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1장. 찐 꼰대(2).
“대표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 채무가 모, 모두 상환됐습니다! 은행권과 사채 시장에 내놨던 어음은 물론 일체 모든 채무가 변제됐습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재무이사가 막무가내 소리를 쳤다.
평소라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오늘은 아성대 대표가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 전부 다?”
믿기지 않는 소식에 묻고 또 물었다.
“네! 대표님! 깨끗하게 상환되었습니다!”
“오! 신이시여…….”
털썩 탄성을 지르며 아성대 대표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그동안 마음 고생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작고하신 아버지는 항상 유념하라며 말씀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며 무리하게 사업 확장하지 말고 좋은 먹거리 만들기에 매진하라고.
사업가로는 젊은 축에 들었던 아성대는 당시 아버지의 말을 흘려들었다.
대가는 호되고 아팠다.
3대째 무리 없이 이어져 내려오던 가업이 본인 대에서 송두리째 무너질 뻔했다.
“정말 LOR 투자법인 대단합니다! 위임 업무에 도장 찍자마자 이렇게 파격적으로 뒤처리를 해내다니……. 번개가 따로 없습니다.”
재무이사는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실사가 끝나자마자 저녁에 연락이 왔다.
변호사를 대동한 채 재무개선 일체를 포함한 위임 계약이 체결됐다.
전광석화였다.
현재 오양식품은 보유 자산보다 채무가 더 많았다.
동아줄을 붙잡듯 계약을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못했다.
사기꾼들이 난장판을 쳐 놓은 부분이 많아 쉽게 수습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 만에 기적을 만들어 냈다.
아침 일찍 은행 문이 열리기도 전에 일을 처리한 듯 모든 채무를 빠르게 대위 변제했다.
가장 끔찍했던 사채 쪽 채무도 마찬가지였다.
어음을 비롯해 담보로 잡혀 있는 주식에 대한 채무가 완납됐음을 통보받았다.
하이에나 같은 놈들의 발톱이 모두 빠졌다.
“아빠!!!”
아유라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도 소식을 들은 모양인지 많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유라야! 살았다 살았어! 모두 다 네 덕분이다!”
반신반의했던 아성대는 딸을 보고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정말 다행이에요…….”
또로록.
갑자기 아유라가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보면 자신 때문에 시작된 불행이었다.
무리한 욕심이 불러온 사업 확장은 준비되지 않은 만큼 독이 되어 돌아왔다.
“그분 한 번 만나 보자.”
“네?”
“장태산 대표, 아니 회장님 말이야!”
아성대가 장태산을 부르는 호칭이 완전 바뀌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쉽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문만 무성했던 장태산 회장의 저력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하룻밤 만에 거침없이 무너져 내렸을 중견기업을 기적처럼 회생시켰다.
대그룹도 선뜻 나서서 실행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들은 덩치만큼 행동이 굼떴다.
하지만 장태산은 확실히 달랐다.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단숨에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돈키호테 같은 장태산.
‘유라에게 관심 있는 게 확실해. 그렇지 않고서야…….’
아성대는 흐뭇한 시선으로 딸을 바라봤다.
잘 자라준 딸 열 아들 부럽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요즘 방황하는 아들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가업을 잇는 데는 이제 아들 딸 구분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됐다.
딸도 엄연히 아씨 집안의 핏줄.
아성대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장태산과 함께라면 오양식품이 세계적인 식품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몽상.
***
‘이런 놈 밑에서 뭘 배울 게 있다고…….’
황승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장주희가 자신보다 낫단 생각이 퍼뜩 들었다.
뿌리 깊게 내려오는 선배 의사들의 갑질에 일개 폴리클이 저항했다.
아직 의사도 아니고 학생인데도 불의에 굴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
장주희를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용기가 생겼다.
펠로우급인 자신을 레지던트 취급하는 신상주가 벌레처럼 보였다.
한때는 실력을 인정할 만한 교수가 분명했지만 지금은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으로 타락했다.
몇 번의 심장 수술을 실패한 후 다른 과목으로 바꿔간 것만 봐도 그렇다.
동료 의사들은 그가 변심한 진짜 이유를 대부분 알고 있었다.
수술 뒤에도 부담이 적은 간담 췌장과에 숨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치적 술수가 남다르다 보니 외과 과장 자리에서 다시 부원장을 노렸다.
냉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황승재 역시 알면서도 참고 동조했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미래를 위해 숨을 죽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이 돌아왔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들이라는 선물과 함께 말이다.
책임져야 할 가족 구성원이 생긴 만큼 떳떳하게 살고 싶어졌다.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아들, 죽다 살아난 그 아들을 보며 황승재는 다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멋진 의사 아빠가 되겠다고 말이다.
