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장. 교육 보내다(2).
“상황이 심각합니다.”
“각 왕국과 대귀족들이 상단들에 통보했습니다. 앞으로 거짓 황녀와 거래하는 자들은 모조리 국법으로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ⵈⵈ장사를 하지 말라는 소리군.”
“통행세도 올랐습니다.”
“물가도 치솟고 있습니다.”
“각 왕국에서 중요 전쟁 물자를 매입하고 있는 정황도 확인됐습니다.”
유베스 상단의 고위급 상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상인들이 전하는 보고에 상단주 칼몬은 의외로 덤덤한 표정이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 듯 동요가 없었다.
“ⵈⵈ.”
자신들의 보고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칼몬 상단주의 행동에 회의장은 일시에 조용해졌다.
칼몬이 한자리에 소집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렇게 중차대한 문제에 있어 상단주의 결정은 왕명과 맞먹었다.
“상단주님ⵈⵈ.”
최측근 상인이 조심스럽게 칼몬을 불렀다.
다들 속이 타들어갈 판이다.
통행료와 세금이 올라 물건을 팔아도 이윤이 전혀 남지 않았다.
특히 유베스 상단은 각 왕국과 대귀족들에게 단단히 찍혀 버린 상황.
베커 장 공작과 처음부터 연관된 게 문제의 발단이 됐다.
황녀가 팰트론 왕국을 삼킬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부족한 물자를 신속하게 공급하는 일을 도맡았던 것이다.
거기서 얻은 이익은 대단했다.
드워프와 엘프들이 만든 고급 제품들 대부분을 유베스 상단이 독점으로 취급했다.
그 일을 두고 다른 상단의 반발이 거셌다.
베커 장 공작과 아린 황녀가 잘나갈수록 상단에 대한 박해 강도는 심해졌다.
이제는 대놓고 상행을 포기하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허심탄회하게 말들 해보게.”
칼몬이 입을 열었다.
“ⵈⵈ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상행금지뿐만 아니라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왕국 연합군이 결성됐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단주님. 아무리 베커 공작이 대단한 인물이라 해도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버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마탑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갈기오와 사르칸 마탑도 전쟁에 동참할 것 같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상단 역사가 종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상인들이 마음에만 담고 있던 의견을 토해냈다.
대륙은 지금 폭풍전야와 같았다.
왕국과 왕국의 전쟁이 아니었다.
제국을 재건하려는 아린 황녀와 다른 왕국, 그리고 대귀족들이 구성한 연합군의 전쟁이었다.
누가 봐도 판세는 황녀 쪽이 불리했다.
규모 자체가 달랐다.
“엘프가 황녀를 돕는다 해도 그들이 뱉은 맹약으로 인해 전쟁에는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껏해야 황녀를 빼돌리는 정도의 수준일 겁니다.”
“베커 장 공작은 드래곤이 아닙니다.”
“도움을 받았지만 끊어낼 시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상인들 대부분은 황녀의 패배를 모두 다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사리 분별력을 갖고 있는 인간의 판단이라면 당연한 결과였다.
개인의 뛰어난 무력도 다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나?”
칼몬이 상인들의 면면을 살피며 물었다.
“ⵈⵈ그렇습니다.”
“상단주님, 이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결단이 늦어질수록 상단에 큰 피해가 올 것입니다.”
“단주님!”
상인들이 입을 모아 재촉했다.
그때 칼몬이 알 수 없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
갑작스런 미소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상인들이 당황했다.
“난 그대들과 다른 의견일세.”
“네?”
“그러시다면ⵈⵈ.”
순식간에 상인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우리는 제국과 황녀를 따를 것이야.”
“헛!”
“단주님!!!”
“재고해 주십시오! 너무 위험합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상인들이 당황해하며 단체로 반발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후폭풍은 상상도 하기도 싫었다.
“이번이 내 인생의 마지막 큰 도박이 될 것이라 생각하네.”
