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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8장. 인과(因果) (947/1,284)

958장. 인과(因果)

“귀국요?”

- 그래. 귀국.

“왜요? 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귀국이라니…….”

손유리는 아빠 손대균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했다.

그동안 집안에 우한이 겹치며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할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오빠는 아직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엄마도 충격으로 몸이 많이 약해지고 수척해졌다.

손유리는 바쁜 와중에도 엄마가 걱정이 되어 매일 영상통화를 해왔다.

불과 얼마 전에 잠깐 귀국해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온 터였다.

그나마 가족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아빠 손대균만 멀쩡했다.

할아버지와 오빠 일을 겪으며 다시 과거의 냉혈한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사이 손유리도 어른이 됐다.

대충 모든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는 챘다.

장태산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기력이 쇠약해진 엄마는 장태산에 대한 원망을 수시로 내뱉었다.

하루아침에 단란하고 평안했던 가족이 불행의 늪에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가족은 가족대로 장태산은 장태산대로 마음이 아팠다.

장태산 성격에 아무 일에나 함부로 나설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오만한 가족이 만들어 낸 참사라는 데 있었다.

입밖에 내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친일파다.

파리 동포 모임에서 친일파 인명사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 할아버지 이름이 또렷이 있었다.

몇 번을 확인했지만 분명 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직접 확인한 사실에 부끄러워져 차마 내뱉을 말이 없었다.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가문의 역사였다.

그래서 더 한국 땅에 들어가기를 꺼렸다.

어떤 형태로든 장태산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무척 많이 보고 싶었지만 환경이 점점 그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아직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얼얼한 장태산과의 추억.

그런 와중에 손대균이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이다.

- 널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요?”

손대균의 말투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차가웠다.

손유리 역시 꼬박꼬박 존칭을 사용했다.

- 귀국하거라. 와 보면 안다.

“…….”

잠시나마 친절했던 말투가 명령조로 바뀌었다.

손유리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지금은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프랑스 학교와 미술계에서 어느 정도 화가로 인정을 받고 있는 중이다.

독특한 화풍을 소유한 화가로 이제 겨우 얼굴이 알려지고 있는데 당장 귀국하라는 손대균.

- 나이도 있는데 너도 이제 정착해야지.

“아빠. 그건…….”

- 가족들은 생각 안 할 거냐? 할아버지는 몸져누우시고 오빠와 엄마는 겉만 멀쩡하지 많이 아프다. 그런데 너만 편안하게 살겠다고 해외에 계속 머무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손대균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하아.”

손유리는 말을 듣다 짧은 한숨을 뱉었다.

가족이라는 말에 가슴에 큰 돌덩어리를 올린 듯 답답해졌다.

누가 봐도 혼자만 편하게 살겠다고 비켜나와 있는 모양새였다.

평소에 손유리 일에 말을 아끼던 손대균이 작심한 듯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 내가 언제까지 버틸지 모른다. 네가 힘을 보태주었으면 한다.

“네? 제가 무슨 수로 아빠에게 힘을 보내겠어요?”

뭔가 의미심장한 말에 손유리는 한발 물러나며 되물었다.

- 와 보면 안다고 하지 않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날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누구고? 뭘 안다는 거지.’

다소 강압적인 분위기에 손유리도 마음을 바꿔 먹기로 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동안 엄마가 눈에 밟혔던 것도 사실이다.

엄마의 자랑이던 오빠가 망가진 후 몸과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채 자꾸 약해져만 가는 엄마.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도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요. 대충 일 정리하고 바로 넘어갈게요.”

- 기다리마.

손대균은 할 말을 다 한 듯 통화를 끝내려 했다.

“저기 아빠…….”

어렵게 다시 말을 잇는 손유리.

- 할 말이 남았냐?

“태산 씨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손대균과 장태산 사이에 친분이 꽤 두텁다는 걸 잘 알았다.

아직은 그를 당당하게 볼 자신이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난 뒤에 만나도 충분하다.

- 내가 원하는 바다.

손대균은 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돌아가는 시간 맞춰 연락드릴게요.”

- 그래. 알았다.

뚝.

통화가 끝났다.

“하아아아아…….”

긴 한숨을 뱉어내는 손유리.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뭔지 모르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자신과 장태산이 얽히게 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현재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 뿐이었다.

***

- 혀, 형님! 이게 뭡니까!

귀신도 놀랐다.

갑자기 들려온 알림음.

강한 업풍!

지금 임성철 회장에게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구체적 장면은 확인할 수 없지만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상.

귀신도 영향을 받는 듯하다.

하늘이 맺어준 삼인행의 결과물인 셈이다.

- 카르마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 xx께서 업의 소용돌이 속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 법칙을 규율하는 신들이 눈여겨보기 시작했습니다.

- 인과(因果)가 새로이 싹을 틔웠습니다.

연속해서 들려오는 알림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묵음 처리된 특정 존재가 특히 귀에 거슬렸다.

나보다 한참 상위 신인 게 확실하다.

- 회장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죠?

나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스마트폰을 꺼냈다.

단축번호를 눌렀다.

- 넵 회장님!

“장립 대표 현재 위치 알 수 있습니까?”

-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시큐리티 보안팀에 직통으로 전화를 걸었다.

- 임페리얼 호텔에 계십니다.

호텔이란다.

- 저녁 퇴근 시간 무렵에 엘자그룹에 근무하는 여성과 전에 만났던 포차에서 만났습니다. 달걀말이와 닭똥집 안주를 곁들여 소주 다섯 병을 비운 후 30분 전 여성과 함께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보안직원이 임성철 회장의 노선을 자세히 알려줬다.