그런 황승재에게 신상주 교수의 갑질은 참을 수 없었다.
병원의 암세포 같은 자였다.
외과가 점점 엉망이 돼 가고 있는 이유가 다 여기 있었다.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듯 다른 외과 의사들이 신상주를 피해 거리를 뒀다.
그러다 보니 외과만 유독 단합이 잘되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라인을 잡고 줄 서는 것처럼 아부하는 자들만 요직을 차지했다.
인술이 아닌 돈이 중심이 된 셈이다.
당장 죽어가는 환자들 살리는 일을 피하는 경우가 늘었다.
테이블 데스는 고과점수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냉정하게 말해 의료사고가 두려워 메스를 들지 않는 의사는 외과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최전선에서 사람을 살려야 할 외과가 신상주로 인해 변질됐다.
연줄이 있는 자는 크게 아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입원 혜택을 봤다.
결과가 빤한 어려운 수술들은 모두 다 회피했다.
당연히 한국대 병원 외과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전문 학회에서 ‘너희도 외과냐’라는 비아냥 섞인 소리를 다 들었겠는가.
119긴급 환자도 아니다 싶으면 다른 대학교 병원으로 이송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자연스럽게 레지던트 실력도 하향화됐다.
선배 의사들이 수술을 멀리하니 그 영향이 아래 후배들에까지 미쳤다.
처음은 문제가 미약하게 감지되겠지만 나중에는 대대적으로 의사들을 교체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황승재! 너 미쳤어! 놔!!!”
장주희에게 손찌검을 하려던 신상주가 당황했다.
자신보다 체격이 좋은 황승재에게 손목이 잡히자 꼼짝을 못 했다.
주변에 보는 눈들이 꽤 많았다.
신상주는 어제 안 좋은 일이 있었다.
한국대 병원장을 비롯해 병원 임원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황승재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다.
차기 외과 수석 과장으로 제격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조카 신연주의 말이 현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신상주에 대한 승진 소식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승진은 고사하고 과장 자리까지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자리가 파하고 돌아왔지만 화가 난 상태라 잠을 거의 못 이뤘다.
다소 예민해진 상태에서 외과 병동 데스크에서 시비거리를 찾았다.
황승재에게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 만한 내용이 없었다.
평소에도 일 처리가 깔끔하고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우연치 않게 발견한 투약 처방 내역.
보통 주치의가 담당 환자에 대해 처방을 내리지만 대학 병원에서는 레지던트들이 처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황승재는 오지랖이 넓어 심장에 관련된 환자에게 투약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까지는 무시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적당하게 건수가 됐다.
내친김에 들추어내 심통을 부렸다.
이번 기회에 아주 코를 납작하게 눌러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사건이 커졌다.
황승재가 평소답지 않게 반발했다.
‘차라리 잘됐어! 이 새끼 이번에 제대로 엮어버린다!’
신상주는 황승재의 반발을 역 이용할 생각을 해냈다.
누가 봐도 하극상이다.
충분히 문제 삼을 만한 사건이었다.
다만.
“교수님, 어제 술 마셨어요? 얼마나 드셨기에 아직도 알코올 냄새가 빠지지 않은 거죠? 설마 그 상태로 회진하고 수술하실 건 아니죠?”
얄미운 장주희가 또다시 끼어들었다.
‘이런 쳐 죽일 년이!’
얄미워 죽을 지경이다.
레지던트나 인턴도 아닌 일개 실습생이 교수이자 과장인 자신을 아주 대놓고 희롱했다.
어찌나 어이가 없었는지 ‘어어’ 하다 당하고 또 당했다.
이런 말장난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더 말려들었다.
“닥쳐!”
약이 잔뜩 오른 신상주가 또 소리쳤다.
“그만하십시오. 후배들이 보고 있습니다.”
황승재가 잡아챘던 손을 뿌리치며 꾸짖었다.
“너희들 둘 뭐야? 둘이 짰어? 나 엿 먹이려고 손잡았지?”
아픈 손목을 매만지며 신상주가 장주희와 황승재를 엮기 시작했다.
“교수님 엿 좋아하세요? 그럼 제가 큰 엿을 선물해 드릴게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살살 웃으며 장주희가 대꾸했다.
“키키키.”
“쿠쿠쿳.”
간호사들은 어찌나 웃기는지 배가 아파 미칠 것 같았다.
절대 웃을 자리가 아니었지만 자꾸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외과의 우두머리가 일개 실습생에게 연속 개쪽을 당했다.
속이 다 시원했다.
