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장. 납치.
“국왕은 어찌하여 제국의 부활에 충성을 표하지 않는 것인가! 진정 나의 분노를 확인하고 싶은가!!!”
쩌렁쩌렁 벼락같은 불호령이 터졌다.
“으으으…….”
왕성 보호막이 깨져버린 뒤 근위 기사 및 왕국의 마법사들과 함께 나타난 루베사 왕국의 국왕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8서클 마법사도 함부로 깨부술 수 없다는 마법진을 완성했다.
갈기오 마탑에 거금을 주고 투자한 마법진이 가차 없이 깨져 버렸다.
그 직후 황실수호공작 베커 장 공작.
절대반지를 사용해 황실수호 골드 드래곤 하루케우스를 소환했다.
전설 속에나 있어야 할 드래곤이 현실로 나타나 포효했다.
마법사들은 그 앞에 주저앉았다.
마나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은 그 모습만으로도 마법사들의 마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터지는 당당한 호통.
“명하노니! 네가 거주하는 이 왕궁에 황실의 깃발을 다시 걸라! 이는 크로얀 제국의 부활을 만방에 알리는 조치이자 그대의 충성심을 증명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갑자기 나타나 억지를 부리는 베커 장 공작.
‘저놈이 이토록 강했단 말인가!’
국왕은 섬뜩해졌다.
소문에 강하다 알려져 있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하게 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8서클 마법진마저 가차 없이 파괴할 정도로 압도적일 줄은 몰랐다.
“국왕과 이 왕국을 지켜볼 것이다! 만약 불충한 짓을 저지르면…….”
퍼버버버버버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에 들고 있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마력탄.
내성에 위치한 거대 동상 하나가 박살났다.
“…….”
어느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모두 숨을 죽였다.
‘호오, 임기응변이 대단하군.’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자르반 탑주도 내심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베커 장을 만나기 위해 정보 길드를 실용적으로 이용했다.
청부 길드가 공격을 시도하는 때를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베커 공작을 지켜봤다.
짧은 순간 판단하고 결단을 내려야 했기에 살아온 세월의 눈으로 살폈다.
결정은 빨랐다.
이자에게 행운의 여신이 함께한다는 걸 알아챘다.
7서클 스크롤도 무력화시키고 청부 길드원들을 그 자리에서 박살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8서클 마법사인 자신의 존재 여부까지 알아챘다.
당당하게 검을 들고 협박을 하던 베커 장 공작.
참 멋있었다.
그렇게 맺은 동맹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비밀 무기로 여기는 입장이다.
베커 장은 그사이 자신을 이용해 공작가 하나와 왕국에 크로얀 제국의 위엄을 제대로 보였다.
선제 공포를 선물한 셈이다.
계획은 왕국연합군 결성을 막으려는 수단에 불과했다.
만만하게 볼 때와 달리 자기 본진이 털릴 걸 예상하면 누구도 쉽게 핵심 전력을 비울 수 없게 된다.
특히나 권력욕이 강한 자들일수록 겁이 더 많은 법이다.
그 심리를 잘도 파고든 베커 장 공작.
그가 하는 일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지켜보고 있자니 문득 과거 용병으로 세상을 떠돌 때가 떠올랐다.
마법사들은 일정 이상 경지에 오른 후 정체기를 맞게 되면 드래곤처럼 유희를 떠난다.
정체를 감추고 세상을 떠돌다 보면 대부분 상당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르반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고리타분한 마탑의 마법사가 아닌 세상을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살았다.
용병들과 어울려 걸쭉한 욕도 하고 술과 여자도 흠뻑 즐겼다.
비공식적인 외출이다 보니 두려울 게 없었다.
그때 맛보았던 그 기분이 베커를 만나자 다시 새록새록 느껴졌다.
저 용감하고 무식한 공작은 자신보다 더 거침이 없었다.
더불어 계산도 빨랐다.
기존에 알고 있던 귀족들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자였다.
흥미가 동할 뿐만 아니라 느려터지게 흐르던 피의 흐름도 빨라진 게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생명의 충만감을 흠뻑 느끼게 만드는 베커 장 공작.
