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9장. 오빠!(3). (1,035/1,284)

1049장. 오빠!(3).

“흐흐흐흐흐흐흐흐…….”

나직한 웃음이 지하광장에 울렸다.

파아아앗.

붉은 핏빛이 커다란 오망성 위에서 번뜩였다.

그 안에 시체처럼 누워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 세 명의 남자들.

특수한 수련을 쌓은 듯 전투 근육이 발달돼 있는 몸이었다.

“완벽해! 드디어…… 진정한 피의 전사들이 태어났다!”

붉은 안광이 번뜩이며 아사신의 장로 마자히드가 격하게 기쁨을 표했다.

주인님을 깨우기 위해서는 더 큰 피의 제단이 필요했다.

세뇌된 자들을 이용해 IS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놈들을 선두에 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인질로 잡히거나 전쟁에 합류한 사람들을 적당히 빼돌렸다.

전쟁 포로와 이민족, 고아들이 주를 이뤘다.

심혈을 기울여 피의 제단을 만들었다.

악마의 마법진을 이용해 아사신 전사들에게 어둠의 힘을 부여했다.

그러는 중에 틈틈이 폐품들을 내보내 기사단을 혼란에 빠뜨렸다.

가장 중요한 피의 제단에 결코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공격을 가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시간 속에서 완성된 진짜 피의 전사들.

주인님이 머무는 곳의 힘을 온전히 전수받았다.

제아무리 순은으로 만든 총알이라 해도 뚫지 못할 진짜 피의 전사들이었다.

“눈을 뜨라! 전사들아!”

마자히드가 쟁쟁한 음성으로 외쳤다.

스릇.

나신을 드러낸 채 누워 있던 피의 전사들이 눈을 떴다.

파앗!

선 붉은 눈동자가 빛났다.

“일어나라!”

마자히드의 주문은 계속됐다.

우드드득.

관절 마디마디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신형을 일으키는 피의 전사들.

“오! 아름답도다!”

한눈에 봐도 강철 같아 보였다.

아직 무기를 들지 않았음에도 맨몸에서 풍기는 강한 힘의 아우라.

이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힘은 마자히드도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었다.

“야훼바트……. 너를 피의 제단에 올릴 것이다. 흐흐흐.”

마자히드는 세상을 혼란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은 물질 위주인 세상의 주인이라 불리는 야훼의 딸을 죽이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신이 허락한 기회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가라! 전사들이여! 너희들의 무자비한 자비를 세상에 선포하라! 크하하하하하하!”

마자히드의 흉포한 광소가 넓은 공간을 울렸다.

“키키키키키.”

“크크크크…….”

같은 모습으로 따라 웃는 피의 전사들.

그들의 핏빛 눈동자에 진한 살기가 어렸다.

***

새하얀 피부에 곱게 땋아 내린 댕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근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자라 소문이 자자했다.

학문적 소양도 깊고 수도 잘 놓았다.

좋은 남자를 만나면 능히 대가문을 일으키고도 남을 누이였다.

“저도 돕겠어요.”

소연의 손에 들려 있는 검 한 자루.

평소 수를 놓던 섬섬옥수에 무기가 들려 있었다.

“안 돼.”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누이는 전혀 무공을 수련한 적이 없었다.

검을 들고 서는 순간 아귀 같은 왜구들의 표적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빤했다.

곱상하게 생긴 여인네들은 아낙네이건 처녀이건 구분하지 않고 모두 노예가 되었다.

점령이 아니라 약탈이 목표인 왜구들은 돈 될 만한 것들도 모조리 쓸어갔다.

해마다 흉년이 드는 규수 지방이나 대마도에서 약탈을 하기 위해 출발하는 왜구들.

수십 년 동안 반복해 오던 짓과 달리 이제는 정규 군사 규모와 다를 바 없는 형국으로 쳐들어왔다.

비단 배가 고파 약탈하러 오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방 영주들이 가신들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었다.

두 차례 여몽연합군을 막아내며 막부는 힘이 다했다.

막부의 재정이 부족해지자 무사들이 어민과 농민들과 합세해 해적이 된 것이다.

여기에 지방 영주들까지 힘을 보태자 이는 정규 군사 수준이 되어 버렸다.

고려에서 생산되는 물자들이 저들의 약탈 목표였다.

쌀을 비롯한 먹거리와 도자기와 직물, 그리고 포로들은 왜구들의 주 수입원이 됐다.

지난 수십 년간 수백 회가 넘는 침략을 받아온 터였다.

홍건족과 원나라보다 더 악독한 왜구들의 침략.

중국 쪽 약탈을 했지만 주로 그 대상이 되는 쪽은 가깝고 만만한 고려였다.

수백 척의 함선을 동원해 대규모로 공격해 왔다.

경상도를 넘어 남해안, 전라도뿐만 아니라 예성강을 타고 개성까지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세금을 바치는 조운선들이 박살났다.

연해의 수천 리 지역에서 인가의 연기가 끊어졌다.

기름진 들판인 평야를 왜구들이 제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다행히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서 왜구들을 대규모로 소탕했다.

화포를 이용해 왜구의 배들도 침몰시켰다.

하지만 물러날 기미가 없는 왜구들은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고려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은 폐위당했다.

나라를 받치는 두 기둥 중 한 명인 최영 장군도 위명을 달리했다.

고려의 충신이었던 아버지도 살해당했다.

그에 한탄하며 고향에서 힘을 기르고 있던 터에 왜구가 쳐들어온 것이다.

나주성이 불탔다.

근방에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이 없었다.

