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장. 누님이 왜 거기서 나와?(2)
“왜 그래?”
류미는 장립의 반응이 이상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우연한 만남이었다.
이른 아침, 홍콩 거리에서 장립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해 본 일이다.
2년 전 베이다이허에서 만남 이후 기대와 달리 인연이 끝나 버렸다.
함께한 시간은 무척 짧았지만 기억에 남겨진 추억은 꽤 진했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중에 마주친 장립.
그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강렬했다.
운전미숙으로 자칫 대형 사고가 날 뻔했던 순간.
그때 마주하게 된 장립.
자신의 신분을 밝혔음에도 그의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다른 남자들이었다면 우선 고개부터 숙이고 눈치를 봤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담담한 모습으로 류미를 꾸짖고 꼬박꼬박 대꾸하던 장립.
제대로 한 번 놀려 보려 집에 초대했을 때도 거절하기는커녕 당당히 초대에 응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펼쳐진 장립의 신위.
보잘것없던 일개 화교 청년이 중국 고위 공산당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외조부를 비롯해 장택민, 슈건핑 모두 장립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려 갖은 애를 썼다.
기대하지 않고 긁은 복권이 1등에 당첨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류미는 베이다이허 기간 내내 행복을 만끽했다.
마치 자신의 선견지명으로 장립을 발굴한 것처럼 여겼다.
이광과 마찰이 생겼을 때 장립을 두고 약혼자라고 말해 버렸다.
이후 파장은 적잖이 컸다.
그만큼 장립이 마음에 쏙 들었던 류미.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보란 듯이 배신을 당했다.
베이다이허 회의가 끝나고 나면 개인적으로 연락이 올 거라 생각했다.
장립과 자신이 쌓은 감정이 보통 감정은 아니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착각으로 끝나 버렸다.
얼마 동안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렸지만 끝내 전화 한 통 없었던 장립.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뜬금없이 그가 한국에서 여자를 만나 아이 아빠가 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확인해 봤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장립은 그렇게 류미에게 상처만 남기고 졸지에 애 아빠가 돼 버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를 잊으려 무척 노력했다.
류미는 중국 상류층 중심으로 최고의 신부감에 꼽히며 높은 주가를 보였다.
상해방과 태자당 사이에 낀 공청단의 원자바오 외손녀.
그녀를 품에 들이는 순간 세력의 균형추가 어느 한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류미가 남자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공산당 간부 자제들 대다수 우선 재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진짜 소황제인 줄 착각하고 사는 자들이었다.
문란하기 짝이 없는 여성 문제는 물론 약물 문제는 특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부분 최고 당 간부들은 자식이 딱 한 명뿐인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청렴한 고위 공산당 간부라 해도 가문의 대를 잇게 될 자식에게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희망인 자녀들이 벌인 악행은 보통 사람의 상상 이상을 뛰어넘었다.
비밀 공안들 중에 전문 처리반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언론을 통제해 절대 밖으로 보도되지 못하도록 했다.
의식 있는 개인이 동영상 자료를 올려도 바로 차단당하는가 하면 도리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이지 않는 신분의 벽이 그만큼 단단했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다’는 공산당 정치사상은 공자가 꿈꾸는 이상주의 국가보다 더 실현하기 어려웠다.
민주주의보다 더 타락하고 부패한 채 굴러가고 있는 공산당.
공산주의를 선택한 국가 대부분이 이런 전철을 밟았다.
가망 없는 망나니를 만나 사느니 혼자 살겠다고 생각한 류미에게 장립은 세상에 없던 남자였다.
빠질 것 없는 남자임에도 스스로 절대 과시하지 않았다.
권력 앞이라고 고개 숙이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여자를 배려할 줄도 알았다.
속내를 감추고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특한 냄새를 풍기는 남자는 아니었다.
장난기가 섞여 있지만 또 진중함 속에 맑게 빛나는 그의 눈빛.
