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22화 (22/288)

22화

검종지보(10)

누구나 인정할 수 있었던 천하제일인은 백 년 전 화산의 백운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리하여 당금 무림에 천하를 논할만한 고수는 총 열일곱.

권신 청무 진인은 그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고수다.

“저건?”

“사형이 보기에도 제법이지 않습니까? 저 녀석 성취가 상당히 빠릅니다. 듣기로는 자하 신공에 입문한 지 이제 고작 여섯 달 남짓 됐다고 하더군요.”

“청허 너는 아직도 아이들의 일에 간섭하고 있는 게냐.”

청허자가 헛기침을 하며 슬쩍 한걸음 물러섰다.

“크흠, 아이들의 일에 간섭을 한다기 보다는 아직 미숙하여 모르는 것이 많은 아이들이 조언을 구해오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다 욕심이거늘······.”

꾸지람 받는 청허의 모습에 청공과 청우가 웃었다.

“저 녀석 저거 내가 언젠가 혼쭐날 줄 알았다.”

“우리한테 철이 덜 들었다고 뭐라고 하더니 정작 철이 덜 든 건 제 녀석이지 뭐.”

“그나저나 청무 사형. 어쩐 일이유? 십단공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동굴에서 절대 안 나오실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잠깐만, 설마? 십단공을 완성한 겁니까?”

청무가 고개를 저었다.

“사부님도 말년까지 개척하지 못하셨던 경지다. 고작 몇 년 만에 어찌 가능하겠느냐.”

“이미 청어람 한 지 오래 됐잖소. 사백님 말년의 경지라고 해봐야 딱 내 수준이었지 뭐.”

“에이, 아무리 그래도 사백님 경지가 고작 청우 네 수준은 아니었지. 그래도 나 정도는 되셨지.”

“청공 네 놈이나 나나 거기서 거기지 뭐.”

은퇴한 이후 오히려 더 철이 없어진 것 같은 두 사제를 잠시 바라보던 청무가 다시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뭐라 콕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눈이 갔다. 대체 뭘까?

비무대 위, 백운호의 검이 번뜩였다.

* * *

이준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지금까지 백운호를 상대했던 사람 모두가 느꼈던 감정을 경험 중이었다.

‘내 동작이 읽힌다?’

맨손 박투의 고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단한 몸뚱이? 무기에 필적하는 강력한 위력? 그래, 물론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발놀림이다.

애당초 자하신공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내구력과 위력을 보장해준다. 필요한 것은 그저 그 자하신공의 막강한 위력을 그대로 펼쳐내는 수단이다. 그렇기에 요 몇 달 동안 이준형은 보법에 가장 큰 공을 들였다.

화산의 보신경 가운데서도 수위에 꼽히는 부운약표.

광양지체라는 특수한 체질이 워낙 유명했던 탓에 그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이준형의 오성은 범인의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기초적인 형을 익히는 데만 무려 두 달이 걸렸다. 부운약표는 그토록 복잡한 신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신법조차도 눈앞의 백운호는 이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서서히 적응해나가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 녀석이라면 가능할지도······.

이준형의 눈동자에 질투가 지나갔다. 아마 장광이었다면 여기서 그 감정을 폭발시켜 백운호가 잡히는 그 순간까지 주먹을 휘두르다 제풀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준형과 장광의 차이였다.

가볍게 뒤로 물러나 숨을 가다듬었다. 진기의 회복 속도는 이준형 쪽이 월등히 빠르다. 어깨의 상처를 감안해도 그렇다. 또한 조건이 더 열악해지면 열악해질수록 그 차이는 더 커진다.

이준형이 입을 열었다.

“백운호, 한 가지만 묻자. 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에게 충분히 잘해준 것 같은데.”

“새끼가, 꼼수 부리기는.”

백운호의 시선이 이준형을 꿰뚫었다. 그래, 저 눈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개뿔도 없는 주제에······.

“뭐, 하지만 넘어가 준다. 어차피 나도 이야기는 좀 해보고 싶었으니까. 그러니 나야말로 좀 묻자. 나한테 대체 왜 그랬냐? 첫날 내가 그거 몇 개 더 빨리 외운 게 그렇게 자존심 상했던 거냐?”

“그게 무슨!!”

설마 알고 있었던 건가? 이준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야? 설마 내가 다른 바보들처럼 네가 뒤에서 그러는 걸 모를 줄 알았던 거야? 장광은 나쁜 놈이고, 그걸 말리는 너는 좋은 녀석. 심지어 본산에 못 남을지도 모르니 직업까지 알선해주는 감사한 은인이라고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자신의 열등감과 검은 속내를 만인 앞에서 지적받는 부끄러움.

이준형이 으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피해의식이 심하다 못해 미쳐버린 것 같군. 네가 부족한 것은 너의 체질 탓이다.”

“누가 내 체질 부족한 거 모른대? 그러는 너야말로 그렇게 좋은 몸 타고나서 뭐가 부족해서 나를 깔아뭉개는 걸로 자존감을 충족시키냐?”

“피해의식도 그 정도면 망상 수준이로군.”

“됐고, 그 정도면 숨도 다 고른 것 같은데 들오기나 해. 이제 슬슬 알 것 같으니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리하여 최초, 비무대에 올라왔을 때처럼. 파랑 한 점 없는 잔잔한 호수와 같은 기도로. 이준형의 몸이 백운호를 향해 나아갔다.

* * *

실소가 나왔다.

애써 침착한 척하려 했지만, 명백히 흔들리고 있었다. 애당초 저렇게 곱게 자란 도련님이 입씨름으로 덤비려고 했던 것 자체가 패착이다.

