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장. 적은 항상 가까이에 있다.
“대표님. 오양식품에서 아침 일찍 은행 채무 일체를 상환하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아침부터 급히 전해져온 보고에 신태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제 술이 과해 새벽 사우나에 들렀다 평소보다 늦게 출근한 사무실.
담당 이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고했다.
“오양이?”
작업 마무리 단계에 임박해있던 오양식품.
느닷없이 수천억대 채무를 모두 상환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보고가 이어졌다.
상식적으로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사채 쪽에서도 더 이상 협조는 곤란하다고 합니다.”
“곤란? 뭐가?”
오양식품 작업에 관련한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은행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채 쪽에서 고금리 이자를 포기하는 발언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껏 한팀처럼 작업했던 작품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은행권에서 담보를 풀어도 고이율의 사채가 남아 있다면 막판까지 해볼 만했다.
장태산이 뒤에 붙어도 크게 우려하지 않았던 이유가 사채 때문이었다.
사채는 돈으로 해결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타깃으로 정하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갈가리 찢어 놓아야만 만족하는 습성이 사채 쪽 라인이었다.
그들 뒷배 상당수가 당연히 조폭과 연결돼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마지막 수인 사채 쪽에서도 탈이 나고 말았다.
이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증거였다.
“허대부가 나섰다고 합니다.”
“허대부!”
신태주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한민국 사채 시장의 큰손.
은퇴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대단했다.
경제인과 다선 정치인들 중 그와 관련되지 않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다.
대기업 오정만큼이나 인맥 관리가 뛰어난 허대부였다.
그가 오양식품 일에 나섰다면 사채업자들 모두 알아서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사채 바닥에서 허대부에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LOR이 나선 것 같습니다.”
“장태산!”
신태주는 LOR 소리가 나오자마자 장태산의 이름을 거칠게 내뱉었다.
우려했던 일이 터진 게 확실했다.
그것도 미처 방안을 마련할 겨를도 없이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주식 시장은?”
“상한가입니다.”
“아!”
신태주가 또 다시 짧은 비명을 토했다.
해외 투자자 명의로 공매도를 후려친 오양식품.
상한가는 전쟁을 의미했다.
“눌러봤어?”
“긴급 대응팀이 움직였지만 족족 다 받아내고 있습니다.”
“미친!”
사태가 이 정도면 장태산이 작정하고 오양식품 일에 뛰어들었다는 얘기가 됐다.
자금 규모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신태주가 투입 가능한 자금은 기껏해야 수천억 정도.
몇몇 대기업을 박살낸 장태산과 상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 새끼는 돈도 안 되는 일에 왜 발을 들이고 난리야!’
겉보기에 볼품없는 작품 같았지만, 이번 작업으로 신태주의 뒷주머니가 두둑해질 예정이었다.
오양을 노리고 있는 탄탄한 중견기업이 뒤에 있었다.
그쪽에서 상당한 자금을 지원했다.
지분이 많다 보니 오양식품 중 핵심 계열사 하나를 받기로 했다.
문제는 회장 성격이 지랄맞다는 것.
띠리리리리리리.
신태주의 스마트폰이 기다렸다는 듯 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신태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가봐.”
“넵!”
보고하던 이사가 물러갔다.
스륵.
신태주가 스마트폰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이봐! 신 대표!
받자마자 까칠한 목소리로 나오는 상대.
“넵! 회장님.”
신태주가 크게 반응하지 않으며 목소리를 공손하게 깔았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오양에 새로운 물주가 붙었다고?
소문이 그새 돌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 도대체 일을 왜 이따위로 하는 거야! 내가 신 대표 밀어주기 위해 얼마나 힘을 썼는지 알아? 투자한 자금은 어떻게 할 거야. 상대가 LOR이라고 하던데?
상황 돌아가는 판을 다 알고 전화를 한 상대.
“지금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 백방이고 천방이고. 지금 주식도 난리야. 오양 날아가는 거 아냐?
‘늙은이가 욕심도 많네.’
지금 전화를 한 상대는 절대 손해 볼 일이 없었다.