웃고 있는 칼몬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만큼 결심이 확고하다는 뜻이었다.
“난 황녀님을 따르겠네.”
“ⵈⵈ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들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단주님. 이 말이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ⵈⵈ.”
상인들은 잔뜩 겁을 먹었다.
왕국과 대귀족들이 본보기로 삼을 게 뻔했다.
각국에 뿌려진 유베스 상단 지부 관계자들이 그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질 것이다.
“그래서 결정했네. 오늘 이후로ⵈⵈ 유베스 상단은 모든 공식 상행을 전면 중지할 것이야.”
“!!!”
“그, 그 말씀은ⵈⵈ.”
“긴급하게 상단 물품들을 처분하게. 물가가 치솟아 있으니 팔기에는 여건이 좋을 게야.”
칼몬 상단주는 계획해 놓은 일이 있는 듯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단주님, 그럼 우리는ⵈⵈ.”
“제국으로 갈 것이야.”
“단주님!!!”
“인연 있는 라든 마탑에서 도와주기로 했네. 각자 소속 하급 상인들에게 버틸 수 있도록 넉넉하게 자금을 지원해 주게. 그대들은 일이 끝나는 대로 라든 마탑 마법진을 이용해 소용돌이를 피하게.”
칼몬 상단주의 결정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날 믿게. 난 황녀님과 베커 장 공작에게 우리 상단의 미래를 맡기고 투자했네!”
이글거리는 칼몬 상단주의 눈빛.
그 모습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손해가 막심할 게 분명했다.
자칫하다가는 ‘유베스’라는 전통 있는 상단 이름까지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스윽.
칼몬이 왼손을 내밀었다.
파아앗!
그 순간 반지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유베스 상단을 표시하는 상단문양이 허공에 황금빛으로 뿌려졌다.
“유베스 상단의 당대 주인으로서 내리는 명이네!”
“명을 따르옵니다!”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상단주의 반지.
그렇게 유베스 상단은 칼몬을 필두로 도박을 감행했다.
대륙의 다른 상단들과 달리 모두가 등을 돌리는 쪽을 선택했다.
100 아니면 0의 도박.
의지가 확고한 표정의 칼몬 상단주를 제외한 나머지 상인들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
그가 나타났다.
등 뒤에 은빛 찬란한 후광으로 무장한 채 선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자체 발광되는 은빛 실로 직조된 성자복을 입고 있다.
누가 봐도 세상을 초월한 대성자의 모습이었다.
- 혀, 형님. 이분은 누구십니까?
강렬한 그의 등장에 장립이 당황하며 물었다.
이런 멋진 신을 장립은 처음 마주했다.
알파닥은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인사드려. 큰형님이시다.
- 네? 큰형님요?
장립이 놀라며 그를 보고 의문을 표했다.
지구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큰형님이라는 존칭.
장립 네가 보고 싶어 했잖아.
- 네? 제가요?
장립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가지 않을 터였다.
- 오!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이 아리따운 분은 누구신가?
그가 알파닥이 있는 곳으로 짐작되는 한 방향을 바라봤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알파닥의 외모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나도 보고 싶다. 알파닥 얼굴.
- 진짜 끼리끼리 논다더니ⵈⵈ. 미치겠네. 야! 이계 짝퉁! 너 눈깔 안 깔아? 엇다 대고 음흉한 눈길질이야! 확! 뽑아버릴라!
알파닥이 까칠한 성깔을 드러냈다.
끼리끼리라는 말에 가슴이 찔렸다.
그러나.
- 엇다 대고 우리 큰형님께 큰소리야! 예쁘면 다야? 너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언제 얼굴 믿다가 큰 코 다친다!
- 뭐, 뭐라고?
알파닥이 어이없어했다.
갑자기 속이 다 시원해졌다.
그동안 나에게 온갖 저주를 다 퍼붓던 알파닥이 쪽수에서 밀리고 있었다.
