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장. 새로운 계절(2).
“사무실?”
“네. 아버지. 서울에 사무실을 얻었으면 합니다.”
“그래. 네가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지.”
‘며칠 사이에 확 변했구나.’
아들을 바라보는 남자는 흐뭇했다.
자신에게 많은 걸 감췄지만 피는 못 속이는 법이다.
공항에서 초면인 정혼자에게 바람을 맞은 아들.
놀랍게도 평소 보이지 않던 행동을 하고 일을 벌였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만났다던 여성과 뜨거운 밤을 보냈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놀라운 변화였다.
지금까지 여자와 관련된 문제는 전혀 만들지 않고 이성관계도 모르고 살아왔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옆에 접근해 오는 여성들 모두를 물리쳤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한국에 오자마자 파격적으로 행동했다.
그러고 보니 눈빛도 변했다.
평소 선한 빛이 흐르던 눈동자가 기이한 열망으로 물들었다.
초콜릿과 사탕을 처음 맛본 아이처럼 이성과의 달콤한 맛에 눈을 떴다.
남자는 그런 아들의 변화를 보며 만족했다.
선한 자가 타락의 길로 들어서면 더 큰 어둠이 되는 법.
모든 바람들이 예견대로 흘러갔다.
“사업을 크게 하고 싶습니다.”
“쓸 만한 빌딩이 있다. 그걸 주마.”
세상에 둘도 없는 선한 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남자의 재력은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들었다.
동원할 수 있는 능력까지 다 합치면 대통령도 부럽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뭘 할 생각이더냐?”
“전공을 살려 인수합병 및 투자 업체를 운영해 볼 생각입니다.”
미국 명문대에서 경영 관련 박사 학위를 받고 온 아들이다.
뜻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눈에 가득 담겼다.
늦게 개화됐지만 발아 속도가 남달랐다.
“자금도 줘야겠구나.”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래. 남자가 사업을 하고자 하면 돈은 많을수록 좋지.”
남자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돈이야 넘치고도 남을 정도로 많았다.
“여러 중요 정보도 필요합니다.”
“하하. 아버지를 만능 재주꾼으로 알고 있구나.”
“네. 전 아버지를 믿습니다.”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가 가득한 아들의 눈동자.
‘이 녀석 눈치를 채고 있었어.’
아들은 남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똑똑했다.
그동안 전반적인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눈을 감고 있었던 부분이 많은 듯했다.
“고맙다. 아버지를 믿어줘서.”
남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봐라.”
“장태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흐음ⵈⵈ.”
장태산이라는 말에 남자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장태산은 쉽게 어떻다고 언급할 만한 놈이 아니었다.
아들의 지금 심정은 이해했지만 아직 장태산을 상대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강한 녀석입니까?”
“맞다.”
“그래요ⵈⵈ.”
호기심을 보이며 투지를 더 불태우는 아들.
“손유리 때문이더냐?”
“반쯤은 그렇습니다.”
“그럼 나머지 반은?”
“직접 봤는데 재밌는 사내 같아서요. 뭐랄까? 보는 순간 불꽃이 튀기는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네 적이 될 녀석이다. 이 아버지도 섣불리 어찌할 수 없는.”
남자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알면 알수록 장태산의 능력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특별한 무공을 수련한 듯 신체적 조건도 좋았다.
신광을 처리해 버렸을 만큼 영적 측면에서도 보통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권력 면에서도 마찬가지.
한국의 왕이라 불리는 자신을 훌쩍 뛰어넘어 세계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렇기에 처리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무너뜨리겠습니다!”
아들이 자신감을 내비쳤다.
“아직은 위험해.”
“아버지가 도와주십시오.”
아들의 결심은 확고해 보였다.
외골수적인 측면이 강한 아들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얼굴 한 번 안 봤던 손유리를 평생 배필로 삼고자 마음먹었던 아들이었기에 더욱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그만큼 빠르게 변했다.
완벽하게 장태산을 적수로 인식했다.
스스슷.
아들의 몸에서 은근히 풍겨 나오는 검은 오라.
‘각성 중이다!’
남자는 이번 일이 아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알았다.
알을 깨고 나와 진정한 자신의 후계자로 변신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는 아들.