이웃한 호족들 상당수도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다.

“아씨, 안 됩니다! 저놈들은 짐승만도 못합니다!”

노비 만덕이 고개를 내저으며 소연을 말렸다.

산성의 성벽은 안전할 만큼 높지 않았다.

공민왕 때 세워진 작은 산성에 불과했다.

산비탈이 가파랐지만 왜구들에게 이 정도 성벽은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죽기로 싸운다면 이 한 몸 지키기는 쉬울 거예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열여섯 누이의 의기충천 대답이 이어졌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비단 소연뿐만이 아니었다.

아낙네들과 하물며 코흘리개 꼬맹이들도 돌멩이를 성벽 위로 날랐다.

패하면 죽거나 모두 노예가 된다. 남은 생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판인 삶을 살아야 했다.

그걸 알고 있으니 결코 항복할 의사가 없는 건 당연했다.

힘없는 민족이 당해야 하는 서러움이었다.

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왜구들을 노려봤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태어난 이래로 평안한 해가 한 해도 없었다.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피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왜구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행태가 가증스러웠다.

사정이 아쉬울 때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뻔뻔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상대의 약점을 발견하는 순간 비수를 들이대고 얼굴을 바꾸는 왜구들의 습성.

성난 이리가 되어 날뛰었다.

“물러나라.”

산성을 포위한 왜구들이 잠시 물러나며 숨을 돌리고 있었다.

놈들의 기세는 흉악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라버니…….”

“만덕아, 소연 아씨를 모시거라.”

“네! 도련님!”

곰 같은 우직한 만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그때 소연이 나의 옷자락을 잡았다.

강하게 느껴지는 하나뿐인 누이의 마음.

“여기 있을게요.”

“안 돼!”

“죽더라도 오라버니 옆에 있고 싶어요.”

소연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 허무맹랑한 싸움을 몇몇 안 되는 백성들의 힘으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소연아…….”

“오라버니…… 절 버리지 마세요.”

또로록.

소연이 애처로운 눈물을 보였다.

아침 이슬처럼 맑은 내 누이의 눈물이었다.

‘크으!’

속에서 피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만덕아!!!”

“아씨, 가시지요.”

“오라버니!”

“내…… 반드시 너에게 갈 것이다. 그러니 기다리거라!”

“……오라버니 그 약조 꼭 지켜야 합니다.”

끄덕.

가능하지 않을 줄 알지만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박사박.

누이의 걸음에 맞춰 가죽신 끌리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왜구들의 선봉이 힘찬 소리를 지르며 돌격해 왔다.

끼리릭.

들고 있던 활에 화살을 매기고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피이이이잉!

공간을 가르는 화살.

퍼어어억!

선두에 서서 달려오는 왜구의 이마를 꿰뚫었다.

“오너라! 왜구들아! 나 장현이 너희들을 모조리 저승 길동무로 삼을 것이다!!!”

****

“헛!”

너무나 생생한 꿈을 꿨다.

손에 땀이 흥건하고 이마에도 마찬가지였다.

꿈속에서 난 장현이었다.

고려인으로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가 느끼는 아픈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그의 원과 달리 왜구의 침략으로 산성으로 도망친 장현.

왜구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게 꿈이었다니…….”

화살을 날리던 손끝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성벽을 향해 달려오다 머리가 꿰뚫린 왜구의 표정도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산성에서 맡아지던 음울한 공기 냄새.

왜구들이 풍기는 비린내가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코끝에서 맴돌았다.

“소연…….”

누이라고 했던 소녀의 얼굴도 떠올랐다.

꿈에서 깬 것이 분명했지만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리고 아려왔다.

꿈에서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꿈 같지 않았다.

꿈에서 나 장현이 익혔던 무공도 다 떠올랐다.

회귀한 것처럼 마치 과거를 다녀온 것 같았다.

- 형님. 가위 눌렸어요?

귀신이 황망한 얼굴을 한 날 보며 묻는다.

낯선 방이다.

어제 임성철 회장의 집에서 잠을 잤다.

서유나의 음식 솜씨가 대단했다.

술도 마셨다.

기분 좋게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시아가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

품에 쏙 안겨 내 옷자락을 꽉 잡았다.

꿈속에서 잡았던 소연이의 손 같았다.

“설마…… 소연이……?”

-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자는 동안 내내 소리를 지르던데.

잠도 없는 귀신은 날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 소연이를 애절하게 부르던데…… 누굽니까?

“소연이…….”

이름을 곱씹자 선명하게 떠오르는 꿈속 누이의 눈망울.

갑자기 시아가 보였던 눈망울과 겹쳐 보였다.

“아!!!”

똑같았다.

나를 보며 흘리던 소연의 눈물은 어제 시아가 날 보며 흘리던 그 눈빛의 눈물과 같았다.

- 아니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말씀 좀 해보세요!

귀신이 답답한 듯 물어왔다.

“전생이란 말인가…….”

심장이 쿡쿡 쑤시며 아파왔다.

절망적 상황이 분명한 시점에서 꿈에서 깨어났다.

뒤의 사정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운명의 실타래가 얽혀 있는 게 분명했다.

- 전생요? 형님…… 개꿈 꿨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귀신은 헛소리만 남발했다.

스윽.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손님방에서도 태평양이 훤히 내다보였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다.

하늘 위에는 달과 별, 바다에는 거친 파도에 이는 포말과 등을 단 배들이 점점이 오갔다.

평화로워 보이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오빠…….”

“!!!”

- 어! 뭐야! 시아야!!!

회귀의 전설 2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