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장. 벌써 퇴근?
“헛!!!”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됐다.
동시에 눈알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하염없이 커졌다.
정령으로 밝혀진 요상한 마녀와 대화를 나누던 다니엘.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리고 호주 주변으로 확장된 팽팽한 기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가브리엘은 두 고수의 대결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지켜보던 그 순간!
다니엘이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검 하나를 쑥 뽑아 들었다.
누가 보면 가브리엘의 눈에만 검집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다.
자연스럽게 허공에서 뽑아낸 검은 자유로웠다.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불의 검.
도대체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이 무슨 경우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눈을 뜨고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공부해 온 마법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신이 아닌 이상 저들이 보이는 능력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질을 소환하다니.
‘추기경님이 알면 난리 나겠군.’
백색 기사단에게 고위급 마법사들은 재난 그 자체였다.
유일신의 권능을 해치는 자들은 모두 이단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추기경이 안다고 해도 대항할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직접 경험한 다니엘의 능력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재력은 물론 곳곳에 심어져 있는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인맥들.
또 일부 확인한 능력 외에 감춰져 있는 능력의 끝은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가브리엘은 진심으로 자신의 부족함과 초라함을 느꼈다.
적대심이나 질투 같은 저급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에 대한 어떤 반응에 꿈도 꾸지 못할 지경이 되자 아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나도 배우고 싶다. 마법!’
가슴속 깊은 곳에서 활활 열의가 불타올랐다.
다른 건 둘째치고 하늘을 나는 비행 마법만큼은 반드시 손에 넣고 싶었다.
다니엘과 멀린, 눈앞의 정령을 언제 다시 이렇게 대면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한 만큼 신의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법이다.
거기에 한 수 더해 수련자로서의 욕심도 강하게 발동했다.
하늘을 날며 검을 뿌리는 데 거침이 없는 진짜 성기사.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렸다.
어차피 지금은 어떤 영향력도 보일 수 없었다.
다니엘처럼 허공을 날거나 정령처럼 물에 잠기지 않고 수면에 뜰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그저 공상에 빠져드는 것뿐.
습관처럼 입에 달고 다니던 신을 부르짖지도 못했다.
지금은 누가 뭐라 해도 가브리엘이 섬기는 신은 이곳의 주관자가 아니었다.
***
“!!!”
정령 비비안은 내심 화들짝 놀랐다.
‘진짜 대마법사!’
비비안도 아공간을 소문으로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아공간을 사용할 줄도 몰랐다.
마법사 멀린도 과거 어느 때 아주 작은 아공간을 이용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마저도 마나가 부족해 소멸해 버렸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구에 한정돼 살아가는 인간이 어떤 장애도 없이 아공간을 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공간의 크기가 범상치 않은 게 분명했다.
일단 아공간으로부터 뽑아낸 검부터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마법을 감당할 수 있는 마법검이 확실했다.
물과 상극인 화염이 검에서 맹렬히 타올랐다.
파르르르.
화염의 크기 때문인지 비비안의 몸이 자연스럽게 떨렸다.
이렇게까지 강한 자는 처음이다.
사악한 멀린이 왜 직접 나서지 않고 자신에게 상대하라고 했는지 확실히 이해되었다.
멀린의 현재 능력으로는 저자를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일 놈!’
비비안은 멀린의 사악함에 다시 한 번 치를 떨었다.
긴 세월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안타깝지만…….’
비비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면서도 멀린의 흉계에 번번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벗어나고자 했지만 맹약의 구속력이 허락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멀린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된다.
마법사 다니엘을 소멸시키면 비비안은 자유로운 몸이 된다.
구속에서 해방되면 비비안은 깊은 바다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심해 깊은 곳에 자신만의 공간을 건설해 소멸하는 그 날까지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복수도 부질없다는 걸 이번에 멀린을 상대하면서 다시 깨달았다.
흉악한 마법사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
과거 인간들로부터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아 온 비비안은 그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아서 왕은 물론 인간들이 꿈꾸는 탐욕스러운 욕망에는 끝이 없었다.
마법사가 된 후 개인적으로 몇몇 인간들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감사하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그 처음을 잊어버리고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한 차례 풍어를 허락하자 여왕이라 떠받들던 어부들도 얼마 못 가 한없이 게을러졌다.
아무 곳에나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를 내놓으라는 둥 화는 물론 비비안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들 인간의 행태를 모두 지켜봤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더 큰 걸 바라고 요구하는 인간들이 넘치는 세상.
그들의 무지와 이기심에 진절머리났다.
세월이 흘러도 나아지고 깨닫기보다는 그들의 욕망은 더 커져만 갔다.
저주를 내릴 생각은 없다.
그들이 꿈꾸는 욕망의 끝은 불 보듯 뻔했다.
이 땅의 어머니가 그들에게 큰 벌을 내릴 날이 멀지 않았음을 비비안은 알고 있다.
“사라져라!!!”
비비안이 먼저 공격을 퍼부었다.
잡념을 끊고 목적을 이루어야 할 순간.
한편으로 마법사 다니엘의 능력도 궁금했다.
정령이 된 이후 그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자신의 마법.
그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쫘자자자자자자자작.
물 속성의 빙계 마법이 예술이다.
이계에서도 이런 빙계 마법은 경험하지 못했다.
호수에서 치솟은 새파란 얼음 창살 수백 개.