- 하하하하하하. 우리 막냇동생 화끈해서 마음에 들어.
- 큰 형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지구에서 온 장립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 반갑네. 난 노바 대공이라고 하네.
- 아! 대공이셨군요.
장립은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카사노바가 지금 눈앞의 존재라는 걸 전혀 몰랐다.
둘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분위기가 좋았다.
장립을 떨쳐놓을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나와 임성철 회장과 삼인행으로 묶인 장립은 내 마음대로 정리할 수 없었다.
그와 운명이 하나로 엮여 버렸다.
장립이 스스로 떠나지 않는 한 그를 떨쳐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들이 짜놓은 법칙이었다.
둘의 통성명에 입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여기서 마무리!
립 동생. 여기 형님이 그분이야.
- 네? 그분이라니요?
장립이 의아한 듯 날 쳐다봤다.
아직도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유추하지 못했다.
립! 네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위인께서 바로 눈앞에 계신다니까!
- 가장 보고 싶다는 위인이라면ⵈⵈ. 헉! 설마 노바가 그 노바 형님이십니까!
장립이 경외에 찬 시선으로 카사노바 형님을 봤다.
창조주를 마주한 듯 극도의 경외감이 시선에 담겼다.
- 큼큼.
노바 형님이 헛기침을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쪽팔릴 순간이지만 그는 나도 존경할 만큼 진정한 멘탈의 승리자였다.
- 큰! 혀여여여여영님! 진심으로 존경하옵니다!
장립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았다.
나도 처음 본 극상의 예.
- 허허. 막냇동생이여. 일어나거라. 내 너를 흡족히 여기노라.
노바 형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립이 하는 행동을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죽이 잘 맞는다.
- 지랄뻔뻔들 하세요. 하아.
알파닥이 그 모습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쪽팔렸지만 참았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형님! 제 동생은 이계가 처음입니다. 교육 확실히 부탁드립니다!
- 그래? 그럼 내가 A부터 Z까지 완벽하게 교육시켜주겠네.
- 무조건 형님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장립이 흔쾌히 동의했다.
하아!
3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다.
말이 좋아 교육이지.
노바 형님을 따라가는 순간 지구와는 영영 안녕하게 될 것이다.
장립이 원하는 무릉도원이 바로 노바 형님이 살고 있는 곳이다.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동생 잘 가라. 많이 배워서 꼭 이 형에게 돌아와.
보고 싶을 거다!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로 기쁨을 대신하고 위로를 가장했다.
- 형님ⵈⵈ.
갑작스러운 이별에 장립이 눈물을 보이려 했다.
- 멍청한 거야?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거야? 아니면 멍청이가 돼가는 거야?
알파닥의 어이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냉정한 그녀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형님! 제가 일이 좀 바빠서ⵈⵈ.
- 그래! 걱정 말고 쉬고 있어. 지금부터 막냇동생 꽃길 보여주러 감세!
신이 난 노바 형님.
흐흐흐.
입이 찢어지려는 걸 겨우 참았다.
- 형님! 동생 그럼 교육받고 오겠습니다!
꾸벅 인사도 잊지 않는 장립.
파아앗.
순식간에 짧은 빛을 남기며 노바 형님과 함께 사라졌다.
“크크크크.”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웃음.
“베커? 무슨 일 있어요?”
품에 안겨 있던 아린이 또 물어 온다.
“너무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아.”
“왜요?”
“그야ⵈⵈ. 당신이 곁에 있잖아.”
“아ⵈⵈ.”
사르르륵.
부끄러움을 타며 아린이 품에 안겨왔다.
그녀를 힘주어 가슴 가득 안았다.
- 야! 이 바람둥이 쓰레기! 내가 경고했지! 이곳에 함부로 쓰레기 투기하지 말라고!!!
오늘따라 알파닥의 욕도 정겹게 들린다.
