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0장. 오빠!(4).
“감축드립니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확실히 눌렀습니다! 네바다, 플로리다, 오하이오 주를 비롯해 상당수 경쟁주에서 모두 다 50% 가까운 지지율을 획득했습니다!”
“흐흐흐. 내 그럴 줄 알았어.”
워싱턴에 위치한 임시 선거 사무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햄버거를 먹으며 선거 운동을 시작했다.
얼마 전 고용한 선거 참모가 지지율 자료를 들고 흥분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곧 파비오가 패배 선언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럼 바로…… 대선입니다!”
“힐러리와는 어때?”
“이제 대등한 수치가 됐습니다.”
“대등? 아니야……. 힐러리 따위가 날 잡을 수는 없어.”
“맞습니다. 보이지 않는 백인 유권자 표심까지 합치면……. 각하 감축드립니다!”
“각하?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각하라는 말이 싫지 않은지 트럼프는 광소를 터트렸다.
사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꿈의 호칭인가.
지금까지 기회만 되면 대놓고 자신을 무시했던 정치인들.
자신들만이 고귀한 척 탈을 쓰고 트럼프를 벌레 보듯 해왔다.
여자와 돈만 밝히는 호색한에 정치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부동산 업자.
그들이 트럼프를 보는 한결같은 시선이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그들이 보는 것만큼 어리석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에게도 꿈이란 게 있었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백악관 입성.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렸지만 정치인들 모두 다 트럼프를 무시했다.
‘이 모든 게 다 다니엘 덕분이야.’
트럼프는 흡족한 마음에 다니엘을 떠올렸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나 가슴에만 품고 있었던 대권에 대해 말하던 다니엘 장.
로버트 라이언과 함께 여러 파티에서 눈에 띌 정도로 확실하게 밀어줬다.
암암리에 다니엘이 제공해 준 선거자금 규모도 엄청났다.
힐러리의 슈퍼팩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번 대선 준비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어주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다니엘은 감히 미국 정부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의 거대한 세력을 이용했다.
그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트럼프도 어렴풋이 짐작만 했다.
똑똑.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끼릭.
문을 열고 들어서는 비서.
트럼프의 고문 변호사이자 정보 수집 및 트럼프에 관련한 뒤처리 전문가였다.
“무슨 일이야?”
“다니엘이 미국에 왔습니다.”
“뭐라고 다니엘? 지금 어딘데?”
“LA입니다.”
트럼프는 비서의 말에 깜짝 놀랐다.
미국에 올 때마다 꼭 연락을 주고 만남을 가졌던 다니엘이 미국에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설마…….’
순간 트럼프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은 보란 듯이 잘나가고 있지만 자칫 다니엘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면 난처한 상황이 생길 것이다.
오바마도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다니엘이다.
그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범위를 아직 다 파악하지 못했다.
스윽.
트럼프가 빠르게 스마트폰을 꺼냈다.
아직은 아쉬운 입장에 있는 처지였다.
이런 순간 자존심 따위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틱틱.
빠르게 번호를 누르는 트럼프.
‘젠장……. 거기는 새벽이잖아!’
분주히 움직이던 손이 멈췄다.
워싱턴과 달리 아직 새벽인 LA.
트럼프는 선뜻 번호를 누를 수 없었다.
이른 새벽부터 다니엘의 편안함을 깨고 싶지 않았다.
공화당 대권 주자가 확실한 트럼프도 다니엘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
- 아니 무슨 애가 발음이 이렇게 좋아요? 오빠라고 한 거 맞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자 귀신이 화들짝 놀랐다.
아직 다들 잠을 자고 있을 새벽 시간이다.
그 시간에 시아가 홀연히 나타나 나에게 오빠라고 불렀다.
- 그리고…… 시아 걷는 거 맞죠?
그랬다.
손에 작은 인형을 든 시아는 놀랍게도 걷고 있었다.
돌 지난 아기들처럼 똑바로 걸었다.
분명 돌도 안 된 아기인데 믿을 수 없는 모습으로 똑바로 서 있었다.
딱 봐도 빙의와 비슷한 현상이 시아에게서 보였다.
“오라버니…….”
“!!!”
귀에 정확히 들려온 호칭 오라버니.
또 또 시아의 눈빛이 변했다.
몽롱한 듯 초점이 흐려지면서 또 아련한 감정이 서려 있는 눈동자.
-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시아야! 너 왜 그래! 오, 오라버니라니!!!
장립 귀신은 지금 이 현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당황했다.
귀신 생에 처음 보는 광경일 게 분명했다.
시아의 눈동자는 계속 몽롱한 상태다.
“소연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이름 소연.
“오, 오라버니! 흐으윽.”
타다닥.
다리 힘이 완전히 생기지 않았을 텐데 시아가 힘 있게 나에게 뛰어왔다.
그리고 굵은 나의 다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 형님! 시아에게 귀신이 씌인 것 같아요!
귀신이 아니다.
“하아아.”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확실히 알게 됐다.
시아는…….
전생의 내 누이였던, 그 꿈속에서 보았던 소연이었다.
고려 말 왜구들이 들끓던 시절을 함께 살았던, 어느 가문의 오누이.
장소연이라는 이름을 갖고 나의 누이로 인연이 닿았던 그 아이.
소연이 이생에 다시 시아로 온 것이었다.
그것도 믿을 수 없는 관계에 엮이게 된 임성철 회장의 딸로 말이다.
스윽.
시아를 조심스럽게 안아올렸다.
“흐으으으윽. 절 버리지 말아요……. 오라버니…….”