허벅지만 한 얼음 창들이 사방을 포위한 채 빛의 속도로 날아왔다.
앞서 맛봤던 놈들과 수준이 달랐다.
속도, 파괴력, 확장된 범위까지 모두가 다 놀랄 만한 수준이다.
마법으로 따지자면 6서클 대범위 마법 정도에 가깝다.
이건 비비안이 중급 정령을 넘어선다는 것을 증명했다.
쇄애애애애앳.
호수에 뿌리 박혀 있는 얼음 창들은 움직임도 자유로웠다.
살아있는 생명체들처럼 요동치며 돌격해왔다.
정령 마법을 마법사나 기사들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나와 함께 자유롭게 섞이는 정령들의 힘.
청양 고춧가루에 불닭 소스가 추가된 것처럼 경험하는 맛이 고약하다.
그러나!
“터져라!”
들고 있던 검을 냅다 휘둘렀다.
파바바바바바밧!
순식간에 허공에 나타난 축구공만 한 수백 개의 화염구들.
파바바바바바밧!
그대로 날아오는 얼음 창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퍼벙! 퍼버버벙! 퍼버버버버버벙!
대포 수백 발이 동시에 폭발하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호수에 울렸다.
얼음 창에 자폭하는 불덩이들.
장관이다.
얼음덩어리들에 밀착한 불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덩어리가 터지는 동시에 얼음 창도 나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크윽!”
정령 비비안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정령 마법이 두려운 점도 있지만 단점도 이렇게 명확하다.
일반 마법과 달리 정령이 펼친 마법은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
호수에 뿌리를 박고 날아오던 얼음 창들은 보이지 않는 마나의 끈으로 정령과 연결돼 있다.
화염과 폭발한 얼음 창의 파장이 정령에게 영향을 미쳤다.
“죽엇!!!”
비비안의 성격은 기록물에 적힌 그대로 대단했다.
멀린을 구박하기도 했다는 그녀.
고통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다시 마법을 발현했다.
쩌저저정!
내 주변 허공으로 구체가 나타나며 나를 포위했다.
무척 투명하고 아름다웠지만 한기가 엄청났다.
파사사사삿.
구체가 나를 향해 거리를 좁히며 조여왔다.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정령이 가진 모든 힘을 구체에 담은 게 확실했다.
이 정도라면…… 거의 7서클에 도달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나를 완벽하게 보내 버리겠다는 정령의 의지.
“후훗.”
입가에 제대로 비웃음이 번졌다.
진짜 무서운 게 뭔지 모르는 인간 정령 비비안.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사이 바짝 조여온 얼음 구체를 응시했다.
푸욱!
화염검을 구체에 쑤셔 박았다.
“아악!”
거리를 두고 있던 정령의 비명이 들렸다.
결코 파괴될 일이 없을 거라 착각한 듯했다.
손에 약간의 힘이 들어갔다.
반발력과 저항이 장난 아니다.
구체가 뿜어내는 냉기는 에어컨 냉풍 수준.
손목에 힘을 더했다.
까가가가가가가가가각.
그대로 힘을 유지하며 구체를 쪼개는 데 집중했다.
***
“커억…….”
비비안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자신의 모든 깨달음과 힘을 담아 펼친 빙속 결계 마법.
온 힘을 다했다.
호수의 정기까지 끌어모아 담았다.
멀린을 가두기 위해 개발한 정령 마법의 끝판왕.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대마법사급 위력 정도는 된다고 확신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도주할 수도 없고 저항하며 파괴할 수 없는 마법 구체.
당황스럽게도 마법사 다니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도리어 구체에 구멍이 나고 말았다.
순간 비비안은 심장에 충격을 받으며 극심한 고통을 맛봤다.
알알이 전해지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잔인한 마법사 다니엘은 자신과 구체가 연결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산산조각냈다.
강력한 고통에 비비안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끝났어…….’
마법사들의 잔혹한 손속은 익히 알고 있었다.
다니엘도 마법사, 그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또로로록.
비비안의 두 눈에서 푸른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간으로 태어나 정령으로 죽는 이 순간까지의 모든 기억들이 소환되며 지워져 갔다.
그만큼의 속도로 소멸이 가까워졌다는 증거였다.
긴 세월 동안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고통 뒤에 기쁨이 찾아오기도 했었고 좌절 뒤에 희망을 맛보기도 했다.
멀린을 기다리면서 긴긴 세월 동안 복수심을 키웠지만 그것도 결국 사라져 가는 물거품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쉬고 싶어…….”
모든 걸 끝내고 싶었다.
부질없는 것들에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물방울이 되어 호수에 잠들고 싶었다.
영원한 안식처이자 무덤이 될 호수.
스르르륵.
비비안의 몸뚱이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보글보글.
호수가 천천히 여왕의 몸을 집어삼켰다.
부드럽고 따뜻한 안식이 비비안을 품고 호수로 젖어들었다.
사르르르.
버리고 나서야 얻어지는 진정한 평안.
이제 모든 게……. 안녕…….
턱!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호수 아래로 가라앉던 비비안의 허리를 잡아챘다.
“!!!”
희미해지는 의식으로 물에 잠기던 비비안이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녀의 두 눈에 들어오는 한 남자.
“계산 안 끝났는데 벌써 퇴근하려고?”
멀린보다 더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문 남자였다.
그가 비비안의 허리를 감싸 자신의 품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