보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탑주님. 이만 뺍시다.”
“다 됐나?”
“네. 적당히 쫀 것 같습니다.”
“알았네.”
용병들과 작당하고 지방 영주 성 술 창고를 털 때처럼 매 순간이 흥미진진했다.
“이동!”
파아앗!
짧은 외침과 함께 빛이 터졌다.
동시에 사라져 버린 두 사람.
팰트론 왕성과 가까운 곳에 다시 모습을 보였다.
“하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마법의 신기원을 본 것 같습니다.”
베커 장 공작이 진심 어린 칭찬을 날렸다.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더 기분이 좋아졌다.
“자네도 열심히 100년쯤 구르다 보면 오를 수 있을 것이야.”
“수십 년 내로는 불가능합니까?”
“그건 안 돼.”
“탑주님이 도와주셔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 녀석 봐라.’
자르반은 마탑까지 노리는 베커 장의 속내를 알아챘다.
7서클 장로들 중에서도 딱 한 명만 선발해서 8서클에 진입시킬 수 있었다.
대규모 마나샤워를 비롯해 엄청난 물량이 투입되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마탑에서 8서클 마법사가 한 명밖에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100년 정도 힘을 모아야 가능한 8서클 마법사의 탄생.
거기에 마법사의 재능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 어려운 관문을 베커 장이 욕심내고 있었다.
“마탑에 들어와. 그럼 생각해 보겠네.”
“제가 황실수호공작이지 않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럼 나도 안 돼.”
동맹이나 계약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니었다.
대대로 전승되는 8서클 마법사의 길은 마탑의 근본이자 후대까지 마탑을 지탱하는 생명력이었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포기하는 베커 장.
‘마법사는 아니군.’
다른 마법사들이었다면 냉큼 고개를 처박고 단박에 스승님 스승님 하며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담백하게 오고 간 대화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내용상 엄청난 특혜였다.
“오늘 손해는 다음에 갚아주게.”
“원 플러스 원 허락하지 않았습니까.”
“난 땅 파서 장사하나? 방금 다녀온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아나? 상급 마력석이 소모됐어.”
장거리 이동 마법진을 구축하고도 마탑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다 있었다.
가동할 때마다 마력석 소모가 장난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상단 역시 아직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용이 저렴했다면 굳이 상단까지 필요가 없었다.
“다음에 이자 쳐서 갚아드리겠습니다.”
“난 말로 하는 걸 제일 싫어하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이 곧 정성이라 배웠습니다.”
“하하! 누군지 몰라도 제대로 가르쳤군.”
자르반은 진심으로 베커 장 공작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귀족들처럼 허례허식이 앞선 자가 아니었다.
짧지만 주고받는 대화 속에 필요한 것들이 다 담겨 있었다.
“오늘의 도움은 제국 황실 이름으로 기억해 두겠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는 말고……. 조금만 생각해 주면 돼.”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작게 표시하는 자르반 탑주.
“걱정하지 마십시오. 준 스승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나야 고맙지.”
“황제 폐하 말고는 누구에게도 오늘 만남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지. 나도 마찬가지네. 비밀 외출이라 바로 돌아가야 돼. 마탑에도 첩자 놈들이 득실거려.”
각 마탑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암암리에 첩자들을 키웠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색출하지 않았다.
그들을 통해 역공작을 펼칠 때도 있었다.
“그럼 바쁘신 것 같은데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필요하면 연락하게. 내가 건넨 장거리 마법통신구가 쓸 만해.”
“감사합니다.”
“재미있었네.”
“제가 더 즐거웠습니다.”
“떠나기 전에 충고 하나 해두지.”
“경청하겠습니다.”
“나를 너무 믿지 말게.”
“…….”
“어차피 난 마탑의 주인일세. 자네와 황녀가 강해지지 않으면……. 난 매정해질 수 있네.”
냉혹한 현실을 제대로 각인시켰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어느 현자가 그러더군요. 노력해도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고 말입니다.”
“……좋은 말씀이군.”