주식을 구매한 상태에서 상한가를 쳤다면 손해를 보장받고도 남았다.
공매도를 친 것도 아니었다.
오양이 채무를 변제한 상황이니 투자해 놓은 자금도 모두 회수 가능했다.
발등의 불은 신태주에게 떨어진 상황이었다.
“시간 여유를 주십시오.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 시간을 주는 건 어렵지 않아. 오양을 품을 수 있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 반대 경우가 된다면…… 각오해야 할 거야.
상대가 대놓고 겁박을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띠릭.
말도 끝나기 전에 상대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미치겠네. 벌써 소문이 다 난 거야?”
여의도 증권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졌을 찌라시.
신태주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예상했던 복병의 등장은 뼈를 때리는 것처럼 아팠다.
“장태산……. 이 새끼를 어떻게 밟아줘야 하나?”
전쟁에서 제일 확실한 승리 방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의 수장을 쓰러뜨리는 일이다.
신태주가 스마트폰을 들었다.
티디딕.
그리고 거침없이 버튼을 눌렀다.
“장태산. 네놈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이판사판이다!”
***
“사돈 관계는 핏줄도 아니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도희를 통해 들은 정보가 충격적이고 놀라웠다.
오양식품을 노리던 숨은 조력자는 바로 아유라 집안과 사돈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아유라의 새언니 집안.
- 적은 항상 가까이 있다고 하신 할머니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 관계면 핏줄과 진배없을 텐데 뒤통수라니…….
장립 귀신도 어이가 없는지 말을 줄였다.
나도 처음에 그 얘길 듣고 믿기 어려웠다.
아유라 사돈 집안은 나도 잘 아는 기업체의 운영자들이었다.
서양유업.
식품 업계의 또 다른 강자라 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분유시장과 식품 업계의 강자가 됐다.
회귀 전 미래에 오너 일가의 갑질 문제로 심심치 않게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서양유업의 오너 딸과도 안면이 있었다.
온시은과 동창인 그녀.
과거 클럽에서 온시은을 구해 나올 때 도움을 줬던 안소연이 바로 서양유업 대표 직계 딸이었다.
하버드 경영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그녀가 밥 한 번 먹자고 연락해 왔지만 거절했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은 스치듯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유라에게 제비 새끼를 소개한 장본인이 안소연. 그녀의 아버지인 서양유업 대표가 신태주 뒤에서 물주 노릇을 했고……. 세상 아무리 믿을 놈 없다지만 사돈 뒤통수에 칼 꽂는 건 예의가 아니지.”
마음이 찹찹하고 좋지 않았다.
오양식품에 대한 더러운 음모를 파악하자마자 서둘러 손을 썼다.
우선 무차별적으로 자금을 살포했다.
LOR 투자 여유 자금으로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았다.
허대부에게 직접 전화해 사채업자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외부적으로는 로버트 라이언을 통해 주식을 매집했다.
오양식품 주식은 공매도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증권가 중심으로 뿌려지는 찌라시를 통해 오양식품이 곧 망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매일같이 하한가를 치고 있었다.
기대 이상의 짭짭할 부수익이 예상됐다.
공매도를 공략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압도적인 물량으로 박살내는 것.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물량을 채워 넣어야 한다.
상한가 세 번 정도면 공매도 세력 통장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일주일 정도면 나가떨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오양식품을 살리기 위해 확실히 결단을 내렸다.
이유는 충분했다.
내가 과거에 좋아했던 라면 중에 오양식품 라면이 몇 종류 들어 있다.
그런 국민적 라면 기업을 근본도 모르는 놈들 손에 넘길 수 없었다.
이 일로 오양도 정신을 차릴 것이다.
오너 욕심으로 인한 무리한 기업 확장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 저도 형님 의견에 적극 찬성입니다! 인간의 근본 상도의를 저버리는 놈들에게는 매가 약이죠.
죽은 귀신도 내 의견에 동조했다.
사필귀정의 정의는 세상을 지탱하는 구심점 중 하나다.
악은 짧은 순간 이득을 얻을지 모르나 종국에 가서는 처절하게 파멸하는 법이다.