장립이 애를 낳았다는 소리를 처음 듣고는 온갖 저주를 다 퍼부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상 우연히 만나게 되니 또 마음이 스르륵 녹아 버렸다.
그를 잊기 위해 발버둥쳤던 노력들이 한순간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그저 옆에 그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오늘 잠깐 만나고 다시 헤어져도 후회 없기를 순간순간 소망했다.
스스럼없이 데이트라 말하며 그와 동행한 딤섬 맛집.
처음 방문한 게 분명한 장립과 주인 할머니는 서로를 보며 흠칫 놀라는 눈치다.
마치…….
“두 분 서로 아세요?”
누가 봐도 아는 사이로 보이는 이 묘한 분위기.
상식적으로 두 사람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장립은 이곳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맛있는 딤섬집이지만 의외로 소문나 있지 않은 곳이었다.
맛에 민감한 유튜버나 여행자들도 거의 찾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가끔 딤섬이 먹고 싶으면 류미는 주저 없이 이곳을 찾았다.
“아니……. 처음 봐.”
장립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채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도 처음 보는 총각이야.”
할머니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뭐지? 이 위화감은?’
눈치 빠른 류미가 금세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류미 오랜만이야. 남자친구?”
할머니가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단골손님인 류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람 핀 전직 약혼자요.”
류미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래서 남자 얼굴 보고 사귀면 안 돼. 잘생기면 꼭 얼굴값 하더라.”
장립을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원하게 가르침을 내리는 할머니.
“끙.”
장립이 눈을 피하며 신음을 흘렸다.
“할머니 딤섬 주세요!”
“그래 조금만 기다려. 3인분이지? 금방 만들게.”
“네? 3인분요?”
오늘따라 이상한 주인 할머니.
멋대로 3인분을 주문받고 대답도 하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저……분 누구십니까?
귀신이 바짝 쫄아 묻는다.
저승사자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귀신인데 오늘은 좀 아니다.
레벨이 높으니 포스가 남다른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는 신선 누님.
- 신선 맞죠? 그런데 왜 이곳에서…….
이제야 확실하게 느껴지는 가게 분위기의 정체.
결계가 쳐져 있다.
류미에게 홀려 바로 감지하지 못했던 선신의 보호막.
신선계에 한 발자국 걸치고 살다 보니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지금처럼 감지하지 못한 불상사가 발생했다.
귀신도 나와 같은 계열이다 보니 무사통과했다.
“진짜 모르는 사이야?”
류미가 심상치 않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봤다.
누가 정치 가문 출신 아니랄까 봐 눈치가 보통이 아니다.
“몰라.”
당연히 노코멘트다.
“그렇지? 알 리가 없을 거야. 이곳은 우연히 찾은 나만의 맛집인데 장립이 알 리가 없지.”
류미가 요즘 여성들 같지 않게 착하다는 게 여기서 인증됐다.
이곳은 선한 심성을 가진 자들에게만 맛집인 곳이다.
그것도 신선이 까다롭게 설정한 기준을 통과해야만 이곳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밖에서 대기 중인 경호원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들 눈에 이곳은 단지 더럽고 불결하고 허름한 골목 가게로 보일 뿐이다.
“기대된다.”
“흐흐. 기다려봐. 여기 샤오롱바오는 특별해!”
입맛 까다로운 류미가 특별하다며 치켜세우는 샤오롱바오.
소룡포라 불리는 돼지고기 만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중국식 만두 요리의 대표주자로 딤섬 안에 뜨뜻한 육수가 들어가 있다.
몇 번 맛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나도 그 맛이 기대된다.
누님이 만들면 어떤 요리라 해도 최고가 된다.
“그런데 립…….”
류미가 나를 본다.
“응?”
“행복해?”
갑자기 툭 던져진 느닷없는 질문.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질문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직설적이다.
“행복이라…….”
말끝을 줄였다.
