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5장. 끝나지 않는 전쟁(3)
“사라져?
“네……. 각하.”
“그게 말이 되나? 자금성에 설치된 CCTV와 보안장치가 얼마나 많은데 그사이에 사라지다니.”
“태화전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분명 파악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산책에서 돌아온 슈건핑은 가까운 주석궁에서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신의 공간처럼 편한 곳은 아니었다.
중난하이에 있는 슈건핑의 저택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과거 아버지 시절부터 거주했던 공간.
주로 생활하는 주석궁이 따로 있다 보니 이곳에 머무는 일은 많지 않았다.
무심하게 듣던 슈건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장립은 자신이 제안한 청을 거절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어서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장립과의 만남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다른 이들이 비웃을 건 자명했다.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장립의 이용가치는 무한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오늘같이 힘든 날은 처음이었다.
절대 갑의 입장에서 아쉬운 을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판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몸에 붙어 떼어내고 싶어도 떼어낼 수 없는 계륵(鷄肋)같은 존재 장립.
“찾아내! 지금 당장!”
슈건핑은 분노를 삭이며 명령을 내렸다.
“넵!”
비서는 당장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기세로 힘차게 답했다.
안마당처럼 훤히 꿰고 있는 자금성 안에서 귀신같이 사라진 장립.
“경계도 강화해.”
“넵!!!”
뒷일에 대한 조치를 연속 내렸다.
도저히 장립을 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쏴아아아아아앗.
더욱 거세게 내리퍼붓는 폭우.
그 순간.
뚝!
슈건핑은 눈앞에서 갑자기 낯선 광경을 목격했다.
마치 줄기차게 퍼붓던 빗방울이 일순간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슈건핑은 이 모든 게 실재가 아닌 잠깐의 착각일 뿐이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인식한 그 찰나의 순간에 또 다른 신들의 시계가 열렸다 닫혔다는 사실을 몰랐다.
***
- 대, 대한제국요?
귀신이 묻는다.
그렇다 대한제국!
무슨 생각으로 내뱉었는지는 모르지만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난 과거 이들에게 농락당한 조선의 일개 사신 따위의 배역을 맡고 싶지 않았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존립하는 내내 조공을 바치며 살았던 조선 왕국.
아픔만 많았던 때의 사신으로 이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눈앞의 인물들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대충 그려지는 그림은 있다.
명과 청의 내로라하는 위대한 황제일 것이다.
죽어서도 자금성에서 떠나지 않고 신처럼 군림하며 살아가는 자들.
중국 민족들 마음속에 신처럼 자리잡고 받들어지다 보니 죽어서도 이렇게 자금성을 차지하고 버틸 수 있는 것이다.
- 무엄하다! 지금 이곳이 어느 안전이라고 존재하지도 않는 제국을 논하느냐!!!
바로 앞에 대기 중이던 내관 두 사람이 동시에 호통 쳤다.
콰아앙!
죽어서도 그 영향력이 대단한 자들.
살아생전에 부렸던 기세로 카르마의 파장이 일어났다.
그러나.
“갈!”
나 역시 한마디 상응할 만한 호통을 쳤다.
퍼어어어어엉!
그 순간 내관들의 모습이 허깨비처럼 펑 소리를 내며 함께 사라졌다.
- 허엇!
- 어찌 저럴 수가!
- 시,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고관대작들의 크게 당황한 음성들이 뒤쪽에서 들려왔다.
- 으음…….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제 둘도 신음을 흘렸다.
소리가 묵직하게 아래로 깔렸다.
이런 허장성세는 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야 파악된 듯했다.
- 역시! 대단하십니다! 형님! 아니 대한제국 사신님!
귀신이 한껏 격양돼 존경의 목소리를 냈다.
스윽.
고개를 들어 두 황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두 황제의 이름은 어떻게 되오?”
무덤덤한 음성으로 그들의 이름을 물었다.
- 네이노오오옴!!!
- 어찌 저런 망발을!
- 금의위들은 뭣들 하는가!
- 금려팔기군은 무얼 하는가!!!
나의 한마디에 난리가 났다.
황제를 향해 이름을 묻자 암살자라도 나타난 듯 들끓는 자금성의 귀신들.
이들은 아직도 세상이 변한 줄 모르고 있다.
순수한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를 과거 역사 속 조선의 사신 정도로 대하려 하는 두 황제의 속셈이 빤히 보였다.
죽어서도 한반도를 자신들의 속국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오만한 개버릇.
그래서 먼저 선수 쳤다.
어차피 나로서는 쫄릴 일도 없었다.
두 황제는 현존하는 중국인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았기에 죽어서도 신이 됐다.
그러나 나는 신들도 인정하는 자수성가 셀프 신선이 아닌가.
그것도 살아서 신선이 된 자.
어찌 죽은 귀신들 따위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단 말인가.
- ……본황은 영락제다.