잠시간의 쾌락과 이익을 위해 올곧은 인생을 내던지는 자들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업의 진짜 무서운 맛을 아직 몰라서 그렇다.
업풍만 살짝 불어도 아프고 처절한 그 맛.
“누구 마음대로 처방한 거야?”
외과 병동 데스크에서 울리는 칼칼한 목소리.
아침 회진 시간 전이다.
아직 레지던트를 비롯해 인턴들도 준비가 안 된 외과 병동 입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승재 교수님이 처방을…….”
“교수? 언제부터 우리과 펠로우가 교수 소리 들었지? 겨우 시간 강의 몇 타임 뛰었다고 개나 소나 교수인가?”
“그건 교수님이 직접 지시한…….”
“어이 수간.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내가 지시했다는 증거 있냐고!”
- 저 사람 왜 그러죠? 어제 부부싸움이라도 한 건가?
귀신이 살짝 당황하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나도 궁금하다.
평소 회진을 도는 시간이면 가장 늦게 나타나던 신상주 교수가 오늘따라 일찍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수석간호사를 상대로 처방전을 문제 삼아 병동 데스크를 초토화시켰다.
근무를 서고 있던 간호사에게까지 불똥이 튄 것이다.
평소 웬만한 의사들도 소소한 일로는 건들지 못하는 수석간호사.
실수를 해도 위계질서 때문에 대놓고 질타하지 못하는 게 병원의 암묵적 룰이다.
의사보다 더 오래 근무하고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야 얻을 수 있는 수석간호사라는 자리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수석간호사를 면전에서 타박하는 신상주 교수.
나이 많은 수석간호사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주변을 서성이던 다른 간호사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는 상황.
아무리 사회적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간호사는 의사들의 진심어린 존중을 받지 못했다.
선진국 의료시스템과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교수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황승재 교수가 나타났다.
아들의 차도가 좋아지고 옛 연인을 다시 만나면서 얼굴이 활짝 핀 황승재 교수.
심상치 않는 분위기를 감지한 듯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물었다.
“황. 이 환자 약 네가 처방했냐?”
“이봉석 환자라면…… 그렇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네?”
“내 환자한테 누구 마음대로 처방을 내리냐고!!!”
신상주가 눈알을 부라리며 억지부렸다.
본인 환자라지만 평상시 약 처방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터였다.
본인 대신 레지던트들이 처방전 오더를 내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랬던 패턴이었음에도 펠로우급인 황승재를 조졌다.
이건 대놓고 모멸감을 주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황승재가 의아한 듯 반문했다.
“플래리스 처방은 내가 평소 처방하지 않는 약전이잖아. 그런데 그걸 알면서 이렇게 넣어?”
“문제가 없는 처방입니다. 데카키논과 유니자임, 리바로 정과도 같이 사용하던 약전입니다. 임상시험 결과도 아무 문제도 없고…….”
“야! 황승재!”
신상주가 말을 잇고 있는 황승재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교수님.”
“너 많이 컸다. 교수인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펠로우 주제인 네 까짓 게 뭘 안다고 나불거려! 만약 환자한테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네가 책임질 거야? 책임질 거냐고!!!”
누가 봐도 괜한 트집 잡기이고 시비였다.
그렇게 문제될 만한 약 처방도 아니었다.
스텐트 시술 환자에게 일상적으로 처방하는 평범한 약일 뿐이었다.
플래리스는 동맥경화 환자 증상 완화에 들어가는 약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 텐데 말도 안 되는 일로 트집을 잡았다.
레지던트도 아니고 펠로우급 의사가 처방한 약이라면 그 안전성은 이미 확인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만큼 신뢰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누가 봐도 황승재 교수의 기를 꺾으려는 수작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는 힘이 약한 의사들일수록 먼저 죄송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게 일반적인…….
“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뭐, 뭐라고?”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일반적인 상황으로 흐르지 않았다.
황승재 교수가 꼿꼿한 태도로 물러서지 않고 대응했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휘이이익.
눈이 돌아간 신상주가 간호사와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과감하게 손을 휘두른 그 순간 내 입이 자동으로 열렸다.
“교수님!!!”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