행복의 기준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돈을 좇는 자에게는 돈을 버는 순간이 행복일 것이고, 사랑꾼에게는 사랑이 행복의 전부가 될 것이다.
그 점에서 난.
“류미는?”
“나? 난…….”
대부분 행복을 묻는 이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게 마련이다.
행복에 겨워 사는 사람은 불행이라는 감정을 꺼낼 이유가 더더욱 없다.
“행복하지 않아.”
역시나 류미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왜?”
“물질은 넘치지만 정신이 피곤해.”
“배가 불렀네.”
“맞아…….”
태어난 순간부터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류미다.
의식주에 따른 기본이 완벽하게 해결되었을 테니 다른 문제가 찾아드는 건 당연했다.
신이 주신 공평함의 이치가 그랬다.
아무리 돈과 물질이 넘쳐도 정신과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다.
“갑자기 이런 말이 떠오르네…….”
“무슨 말?”
류미가 눈빛을 반짝였다.
중국에서는 겉보기에 공주처럼 살고 있지만 속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하는 그녀.
“행복을 찾는 일은 불행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행복을 찾는 게 불행의 원인이라니?”
류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형님은 가끔씩 너무 철학적입니다.
귀신도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류미.”
“응…….”
“행복은 다른 게 아니야. 즐거운 상상을 하고 만족하며 웃고, 다른 곳보다 자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되는 거야.”
“상상하고 웃으라고…….”
류미에게 어려운 일일 수도 있었다.
공청단 고위 가문에서 자란 그녀에게 일반인이 꿈꾸는 행복을 권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류미의 행동은 곧 가문의 일과 직결됐다.
“신은 언제나 공평해. 어른들이 말하기를 젊어서 돈이 부족할 때는 맛있는 게 천지고, 나이 들어 돈이 넘쳐도 입맛이 없어 맛있는 음식이 의미 없다고 했어. 그와 같은 거야. 타인들이 보기에 류미에게는 행복할 요소가 넘치지만 반대급부로 류미는 일반인이 누리고 있는 행복 요소가 부족해.”
“예를 들어?”
“정(情).”
“!!!”
류미가 충격받은 듯 반응했다.
“솔직히 말해봐. 진심으로 가슴을 열고 대화할 친구가 몇이나 있어?”
“…….”
류미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마 없을 거다.
류미의 신분을 알고도 계산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해관계가 얽히면 마음은 변절되게 마련이다.
그걸 잘 알고 있을 류미.
장립이 베이다이허에서 자신에게 보인 거침없는 행동에는 그 사심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네……. 난 진짜 친구가 없었네.”
류미가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진짜 친구가 있었다면 이렇게 홍콩에 혼자 오지 않았을 것이다.
- 류미 양! 제가 있습니다! 저 장립이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귀신아 시끄럽다.
넌 이번 생의 기회를 박탈당했다.
“잘 생각해봐. 그래도 친구가 있어.”
“친구?”
류미가 날 보며 큰 눈을 깜박였다.
씨익.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
“아!”
“우리 친구잖아. 비록 전직 약혼자지만.”
베이다이허에서 이런 류미와 마음이 통했다.
그녀의 진심은 순수했다.
사르르.
얼굴을 붉히며 활짝 웃는 류미.
복사꽃처럼 환한 빛이 그녀를 감쌌다.
- 진짜 형님은…… 여심 저격 사기꾼입니다!
귀신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얘기들 나눠?”
누님이 딤섬이 들어 있는 나무 찜통 세 개를 들고 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와 류미, 귀신 앞에 놓았다.
“할머니 하나는 서비스에요?”
“무슨 소리야. 여기 손님 있잖아.”
“네?”
누님이 귀신을 똑바로 쳐다본다.
- 가, 감사합니다.
귀신이 누님 포스에 쫄아 얼떨결에 감사 인사를 했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할머니로 변장한 누님을 쳐다봤다.
그리고 물었다.
누님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 누님.
- 보면 몰라. 부업 중이잖아.
회귀의 전설 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