신상주 교수에 대한 소문은 진작 쫙 퍼졌다.
수술 실기 능력이 갈수록 엉망이 돼 가고 있다는 얘기도 돌았다.
대부분 신상주 교수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암과 연관되어 있었다.
생명을 대상으로 효과 검증이 미약하고 비싼 약을 처방했다.
의료보험 과목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담낭과 췌장은 소리 없는 침묵의 살인자라고 불릴 만큼 조용히 찾아왔다.
발견되는 순간 이미 최소 3기 이상 진행된 경우가 태반이다.
살고자 하는 환자들은 마지막 희망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환자들을 빌미로 제약 회사에서 엄청난 리베이트를 받는다는 소문까지 파다했다.
외과 용품 선정에도 깊숙이 개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과 의사들 처방에도 제약을 걸어 놓은 사람이 신상주 교수였다.
특정 제약 회사에서 생산하는 약제들만 사용하도록 권고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수술실에서는 간호사들을 상대로 성희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종종 개인적으로 술을 같이 마시자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개진상 신상주’로 불릴 정도다.
인턴이나 레지던트들도 노예처럼 함부로 굴렸다.
과거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욕과 권력으로 아랫사람들을 윽박질렀다.
간호사들 단톡방에서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한국대 병원 과장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한국대 병원은 그 어느 병원보다 페이가 셌다.
신분 보장까지 되다 보니 쉽게 앞으로 나서는 고발자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폴리클이 제대로 신상주 교수를 털고 있다.
그것도 몸 하나 쓰지 않고 입으로 들었다 놨다 했다.
“누가 웃어! 너희들 다 짤리고 싶어! 일개 주사팔이 주제에!”
신상주가 간호사들을 돌아보며 호통쳤다.
“…….”
단번에 표정이 굳어진 간호사들.
파트너로서 존중은 못 받았지만 ‘일개 주사팔’이라는 표현은 과할 만큼 모욕적이었다.
의사들도 하지 못하는 환자들 케어는 온전히 간호사들 몫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정신적 노동 강도가 셌다.
아픈 환자들은 의사보다 만만하게 여기는 간호사들에게 스트레스를 풀었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버틸 수 없는 것이 종합 병원 간호사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신상주 교수.
“교수님……. 그 말씀은 너무하신 것 같네요.”
참지 못하고 수간호사가 한마디 했다.
“그래서?”
“사과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간호사가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 말했다.
“사과?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먹었나! 내가 누구야? 외과 병동을 책임지고 있는 수석 과장이야! 그런 나보고 사과하라고? 천하의 신상주가 네깟 것들한테?”
신상주가 이번에는 간호사들을 향해 삿대질을 퍼부었다.
불똥이 그쪽으로 튀었다.
“네. 사과해 주세요.”
수간호사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장주희와 황승재 교수를 지켜보며 용기를 냈다.
지금껏 참고 지냈지만 오늘 신상주 교수가 보인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한국대 병원보다 못한 다른 병원에서도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성희롱을 일삼던 의사들을 상대로 고소 고발이 이어졌다.
“와아 미치겠네……. 야! 너희들 뭐해!”
신상주가 속속 모여든 레지던트와 인턴, 수련생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쳤다.
“…….”
모두들 입을 열지 못했다.
이번 타깃은 자신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담당 교수가 당하고 있으면 앞으로 나서야지 병풍 놀이 해? 너희들 자격증 따기 싫어?”
가장 추잡한 방법으로 레지던트들을 겁박했다.
“교, 교수님…… 그럼 저희가 어떻게…….”
치프 조원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신상주의 직속 라인이다 보니 뒤로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뭐하긴 뭐 해! 이 새끼 잡아.”
신상주가 황승재를 가리켰다.
“그리고 너희들은 이 겁대가리 상실한 저년 끌고 가.”
장주희 동기들을 보며 소리쳤다.
“…….”
신상주의 말이 떨어졌지만 레지던트들이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황승재가 담당 교수는 아니었지만 분명한 건 펠로우이자 선배였다.
거기에 흠잡을 곳 없는 인격과 실력까지 겸비한 인물이었다.
“너희들 뭐 해. 교수님 말 안 들려? 저 계집애 끌고 가라잖아!”
신상주의 난동에 기세가 살아난 신연주가 동기들을 흘겨보며 소리쳤다.
얼굴에 환하게 드러난 자신감.
자박자박.
차가운 시선으로 장주희를 비웃듯 쳐다보며 다가섰다.
그리고 당당하게 손을 뻗어 장주희의 팔목을 잡아챘다.
그 순간.
“아아아악!”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