안주와 술이 참 서민적이었다.

- 아니! 오늘은 술만 마신다며? 나에게 아무 일 없을 테니 믿어 달라더니! 회장님 나빠! 

장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발끈했다.

자신의 모습을 하고 살아가는 임성철 회장에 대한 원망이 줄줄 쏟아졌다.

“다른 일은 없습니까?”

- 평소처럼 감시자들이 일정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손님입니다. 최선을 다해 경호해 주십시오.”

-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 충성!

통화가 끝났다.

“음.”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이를 떠나 남녀 간의 사랑은 죄가 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지금 임성철 회장이 마법으로 남의 육신을 잠시 뒤집어쓴 상태라는 것이다.

진짜 같지만 엄연히 가짜 인생이었다.

자꾸 생각지 못한 일이 겹치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임성철 회장이 그동안 쌓아 온 인품과 덕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문제가 발생했다.

- 아오! 내가 바보지. 할머니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했는데 정말 사실이었어. 세상에 천하의 오정 회장이 그럴 줄은 몰랐어.

자책하는 장립 귀신의 말 그대로다.

여러 조짐이 엿보였지만 일정한 규칙을 벗어나지 않았던 임성철 회장.

하루 이틀 사이 모종의 결심을 한 게 확실했다.

아직은 선업을 쌓고 있지만 언제 인과의 추가 균형을 잃게 될지 몰랐다.

- 이대로 놔두실 겁니까? 호텔로 바로 쳐들어 가시죠! 

장립이 방방 뛰었다.

놔둘 거다.

- 왜요?

임 회장님이까.

너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다.

- 아니 귀신 왜 차별하고 그러십니까? 임 회장님이 죽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니잖아요!

장립 말이 맞긴 하지만 또 틀렸다.

임 회장님은 내가 직접 관리한다.

- 저도 형님 라인 아닙니까?

라인? 하는 거 더 지켜봐서.

임 회장님을 믿는다.

남은 인생 막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진작 사달을 냈을 분이다.

지금껏 보아온 임성철 회장은 생각보다 사사로움이 없었다.

일우무사(一雨無私)라고 했다.

한줄기 비에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이다.

아들과 만남을 가졌지만 그 이후 아직 멀었다며 더 철저하게 자신을 통제했다.

그런 분이 크게 사고 칠 것 같지 않았다.

또 좀 치면 어떻겠나.

그까짓 거 사람 죽이는 것만 아니면 포인트로 커버할 수 있다.

임성철 회장 수중에 감춰놓은 비자금도 상당했다.

돈이 안 되면 보이지 않는 경영 노하우로 대체해 가르침을 받으면 된다.

그 무엇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임성철 회장의 경영 수완.

절대적으로 장립과 격이 달랐다.

- 정말 세상은 잘나고 볼 일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한눈 팔지 말고 공부나 할걸……. 에휴.

잡귀의 한숨이 사방을 퍼져나갔다.

똑똑.

집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스르릇.

가볍게 열리는 문.

- 오! 까칠 매력덩어리 누님 오셨다! 흐흐. 난 이 누님 마음에 들어요. 도도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차도녀.

잡귀야. 너를 지켜보니 대충 예뻐도 다 마음에 들어하더라!

“회장님. 다녀왔어요.”

도도희가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았다.

오늘도 여전히 몸매가 도드라지는 타이트한 투피스 오피스룩을 입은 도도희 대표.

블랙은 그녀의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특히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나 보이는 가지런한 두 다리는 각선미 자체가 발군이다.

- 시선이 너무 뜨거운 거 아닙니까?

“회장님. 오늘따라 제 다리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예뻐요?”

스릇.

가볍게 다리를 반대편으로 꼬아 넘기는 도도희.

방금 그 자세, 위험했다.

정신을 놓는 순간 걸려드는 도도희의 거미줄.

“다녀온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칫……. 좀 넘어오는 척이라도 하면 안 돼요? 제가 몇 년째 도끼질을 하는 줄은 아시죠?”

도도희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 형님! 저렇게 말하는데 그냥 좀 넘어가 주세요! 남자가 아량이 없으세요!

회사 내에서 절대 그러는 거 아니라고 회귀 전 직장 생활에서 배웠다.

사내 연애하다가 두 사람이 함께 폭망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귈 때는 상관없는데 헤어지는 순간 인연이 꼬이게 된다.

“투자 가치성은 어떻습니까?”

“이미 작정하신 거 아니에요? 투자해도 대표님 투자 수익에 훨씬 못 미치는 회사잖아요. 아유라, 그 미모의 대학 동기 분 때문이죠?”

도도희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양식품은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식품 기업입니다. 사회 환원 차원에서 투자가 결정됐습니다.”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단기 유동 자금 함정에 빠졌지만 투자 방향은 옳았어요. 사기꾼 같은 해외 발주자들만 정리하면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도도희 대표가 경영 실사표를 건네줬다.

볼 것도 없었다.

오양식품은 그렇게 형편없는 회사가 아니다.

과거에도 유동성 함정을 벗어나 탄탄하게 기반을 다지며 살아남았다.

나를 만나면서 살짝 꼬였다.

아유라가 나를 경쟁상대로 생각하면서 회사 경영에 참여했다 벌어진 사태.

내가 만든 인과의 편린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재밌는 걸 발견했어요.”

도도희가 눈을 반짝였다.

“뭘 말입니까?”

“아유라 옆에 아주 큼지막하고 욕심 많은 혹이 붙어 있던데……. 알고 계셨어요?”

“혹이요???”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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