영락제!!!
명나라 시절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한 사람이었던 인물.
주원장 홍무제의 넷째 아들로 조카를 폐위하고 황위에 오른 연왕 주체가 영락제였다.
열악한 군사지만 형을 물리치고 황좌를 차지했다.
제위 시절 다섯 번이나 직접 원정에 참가하기도 했던 거친 황제.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북경을 수도로 정하고 자금성을 축성한 유명한 이다.
- 허읍! 여, 영락제!
해외에서 자랐지만 중국인의 핏줄인 귀신이 크게 놀랐다.
이어 시선은 바로 옆에 있는 청의 황제에게 향했다.
- 난! 강희제다!
만주족의 패기가 느껴지는 답변이다.
청나라는 강희, 옹정, 건륭 3대 시절이 가장 강력했다.
주변 지역을 복속시키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뤄냈다.
그중에서 첫 번째로 스타트를 끊었던 인물 강희제.
살아서 누렸을 법한 오만함이 전신에서 풀풀 풍겨 나왔다.
- 가, 강희제! 세상에!!!
귀신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제야 이 밤의 행차가 이해됐다.
명이나 청나라 시절 가장 강력한 국통을 이어받은 이들이 지금도 자금성의 실제 주인으로 머물며 밤을 지배하고 있었다.
살아서 쌓았던 명예가 죽어서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 대한제국은 무엇인가?
영락제가 묻는다.
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이다.
“환웅의 아드님인 단군께서 세우신 성국이 오늘에 이르러 대한제국이 되었소.”
간단하게 설명했다.
- 단군? 들어보지 못했노라.
영락제가 나의 설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렇겠지.
과거부터 중국인들은 본능적으로 한반도를 무시했다.
그러다 여러 번 큰 코 다쳤다는 것도 금방 잊어버렸다.
지금도 그 생리는 변하지 않았다.
- 일개 조선의 사신이 제국을 칭하다니 그 죄가 가볍지 않노라!
강희제가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는다.
영락제나 강희제에게 조선은 작은 조공국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번 제대로 기침하면 앞에 무릎 꿇으며 벌벌 떠는 약소국.
2016년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갖는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거 조공이나 바치던 놈들이라는 생각이 그들 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것이다.
“후후훗.”
차가운 비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황제라고 앞에 앉아 있는 저 두 인물이나 조금 전 상대한 중국인들이나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
우주가 자신들을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오만한 민족일 뿐이다.
“어이. 형씨들.”
냉담한 태도로 대할 수밖에 없다.
- 뭐, 뭐라고?
- 혀, 형씨???
- 저 미친놈을 봤나!
- 당장 참하라!!!
뒤쪽에 서 있던 귀신들이 난리를 쳤다.
자신들이 모시는 황제를 두고 감히 형씨라 부르는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저벅.
걸음을 한 걸음 옮겼다.
황제들이 앉아 있는 상단으로 이어진 태화전의 첫 번째 계단.
차자자장!
명 황실을 수호하는 금의위와 청의 황도를 수비하는 팔기군 중 가장 핵심 인사들인 금려팔기군이 검을 뽑았다.
황명이 떨어지기만 하면 당장 달려들 기세다.
- 으아아아아! 혀, 형님. 진짜 살기에요!
귀신이 바짝 쫀다.
상대는 하늘 천신에 오르지 못했지만 지상에 남아 황제로 군림하고 있는 신이 된 영락제와 강희제를 섬기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축적되어 있는 카르마 포인트가 적지 않았다.
인간들 사이에서 잊혀지지 않고 여전히 추앙받고 섬겨지면 누구나 죽어서도 포인트를 벌 수 있다.
“때가 되면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감이 하늘이 정한 이치……. 아직도 너희들이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빠작.
황제들만 발을 들일 수 있는 태화전으로 오르는 중앙 계단.
내공을 사용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자 발을 뗀 자리마다 발자국이 깊숙이 각인됐다.
- 참!
황제들이 참지 못하고 참을 명했다.
죽어서도 황제로 군림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의 집념체들.
인류의 평안보다 자신들의 배 채우기만을 바라는 중국인들의 속성이 그대로 엿보였다.
작은 도발에도 목숨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쇄애애애애앳!
귀신 호위병들이 검을 들고 날아왔다.
죽음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검날.
인간도 베이면 시름시름 앓다 목숨을 잃고 말 사신의 살기가 담겨 있다.
- 으아아아아아아!
급기야 귀신이 비명을 터트렸다.
스릉!
재빨리 아공간을 열고 검을 뽑아 들었다.
파아아앗!
카르마가 담겨 있는 검기가 찬란한 빛으로 승화됐다.
오만방자한 중화민족.
현실에서 그들을 벌하기 전에 먼저 혼내줘야 할 자금성 귀신들.
이제부터 본격적인 전쟁이다!!!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