작은 입술로 정확하고 또박또박하게 마음을 전달하는 시아, 아니 소연.
서럽게, 서럽게 눈물을 계속 흘렸다.
가슴이 아프고 촉촉하게 젖어왔다.
어린 시아의 작은 눈이 감당하며 흘리기에는 너무 아픈 눈물이 아닐 수 없었다.
찌르르.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려왔다.
왜구의 이마에 화살을 날리며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그 이후 상황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리 꿈속이어도 마을 사람들과 1000명이 넘는 흉포한 왜구들과 맞서 싸워 이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의 나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꿈속에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시절에도 수련을 한 것 같았지만 내공이 한없이 미약했다.
- 형님! 빨리 용한 무당을 찾아가 봅시다! 시아가 한 많은 여자 귀신한테 빙의된 게 확실하다니까요!
귀신이 나와 시아의 모습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소연아……. 오라버니 안 떠나. 그러니까…… 안심해.”
시아를 탄 전생 인연 소연을 달랬다.
“무서워요……. 왜구들이…… 왜구들이……. 악!”
품속에서 바들바들 떨며 흐느끼는 소연의 혼.
내 옷자락을 고사리 같은 시아의 손이 강하게 움켜잡았다.
- 왜구라니요?
장립은 거의 혼란에 빠졌다.
저 레벨의 의식 수준으로는 지금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토닥토닥.
시아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사랑하는 누이의 마음을 달래는 오빠의 손길이었다.
“오라버니……. 절 버리지 마세요……. 죽어도…….”
소연이 죽는 순간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을 강렬한 의식의 한 자락.
그 절절한 한이 아직도 진행중에 있는 듯하였다.
왜구들과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결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으득.
피가 날 만큼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는 왜구들과의 전쟁.
평화롭게 살아가는 한민족을 왜구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수탈하고 있었다.
- 미치겠네! 형님, 지금 이 상황을 설명 좀 해주십시오!
장립이 혼란스러운지 급기야 소리를 쳤다.
“미안하다. 소연아……. 내 어여쁜 누이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도 빙의 상태에 노출되었다.
꿈속에서 누이를 한없이 걱정하던 오빠의 마음이 온통 나의 의식을 지배했다.
주르륵.
진한 눈물이 하염없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가슴 속에서 전해지는 아림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수백 년을 지나 다시 현생에서 만나게 된 누이와의 인연.
하늘이 펼쳐 놓은 인연의 그물에 다시 한 번 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무리 회귀한 생을 살고 있다 해도 하늘의 깊은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었다.
- 아니! 우리 소연이가 왜 형님 누이냔 말입니까! 구체적으로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시라고요!
장립은 머리통을 부여잡고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그랬군……. 그랬어.”
그때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임성철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회장님은 또 왜 그러십니까? 지금 이 상황이 이해 가십니까?
와이파이로 연결된 셋이었다.
장립의 느닷없는 비명에 임성철 회장이 잠에서 깬 듯했다.
“시아가 가끔 자다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네.”
내 품에 안겨 있는 시아를 가만히 보며 임성철 회장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아빠로서 보이는 무한한 걱정의 눈빛이었다.
모두가 식물인간으로 알고 있는 임성철 회장의 상태.
그런 그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인생 2막을 살면서 얻게 된 귀한 2세였다.
지금 순간의 삶을 살기 위해 오정의 회장 자리와 엄청난 부까지 내려놓았다.
그런 임성철 회장의 천금 같은 자식 시아에게 그도 예상치 못한 아픈 비밀이 존재했다.
- 도대체 무슨 말을 했다는 겁니까?
“오라버니를 불렀지……. 그것도 아주 애타게 말이야. 옹알이를 겨우 해야 할 시아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지.”
구강이 아직 다 발달하지 않은 아기였다.
그런 시아가 자다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오라버니를 몇 차례나 불렀다.
“아내가 그것 때문에 깜작 놀라 여러 병원에 다녔어. 그런데 의사들은 거짓말처럼 여기더군. 여기 미국 의사들은 영혼의 신비한 얘기는 미신쯤으로 여기니까 당연한 반응이었지.”
임성철 회장이 그간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 영혼의 신비한 얘기요? 지금 무슨…….
“놀랍네. 우리 딸이 전생에 장 회장의 여동생이었다니.”
임성철 회장은 정확하게 맥을 짚고 있었다.
- 뭐, 뭐라고요! 형님이 우리 시아의 전생 오라비였다구요???
귀신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의 존재 자체도 사람들에게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란 걸 장립은 인식하지 못했다.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놀라워. 인연의 그물이라는 게 이렇게 촘촘할 줄은 나도 몰랐네.”
임성철 회장도 이제야 깨달아 가고 있는 인연의 그물.
- 거짓말! 그게 사실입니까?
귀신은 아직도 믿지 못했다.
“사실 나도 고백할 게 있네.”
그때 임성철 회장이 무거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런 고백이었다.
멍한 시선으로 임성철 회장을 바라봤다.
- 설마…… 회장님도…….
무언가 짐작한 듯 귀신이 하려던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시아가 태어난 뒤로 나도 꿈을 꾸기 시작했네.”
갑작스레 꿈 얘기가 이어졌다.
“고려시대쯤 되는 것 같더군. 평화로운 마을에서 살고 있었네.”
나와 비슷한 시점의 꿈을 꾼 듯한 임성철 회장.
“내 꿈에 아름다운 소녀가 보였네. 곱고 고운 소녀였네. 우리 시아처럼…….”
말을 하면서 임성철 회장의 시선은 더없이 사랑스러운 사이를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 만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네.”
“네! 마, 만덕이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