언제나 풀리지 않는 끈처럼 따라붙었던 장립 잡귀로부터의 해방.
오늘따라 이계 공기가 너무나ⵈⵈ 깨끗하고 상쾌했다!
회귀의 전설 2부
새로운 시대.
“탑주님. 다른 마탑들과 여타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연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대륙 중앙에 위치한 거대 산맥의 입구에 위치한 라든 마탑 도시령.
엄청난 높이의 탑 상부층에서 탑주가 발아래로 펼쳐져 보이는 광경을 내려다봤다.
수천 년간 지속된 건축으로 이 자리에 우뚝 섰다.
몬스터가 들끓던 벌판을 정복한 초대 마탑주는 제자들과 함께 이 거대한 마법 도시를 세웠다.
상주하는 인구가 100만을 넘었다.
제국 이전 시절부터 공작령만이 땅을 마탑의 이름으로 소유했다.
말이 마탑이지 웬만한 규모의 백작령과 다를 바 없는 크기다.
그런 위대한 역사의 땅의 주인인 자르반 라든 마탑주가 한 장로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라든 마탑은 탑주가 되는 동시에 제 성을 라든으로 바꾸어야 했다.
8서클에 오른 대마법사이자 마탑주만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이었다.
100만 명이 넘는 마법사와 주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그가 고심에 빠졌다.
“곧 겨울이 오겠어.”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맥들을 쳐다보며 자르반 탑주가 괜히 계절의 변화에 대해 언급했다.
대륙에 몰아칠 폭풍한설을 예견하는 듯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유난히 더 추울 것 같습니다.”
장로가 자르반 탑주의 말뜻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우리야 따뜻하게 지내겠지만 저들은 어찌할지.”
다른 마탑과 달리 라든 마탑은 소속 주민들을 더없이 인간적으로 대했다.
마탑 마법사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이 공존이었다.
라든 마탑 출신 마법사들은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마법을 연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욕망이 넘치는 자들은 대부분 타 마탑을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세력은 강하지 못했다.
공격적 성향을 갖고 있지 않아 세력 확장에 관심이 없었기에 생긴 결과였다.
자기 땅에서 소소하게 마법을 탐구하는 진정한 마법사들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곳이 지금 위기에 봉착했다.
긴 세월 동안 마탑을 유지해 오며 쌓아온 법 관련 지식의 양이 엄청났다.
권력과 물질 지향 중심인 다른 마탑이 대놓고 탐을 낼 정도였다.
안정된 제국 시절에는 이런 위기가 없었다.
마탑들을 누르는 황실의 권위가 이들의 보호막이 돼 주었다.
하지만 작금은 사정이 달랐다.
마법사들을 빼가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공공연하게 마법서들도 유출됐다.
“갈기오와 사르칸이 손을 잡았다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탑주님.”
“……마나의 길을 부끄럽게 만드는 자들이다.”
제국 적통을 주장하는 황녀를 인정하지 않는 마탑과 다수의 왕국들.
라든 마탑까지 그들의 마수가 언제 뻗칠지 알 수 없었다.
“유베스 상단을 돕기로 결정한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 신의라는 건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유베스 상단은 그동안 우리 마탑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신의를 지켜왔다.”
자르반 탑주의 음성은 굳건했다.
“선택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각 왕실뿐만 아니라 황녀 쪽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마탑은 그 자체가 한 왕국의 국력을 넘어선 수준에 이르렀다.
라든 마탑의 선택 또한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과거 라든 마탑은 다른 마탑들보다 제국 황실과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었다.
제국 황실 마탑과 교류하며 마법사를 공급하고 지식을 공유했던 라든 마탑.
당시에도 철저하게 요주의 단체로 찍혔다.
“만나보면 알겠지.”
“직접 가실 예정입니까?”
“이 일은 그대만 알고 있으라.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할 것이다.”
“명을 받드옵니다.”
위대하고 경이로운 8서클 마법사 탑주의 명령에 장로가 고개를 숙였다.