“살펴 가십시오.”
“알겠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자르반도 속히 복귀해야만 했다.
공작가와 왕국을 공격한 이들이 마탑주들 중 한 명이라고 합리적으로 의심할 것이다.
마탑에 복귀해 평소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해야만 했다.
오늘의 잠깐 즐긴 유희가 생각보다 더 큰 파장을 만들어낼 건 확실했다.
베커 장 공작이 의도한 대로 당분간 연합군 결성은 늦어질 터였다.
자신들을 보호하던 마법방어막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포심에 사로잡힐 테니 말이다.
‘세상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무료하던 마나의 길에서 맞닥뜨린 베커 장 공작.
자르반은 마지막인 듯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이동!”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
“휴우…….”
긴 한숨이 나왔다.
과거와 달리 이계에 다녀오면 힐링은커녕 힘만 들었다.
아린과 나를 노리는 적들이 차고 넘쳤다.
권력의 최고점이다보니 노리는 자들 역시 왕국과 고위 귀족들이 대부분이다.
그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자르반 탑주는 신이 주신 선물이야.”
운 좋게 마탑의 탑주를 비밀 동맹자로 얻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가 분명했다.
만약 마탑주들이 연맹해 공격해 왔다면 나와 아린도 다른 수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얻게 된 강력한 우군.
기습 공격을 통해 왕국과 귀족들을 한 차례 혼쭐을 내줬다.
그 정도면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어 마법진을 박살내고 모든 백성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협박을 했다.
다른 왕국과 귀족들은 혹시 모를 나의 공격을 막고자 전력을 다할 것이다.
모든 걸 손에 쥔 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죽기 전까지 그것들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한다.
똑똑한 벌침 한 방에 화들짝 놀란 늑대들.
이것저것 방어를 하겠다고 마법진과 안전에 시간을 투자하다 보면 그들이 하나로 뭉치는 시간은 자꾸 뒤로 밀리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국이 유리해진다.”
사방에서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실력 있는 이들의 도움으로 그들은 쑥쑥 성장했다.
드워프와 엘프들이 제작하는 마력무구들로 무장하면 단시간에 전력은 급상승할 수밖에 없다.
“게임 같은 인생이야.”
이계만 생각하면 온라인 게임이 생각난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이계에 다녀온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곳에서 몇 달을 보냈건만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고 상황은 달라진 게 없었다.
몽중몽 같은 이계와 현실.
과거에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한 번도 찾아오지 않다니…… 역시 잡귀는 믿을 게 못 돼.”
노바 형님을 따라간 장립은 그날 이후 날 찾아오지 않았다.
그 특별 교육, 시간 나면 나도 받고 싶다.
노바 형님이 떠나기 전 남긴 교육 자료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내용이 훌륭했다.
“지구는 지구대로 맛이 있어.”
편리한 과학문명이 주는 혜택은 이계에서 누리는 힐링과 비견 됐다.
두 곳 다 나쁘지 않았다.
“대충 일이 정리됐으니…… 이제 졸업 준비를 해볼까.”
어느 정도 대충 일이 마무리됐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몇 년간의 삶.
요 며칠 동안은 평안한 날들 그 자체였다.
학교에 나가서 여동생이나 지인들과 만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교수님들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사업을 시작한 나를 감히 평범한 학생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시국과 법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토론했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과거에는 배울 수 없었던 법학의 심오한 맛.
암기 과목이라 여겼던 법학은 결코 무시할 만한 학문이 아니었다.
사회의 흐름에 맞춰 정치, 경제, 심리, 문화까지 포괄해 성장해 가는 법학은 느릿하게 굴러가는 큰 마차의 바퀴 같았다.
그 맛을 충분히 음미하며 시간을 보냈다.
띠리리리리리릿.
그때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인상이 절로 써졌다.
뭔지 모르지만 예감이 좋지 않다.
띠릿.
통화 버튼을 눌렀다.
“회,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황연태 대표의 떨리는 목소리.
“무슨 일입니까?”
“서련이가…… 부산에서 행사를 마치고 오던 중에 납치를 당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