차라리 어떻게 되든지 간에 마지막까지 내공을 쥐어 짜내 공격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자소단의 힘으로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나의 포원공과 녀석의 자하신공 차이는 명백했으니까.

짧게나마 진기를 안정시켰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신경 대부분을 포원공에 쏟느라 녀석을 더 제대로 긁어주지 못했다는 점 정도일까?

처음 보는 발걸음이다.

나름대로 비장의 수로 아껴둔 수법이겠지.

녀석의 신법은 정말 대단했다. 그것은 마치 매농검처럼 쉽게 파악하기 힘든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매농검의 비효율이 그저 농락이라면 저 신법의 반복되는 비효율은 오히려 효율적으로 승화된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펼치는 저 녀석 그 자체였다. 녀석은 저 신법에 담긴 함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압도적인 내공으로 비효율을 감추기 급급하다.

-쾅!!

손끝이 저릿하다. 하지만 녀석의 오른손은 아무런 움찔거림도 없이 연달아 나를 향해 쏘아진다. 아니 대체 사람 손과 검이 부딪히는데 손해를 보는 쪽이 검이라니. 확실히 신공은 신공이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이제 저 수법도 머릿속에 입력됐다. 처음에는 흐릿하던 녀석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점점 또렷하게 새겨졌다.

보인다. 아니, 보았다.

-부웅.

내가 미리 본 그것대로 녀석의 손이 허공을 가른다. 녀석의 움직임과 나의 움직임이 더해진다. 그리하여 나의 머릿속에서 도출되는 결과 값이 현실의 그것과 점점 일치한다.

머리가 뜨겁다.

생각해야 하는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 유한한 나의 머리로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들다. 나의 역량을 과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판단의 기초가 되는 정보를 제한한다.

무엇보다 왼팔의 움직임이 제한됐다는 점이 경우의 수를 매우 크게 줄여줬다.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매농검의 검리가 올올히 풀어져나온다. 이것은 상대를 농락하기 위하여 때로는 효율조차 버리는 극단적인 검이다.

때로는 비효율도 나쁘지 않다. 결국 승부는 상대적인것이고 내가 비효율적인 것 이상으로 상대방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의 효율이다.

나를 제한하여 상대방을 옭아맨다.

그리하여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는 내가 감당 가능한 범위까지 강제로 떨어진다.

보았다. 아니, 보았었다.

-퍼억

포원공의 진기가 타오르는 뇌를 보호했다.

상대적으로 검에 실리는 힘이 부실하다. 하지만 괜찮다. 나의 검이 녀석의 몸을 두들길 때마다 녀석은 그 검이 주는 물리적 고통 이상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으니까.

침착한 척하던 녀석의 기도가 크게 일렁인다.

온다.

승부수다.

조금 더 여유로운 거리를 염두에 뒀지만 아슬아슬하게 가슴팍을 스쳐 가는 녀석의 오른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역시나 삼대 제자 최고의 자질이랄까? 이 와중에 조금 더 강해졌다.

하지만 괜찮다. 상정한 범위 이내다. 무엇보다 다음 동작이 너무 뻔하다.

‘걸렸어!!’

자신만만한 눈빛.

나름대로 마지막까지 숨겨둔 일격이었겠지. 최초의 공격을 허용한 이후 움직이지 않던 녀석의 왼팔이 어마어마한 경력을 품은 채 나를 향해 쏘아졌다.

정확하게 내가 읽은 그대로였다.

전신을 내달리는 포원공의 진기가 느껴졌다. 그래, 지금이다.

사부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내공이 아니다. 도에 이르는 것은 오직 검술을 이루는 것뿐이다.

납매검이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엄밀한 논리하에 행해지는 절대적인 효율성이다.

매농검이 말했다.

세상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결국 중요한 것은 상대보다 얼마나 우위를 점하느냐다.

그리하여 고금······, 아니 천하제일인. 천중일검 증무진인 목운평이 검으로 말했다.

강한 것은 검술이 아니라 나 목운평이라고.

자하신공의 거대한 힘을 품은 이준형의 장력을 향하여 나 백운호가 자신의 의지로 검을 휘둘렀다.

-쾅!!!

* * *

준형의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비무를 지켜보던 현무자가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왼팔이 완벽히 박살이 났다. 진즉에 말렸어야 했을까?

화산 장문인 굉허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준형의 마지막 일격은 완벽했다. 최후까지 상대를 방심시켰고, 그 장력에 실린 위력은 막강했다. 물론 온전하지 못한 왼팔이었던 만큼 다소 불안정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제대로 내력조차 실리지 않은 것 같은 평범한 검으로?

자신도 모르게 움켜쥔 주먹. 굉허자의 손톱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설마 굉무가 마지막까지 떠들었던 그 검종지보라는 것을 완성한 것일까? 하지만 그건 분명 그냥 어디에나 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불과한 것 아니었나?

그리고 같은 시간 운대봉.

권신 청무 진인이 말했다.

“검종지보인가.”

“네? 사형. 갑자기 검종지보라니요?”

“아니다. 너는 신경 쓸 것 없다.”

“설마 저 어린 녀석이 검종지보를 익혔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분명 검종의 무공은 대부분 실전됐을텐데. 설마······, 굉무가 그걸 복원했다는 뜻입니까? 하지만 그럴리가······.”

청무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검종 무공의 총체. 검종지보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140년은 긴 세월이다. 그렇기에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전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다른 사숙조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던 백운 사조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애당초 검종의 무공이란 하늘이 허락한 사람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을······.”

그래, 오직 하늘이 내린 재능만이 검종의 무공을 온전히 익힐 수 있다.

청무진인이 비무대 위, 하늘이 내린 재능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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