‘베커 장 공작……. 날 실망시키지 말게.’
자르반 탑주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대륙에 불어 닥친 폭풍의 중심에 선 존재.
마족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그를 만나야 할 때가 왔다.
동시에 마탑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순간이기도 했다.
***
“어전회의를 개최하세요.”
“황명을 받드옵니다!”
팰트론 왕국 왕성에 위치한 대회의장.
단숨에 대장을 잡아 족쳤기에 파괴된 시설이 거의 없었다.
국왕과 왕세자가 죽자 그들을 따르던 모든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전의를 상실했다.
그 기세를 몰아 왕성에 특별 부대를 파견해 점령했다.
혹시 모를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계획대로 모든 걸 그대로 흡수했다.
팰트론은 임시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오랜 역사를 이어온 왕성답게 격이 높았고 또 아린과도 잘 어울렸다.
미스릴과 황금으로 만든 황관을 쓴 아린이 황좌에 앉아 회의를 주도했다.
난 그녀가 앉은 황좌 바로 옆에 섰다.
황제 다음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황실수호공작은 무력을 소유한 재상과 같았다.
그런 나의 아래로 쭉 이어진 회의장 회랑.
공작부터 시작해 작위 순서에 맞게 귀족들이 착석했다.
몇 년 사이 귀족들의 수가 꽤 늘었다.
여기저기서 황가 복원의 기치를 앞세운 기사들도 몰려들었다.
팰트론 왕국의 불충한 이들로부터 빼앗은 마력갑옷과 무구들로 무장했다.
물론 그들 모두를 다 믿지는 않았다.
정신계 마법 탐색에 동의한 자들만을 우선 수하로 받아줬다.
정보부를 가동해 평판과 평소 성향을 낱낱이 파악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능력만 있다고 제국의 귀족으로 받아 줄 수는 없었다.
자라스 백작처럼 어느 틈에 뒤통수칠 놈들이 또 나타날 수 있었다.
아린이 재건할 제국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과 같았다.
기존에 이곳 대륙을 오염시켰던 인간들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 내가 추구하는 목표였다.
이곳만의 귀족체계를 무너트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인격 보호장치는 가동되도록 조치를 할 것이다.
내 집 한 칸 마련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웃으며 빵 한 조각이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사회.
백성들은 물론 기사들마저도 자신들의 욕망에 의해 일어나는 전쟁이 아닐 것이다.
몬스터들과의 싸움만으로도 이곳 사람들은 충분히 인생살이가 벅찼다.
그들에게 인간과 인간이 죽이는 전쟁까지 감당하게 하고 싶지 않다.
전쟁이 없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난 아린 옆에 섰다.
“왕국연합이 결성됐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확실한가요?”
아린의 잔잔한 목소리가 웅장한 공간을 울렸다.
음성에 담겨 있는 권위가 생생하게 살아서 전체 공간에 퍼졌다.
마법사를 보다보니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그녀.
내 옆에서는 한없이 밝고 귀여운 한 여인에 불과했지만 지금 모습은 영락없는 황제의 자태였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여러 왕국과 대귀족들이 손을 잡고 연합군을 결성했사옵니다.”
카이루 후작이 차분하게 보고했다.
어차피 제국 건설을 위해서는 한 차례 지나가야 하는 길이었다.
전쟁 없는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필연적 전쟁.
“연합군이 밀어닥치면…….”
아린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시간이 남아 있사옵니다.”
“얼마 정도의 시간을 말하는 건가요?”
“왕국이 안정화 됐다지만 전력을 모두 뺄 수는 없습니다. 곧 겨울이 찾아옵니다. 몬스터들이 준동하는 동안에는 그들도 연합군을 가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서로를 믿지 못해 여러 조약들을 체결하고 안전장치까지 마련하자면……. 최소 1년 정도는 시간이 걸릴 것이옵니다.”