한 번 제대로 부딪혀 깨져보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뒤에서 든든하게 커버해 준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암! 도와줘야지. 세상에 하나뿐인 내 아들인데!”
남자는 아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감사합니다!”
아들이 그제야 부드러운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유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혼처도 있다.”
손대균을 잡아두기 위해 그의 딸이 필요했다.
물론 손유리 자체도 며느릿감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아들이 싫다고 하면 미련 없이 정리할 수 있었다.
어차피 개인의 정신쯤이야 집안사람이 되는 순간 개조하면 그만이다.
“손유리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버려도ⵈⵈ 제가 버립니다!”
아들은 다시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집념을 드러냈다.
손유리는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행동했겠지만 분명 실수를 한 것이다.
두 부자의 몸에 흐르는 지독함.
막상 당해봐야 그 맛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남자는 기꺼이 허락했다.
그깟 계집 하나 어찌 된다고 세상에 달라질 건 없었다.
손대균이 저항하면ⵈⵈ. 그놈의 목도 치면 그만이었다.
***
치이이이익.
갓 도축되고 남은 싱싱한 막고기들이 연탄불에 맛있게 구워졌다.
후추가 가미된 굵은 소금만이 대충 뿌려졌지만 고소한 냄새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아무리 먹어도 이 녀석만 한 고기가 없습니다.”
서비스로 받은 껍데기가 노릇하게 구워지자 집게와 가위로 고기를 자르는 양우석 의원.
야밤에 나를 불러냈다.
“야! 오늘 내가 쏘는 거니까 많이 처먹어라!”
“소고기도 아니고 막고기가 뭐야! 부장으로 승진했다는 놈이!”
“흐흐흐. 이것도 우리 마님이 큰마음 먹고 내리신 하사품이야. 그냥 처먹어.”
“그래! 짠순이 제수씨를 위하여!”
“위하여!”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들이 불콰하게 취해 연신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게 뭐야? 삼겹살도 아니고 막고기라니ⵈⵈ.”
“한 번만 먹어봐. 진짜 죽인다니까.”
“싫어!”
“이게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날 위해서?”
“진시황 알지? 만리장성 쌓았다던.”
“응.”
“이 돼지 껍데기가 전설의 진시황이 즐겨 먹던 건강식품이었다는 건 모르지?”
“진시황이 이걸 먹었다고? 맛있는 것도 많은데?”
“등소평이라는 중국 주석도 돼지 껍데기 마니아였어.”
“왜?”
“사람 피부층 성분인 콜라겐이 가장 풍부하게 들어가 있는 고기가 바로 이 돼지 껍데기야. 나도 이런 거 먹기 싫지만 은미 널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야. 요즘 스트레스로 피부 트러블이 심하다며? 한 번 먹어봐. 맛이 없거나 효과가 없으면 다음에 안 오면 되지.”
“정말? 그런 깊은 뜻이 있는 거야?”
“고럼! 오빠 한번 믿어봐. 자! 다 구워졌다. 아! 해봐.”
사기꾼 기질이 농후해 보이는 남자가 오늘 밤을 위해 저렴하게 데이트 비용을 아끼는 모습도 보였다.
마장동 허름한 주먹 고깃집에서 펼쳐지는 인생의 축소판 그림.
소주 한 잔과 고기 한 점에 웃음꽃을 피우며 고단함을 달랬다.
그리고 여기 바로 눈앞의 사내도 고기와 소주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고 있었다.
“수당도 많으신 분이 서민 코스프레를 즐기십니다.”
“코스프레가 아니라 현 상황이 그렇습니다. 국민이 주신 녹봉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마누라와 새끼들도 키워야 하지. 지역구 관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것저것 경조사 챙기면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점점 진짜 의원이 되어 가십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양우석 의원이 씨익 웃었다.
좋은 징조다.
초선 때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민낯에 철판을 한 겹 용접한 듯 감정을 바로 드러내지 않았다.
눈빛도 묵은 맛이 났다.
2선 국회의원의 관록도 무시 못 했다.
입도 무거워졌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말을 줄여야 실수도 적어진다.
한 번 뱉은 말로 잘 쌓아온 정치생활이 끝장나 버리는 이들이 많다.
“허심탄회하게 말해 보십시오.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양우석 의원과는 생각보다 자주 어울리지 못했다.
