“자, 어쨌거나 그건 그거고. 어디 그 애송이와의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얼마나 제대로 소화해내는지 한 번 시험이나 해볼까?”
태사조님이 검을 휘둘렀다.
* * *
“네? 출산 명령이라고요? 사숙님. 제가 이번에 제자를 받았잖습니까. 보통 제자를 받은 경우 일 년 정도는 그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게 두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분명 사제들 가운데 이번 기수에 제자를 받지 않은 아이들도 여럿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장문인의 특별한 지시다. 보통이야 일 년 정도의 시간을 준다고는 하지만, 짧은 경우 육개월 이내에 다시 일을 맡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게다가 너는 이미 육개월이나 이르게 수련동을 사용하도록 특혜를 받지 않았느냐.”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번 일은 워낙에 민감한 사안이라 경륜이 높은 제자가 필요하다. 처음에는 일대 제자가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있었지만, 그 경우 오히려 청성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지금 외당 소속의 이대 제자 가운데 그런 쪽에서는 너를 따라올 사람이 없지 않으냐. 내가 믿을 사람이 너 뿐이라 그런다.”
공야찬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감히 재무각주의 조카손자를 다치게 한 것에 대한 보복성 인사다. 하지만 그로서는 어떻게 항의할 방법이 없었다. 사부가 죽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린 이대 제자의 한계다.
“하하하, 그렇군요. 하긴 또 어떻게 생각하면 당주님이 저를 인정해주신 건데 최선을 다해봐야죠.”
“그래, 대신 내가 재무각주에게 이야기해서 예산은 넉넉하게 타냈으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녀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공야찬이 고개를 숙였다.
* * *
“하하하, 실로 놀라운 묘수입니다. 역시 장문사형이십니다.”
“묘수는요. 재무각주님도 가족에 관련된 일이 아니라 평소였더라면 금방 생각해낼 수 있는 일이었을 겁니다.”
“아닙니다. 어찌 저의 이 작은 머리가 장문 사형을 따라가겠습니까.”
장문인이 쓰게 웃었다. 애초에 공야찬이 제자를 받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가장 자질이 떨어지는 아이를 고르기에 그저 쥐 죽은 듯이 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건만.
굉무에 대한 부채감이 이런 참사를 불러왔다. 이제는 단순히 녀석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사문 전체가 흔들릴 위기다.
“물론 그냥 여기에 내버려 둔다고 해도 얼마나 성장하겠냐마는 그래도 그 꼴을 보는 것 자체가 곤욕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성장하겠느냐고?
그래, 14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덕분에 대부분 사람들은 검종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쉽게 익혀볼까 생각하거나, 혹은 너무 얕잡아보거나.
그래도 얕잡아 보는 것은 그나마 낫다.
그 화려함에 이끌려 쉬운 마음에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문제다. 물론 당장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된 제자들은 강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강해진다. 검종은 본디 그러하니까.
하지만 이미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화산이 걸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아니다.
명백하게 ‘틀린’ 길이다.
마지막 정기 비무회가 끝나고, 고작 일주일.
현종자 공야찬과 그 제자가 섬서성의 중심, 서안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