이 대륙의 정치에 있어서 빠삭한 카이루 후작의 판단이 맞을 것이다.
연합군이라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할 게 빤했다.
나와 아린을 제거하기 위해 잠시 한몸뚱이처럼 뭉쳤지만 서로가 적이라는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시간이 부족하군요.”
팰트론 왕국을 가볍게 삼켰지만 영지 안정화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이야 언제든 충원이 가능했지만 실력자들을 채우는 건 하루 이틀로 될 일이 아니다.
찾아오는 방랑 기사들 수준 역시 그렇게 높지 않았다.
왕국 연합군까지 결성됐다고 하면 찾아오는 방랑 기사들도 더 줄어들 것이다.
상식적으로 누가 봐도 상대가 안 되는 전력 차이였다.
“상단들도 은밀히 철수하고 있습니다.”
새로 임명된 재무대신 오트론 백작이 상단 철수를 언급했다.
“……안타깝군요.”
“유베스 상단만이 계속 남을 것 같습니다.”
인연이 깊었던 유베스 상단이 우리 쪽에 선 듯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영향력은 미비했다.
국경과 국경을 넘나들지 못하는 상단은 크게 힘이 되지 못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물자가 넉넉한 편입니다. 전략물자 또한 부족하지 않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아린에게 넌지시 위로의 말을 던졌다.
팰트론 왕국은 의외로 주변에 곡창지대가 많았다.
이 정도면 식량은 자급자족하고도 남았다.
전쟁물자야 엘프와 드워프들을 쪼면 됐다.
문제는.
“마탑 움직임도 수상합니다.”
카이루 후작이 예민한 얘기를 꺼냈다.
“그들도…… 뭉쳤나요?”
“아마도. 그런 것 같사옵니다. 평소와 달리 갈기오와 사르칸 마탑 마법사들이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종의 계약을 맺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법사들이 은근히 사악했다.
공부 잘하는 쫌생이에 사이코 기질까지 품고 살았다.
또 오만하기는 유별날 정도였다.
이쪽 대륙 갑질 전문가들인 마법사들도 한데 뭉쳤다.
그들이 뭉친 데는 딱 한 가지 목적이 있었다.
나와 아린을 노렸다.
“그럼 연합군과 마탑이 뭉칠 수도 있겠군요?”
“적어도 그렇게 될 것 같사옵니다.”
“아…….”
아린이 짧은 신음을 터트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수였다.
발돋움하는 제국의 싹을 짓밟겠다는 왕국과 마탑의 야심찬 계획.
그들은 나와 아린이 눈엣가시처럼 생각될 것이다.
제국이 부활하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존재들.
이쪽 대륙 기득권 세력들의 반발이 장난 아니다.
“폐하, 그 부분도 예상했던 바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한 번 더 아린을 다독였다.
사실 나도 약간은 두렵다.
내 몸이 여러 개도 아니고 왕국 연합군과 마탑이 휘몰아쳐 오면 담담하게 감당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미래가 어둡다고 덤벼보지도 않고 미리 주저앉을 수는 없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아린은 엘프들이 구명해 줄 것이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경호를 서 주기로 했다.
“공작 각하. 적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과소평가하는 게 더 위험합니다.”
카이루 후작이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왔다.
“알고 있습니다. 절대 만만하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신데 어찌…….”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그들을 꼼짝 못 하게 묶어놓을 자신이 있습니다.”
“네? 몇 년요?”
“???”
다들 의이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21세기를 살다온 나와 이들의 사고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기기묘묘한 술수들이 판치는 21세기 지구.
이곳에서 나오는 공격방법과 대책들은 정규 교육을 받고 삼국지만 대충 한 번이라도 훑어 본 이들이라면 다들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의 대응 방법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계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그 방법은 비밀이니 다들 더는 궁금해하지 마십시오.”
씨익 웃으며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
의문 가득한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껏 보인 무력은 저들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 넘었다.