통화도 일절 없었다.
국정원을 비롯해 곳곳에 감시를 위한 정보원들이 깔려 있었다.
그만큼 꼬투리가 잡히면 물고 늘어질 자들이 많다는 소리다.
“회장님 뵙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거짓말이다.
바쁜 국회의원이 날 보고 싶어 할 까닭이 없었다.
“스트레스가 많으십니까? 머리숱도 빠지신 것 같고.”
“요즘 탈모가 시작됐습니다. 되는 일은 없고 당은 시끄럽고 권력자들은 여전히 서민들은 안중에도 없으니 속이 타들어갑니다.”
내우외환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여당은 승승장구했다.
다수석을 차지하고 이것저것 걸렸다 하면 막무가내 밀어붙였다.
힘껏 견제해야 할 야당은 지리멸렬 힘을 쓰지 못했다.
지역구를 기반 삼아 기생충처럼 버티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시대정신을 거스르며 자기만 살겠다고 옛 벗들을 배신한 자들.
아직도 그들의 미래는 밝기만 했다.
교묘하게 지역 이기주의를 부추겨 그 힘으로 살아남는다.
배지 하나 달겠다고 동료의 등에 서슴없이 칼을 꽂는 일도 다반사다.
“집안이 시끄러우니 되는 일이야 당연히 없을 테고, 당은 곧 쪼개질 것이니 잡음이 나는 것도 필연이고ⵈⵈ. 서민들 위하는 일이야 여당은 진작부터 손을 놓은 일이니 기대하면 안 되죠.”
“요즘 애들 말로 팩트가 지리십니다.”
양우석 의원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2선 국회의원이 됐을 당시만 해도 의욕이 넘치던 모습이 많이 가라앉았다.
힘없는 야당 국회의원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법안을 만들어도 통과가 되기 힘들었다.
아무리 법안이 그럴싸하게 좋아도 여당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우선인 자들이었다.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나면 겨우 하는 시늉을 할 뿐이다.
그것도 이제는 먹히지 않았다.
국회 핵심권력층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 친위대인 친조계 의원들이 상원 노릇을 했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속 터지는 국회의원들의 작태.
그걸 견제해야 할 야당 의원들은 본격적으로 분열 위기에 처했다.
야당인 척했지만 근본적으로 여당에 가까운 의원들이 철새들과 야합했다.
벌써 시작된 2016년 총선 준비.
“좋은 현상입니다.”
“네?”
“쓰레기들이 알아서 자발적으로 분리수거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표가 분산되면ⵈⵈ 더 어려워집니다. 회장님도 짐작 못 할 정도로 정치판이 복잡합니다.”
복잡한 거 나도 안다.
하지만 난 미래에서 다 겪고 왔다.
야당이 죽을 쓸 때 여당은 옥쇄 파동으로 총성 폭풍이 된다.
잠깐 죽도 밥도 아닌 정당이 득을 보지만 4년 후에는 대부분 사라진다.
국민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바보도 아니다.
잠시 현혹되긴 하더라도 냉정하게 형세를 파악해낸다.
보기보다 더 똑똑한 대한민국의 국민들.
난 그들을 여전히 믿는다.
“다음 총선은 분리수거 기간입니다. 길고 넓게 보십시오.”
“그러다 쪽박 차면ⵈⵈ.”
“밥값 넉넉하게 드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권자들을 믿으십시오. 묵은 옷을 벗어던지는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계절ⵈⵈ.”
양우석 의원이 ‘새로운 계절’이라는 말을 읊조렸다.
아직 피부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형 사건이 곧 터진다.
몇 년 남지도 않는 세월.
낚시꾼의 심정으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다 구워진 것 같은데 한잔하시죠.”
“회장님 친절하게 고기도 잘 구우십니다.”
“저도 장가 가야죠.”
“정말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흐흐흐. 여의도에도 회장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양우석 의원이 눈웃음을 치며 말한다.
“여의도에요? 무슨 소문 말입니까?”
귀가 쫑긋했다.
나도 궁금한 나에 관한 소문.
“카사노바를 형님으로 모시는 선수라고 하더군요.”
“어? 그건 진짜 비밀이었는데. 그게 거기까지 소문이 났다고요?”
“???”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