“황실수호공작을 믿겠습니다.”
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따뜻한 시선.
“경들도 공작님 말씀을 내 명처럼 따라주세요.”
아린의 공식적인 선포.
“황명을 받드옵니다!”
두 말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몬스터들 출몰이 빈번하다던데…….”
계속 이어지는 어전회의.
아린과 귀족들의 대화가 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
나는 회의를 주도해가는 아린을 보며 훌쩍 성장해가는 그녀의 모습에 흐뭇해져 미소 지었다.
두두두두두두두두.
하루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말을 타고 내달렸다.
이곳에서 말 타는 재미는 지구에서와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쏠쏠했다.
하루 대부분이 막히는 서울 도심의 드라이브와는 맛이 달랐다.
활짝 열린 길을 따라 거침없이 말고삐를 당기며 질주했다.
“이럇! 이럇!”
왕성을 벗어나면 바로 한적한 시골길이 나타났다.
넓은 들녘 사이로 뻗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옹기종기 앉은 마을이 나타났다.
최근 들어 이곳에서 맛집을 발견했다.
여행객들이 쉬어가는 주점에서 맛보는 맥주.
책을 통해 알고 있던 중세 시대의 걸쭉하고 시금털털한 맥주와 많이 달랐다.
지구의 맥주처럼 불순물이 깔끔하게 제거되어 제공됐다.
대신 알코올 도수가 꽤 높았다.
동네 강가에서 갓 잡은 물고기와 근처에서 딴 야채, 고기들이 조리되어 메뉴로 제공됐다.
한마디로 오염되지 않는 자연의 맛 그 자체.
소금 간이 전부였지만 가벼운 맥주 안주로 제격이었다.
말을 타고 달리다 목마르면 한 잔 마시는 맥주가 취미가 되고 있었다.
이제는 동네 사람들도 날 알아볼 정도다.
그들은 아직까지 내가 귀족인 걸 몰랐다.
이곳에 오기 전 기사나 귀족 상징인 고급 망토는 꼭 아공간에 넣었다.
평범한 복장으로 환복한 후에 마을에 들어섰다.
400여 가구 정도가 모여 있는 마을은 낮은 목책 울타리 하나도 없었다.
왕성이 가까워 치안 문제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따각따각.
마을 안으로 들어오면 최대한 조용히 말을 몰았다.
“오늘도 오는 거야?”
“귀한 집안 자제 같은데…….”
“진짜 잘생겼단 말이야.”
동네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는 날 보며 수군거렸다.
이제는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처녀들도 여럿 보였다.
황실수호공작이 나인 줄 모르는 그들을 유유히 지나쳐 마을 안에 있는 유일한 주점으로 들어갔다.
왕성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쉬었다 가는 주점.
상단의 마차들은 속도가 느리다 보니 왕성까지 가자면 이곳에서 하루 정도는 더 가야 했다.
“나으리 오셨습니까!”
말을 봐주는 주근깨 소년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부탁한다. 건초 듬뿍 알지?”
“넵! 나으리!”
“나으리 아니라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나으리는 누가 봐도 귀한 집 나으리가 맞습니다. 제가 마구간에만 몇 년 동안 있었지만 나으리들은 다 나으리 같으십니다.”
눈치 빠른 소년.
틱.
동전 하나를 던졌다.
“고맙습니다!!!”
이곳에서 빵 몇 개를 사먹을 수 있는 동전이었다.
동전을 받아들고 소년이 정수리가 땅에 닿도록 깊숙이 인사를 했다.
소년을 뒤로 하고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요.”
불룩하게 배가 나온 중년 남자가 들어서는 나를 보며 반겼다.
“맥주와 안주는 알아서 주십시오.”
“오늘 닭을 잡았습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지만 잘 튀겨오겠습니다.”
치맥은 어느 곳에서나 진리.
그르륵.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
미세한 기운이 예민한 나의 감각을 건드렸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