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6장. 와이파이.
“사라 요한슨이네.”
퇴직 후에도 현직 장관처럼 대접받는 힐러리.
손에 사진 몇 장을 들고 있었다.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친 후 명소가 된 LA의 팰튼 호텔 스카이 바.
환한 미소를 지은 다니엘과 사라 요한슨 두 사람이 와인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다.
누가 봐도 관계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분위기가 뜨겁다고 합니다.”
비서의 보고와 함께 사진을 살피던 힐러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남편과 이 두 사람처럼 다정하게 마주보며 와인을 마셔본 지 꽤 오래였다.
한때는 열렬히 사랑하던 사이였지만 이제는 서로 간에 냉정한 정치적 동지일 뿐이었다.
스캔들 사건이 터진 직후 부부는 비공식적으로 부부 생활을 종료했다.
외부적으로는 여전히 완벽한 부부의 모습이 연출됐지만 내부적으로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각자 암묵적인 은밀한 파트너가 존재했다.
알고 있으면서 서로를 터치하지 않는 관계가 됐다.
남은 미래의 정치 활동을 위해서는 부부라는 장치가 필요했다.
‘왜 그 동양인 이름만 들으면 머리가 아파오지?’
힐러리는 사진 속에서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다니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잘생긴 동양 청년에 불과했다.
나이도 생각보다 무척 어렸다.
하지만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꺼림칙함이 힐러리를 괴롭혔다.
특히 영적 조언자인 낸시가 다니엘에 대해 언급한 뒤부터 자꾸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우연인지 이후 낸시는 한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니엘 장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던 낸시.
그는 죽은 자들의 보호를 받는 자라고 했다.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라 이후 숨을 죽이고 그를 살폈다.
오바마가 그를 제거하려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힐러리에게 은근히 협조를 구했지만 적극 동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겪어온 낸시의 경고는 언제나 옳았다.
경계 대상인 다니엘과는 굳이 인연을 만들지도 않았고 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로버트 라이언이 선거 자금 규모를 서서히 줄여나갔지만 그 과정 또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월가의 투자자들 또한 각자 추구하는 정치 성향이 있다 보니 지속적인 경우는 드물었다.
앞서 로버트 라이언이 오바마를 뒤에서 후원한 경력이 있다지만 힐러리까지 지원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자금 운영에는 문제가 없었다.
일본 쪽에서 들어오는 정치 자금만으로도 선거 운동 비용으로는 충분했다.
문제는.
‘트럼프를 다시 만나려나?’
아직까지 대선 주자로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은근히 소문으로 돌고 있는 트럼프의 대권 욕심.
힐러리의 신경을 묘하게 자극했다.
정치적 라이벌 대상은 아니었지만 다니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찝찝했다.
힐러리는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정치에 참여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
미국의 대통령은 세계의 지도자나 진배없었다.
말 한마디에 각국 정상들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그 무엇보다 짜릿했다.
남편이 대통령을 지내던 시절 중요한 내부 결정은 대부분 힐러리의 몫이었다.
스캔들이나 일으켰던 남편과 달리 힐러리는 정치 욕망이 대단했다.
끓어오르는 욕망으로 정치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힐러리.
트럼프와 함께하는 듯한 다니엘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서가 여러 의미가 담긴 질문을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힐러리에게 있음을 대변하는 질문이었다.
무관의 여인이지만 지지하는 자들이 무척 많았다.
무력투사도 가능했다.
“요한슨과는 뭘 하고 있나요?”
“……곧 룸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흐음.”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었다.
피가 끓는 청춘들이다.
사라 요한슨이 다니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밀도 아니었다.
문제는 상대가 동양인이라는 것.
사라 요한슨은 힐러리도 건들 수 없는 미국 대가문의 여식이다.
그런 가문일수록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무척 컸다.
그렇다 보니 사라 요한슨과 연관이 돼 있는 다니엘을 상대하기 더 복잡했다.
그녀 뒤에는 리처드 요한슨 상원의원과 차일드 가문이 버티고 있었다.
딸의 사생활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리처드 의원은 그녀의 일탈을 방관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그건 암암리에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단한 명문가를 꿈꾸는 리처드 의원도 다니엘을 주시하고 있다는 증거.
‘트럼프……. 트럼프.’
언젠가 낸시에게 트럼프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과거에는 트럼프에 대해 그렇게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낸시가 최근에는 지속적으로 조심하라는 경고를 해왔다.
그의 주변에 포진한 조력자들의 힘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계속 감시해요. 특히 트럼프와 만나게 되면 바로 보고해 주세요.”
“넵!”
현직 국무장관은 아니지만 탄탄하게 쌓은 인맥 덕분에 지금 당장이라도 공권력을 사용하는 게 가능한 힐러리의 명령.
그녀의 명이 아니어도 이미 첩보 요원들의 눈이 LA 팰튼 호텔에 쏠려 있었다.
***
뭐지? 이 뻔뻔함은…….
살아 있는 언어는 몸으로 배운다고?
누가?
어이가 없는 시선으로 장립, 아니 임성철 회장을 바라봤다.
몇 시간 전에 대면했던 그분이 아니다.
눈빛만 봐도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열정이 엿보였다.
가히 용암 수준이다.
이건 누가 봐도 그 신호.
“저기요. 제가 활동 반경은 최소한으로…….”
내가 확인했을 때 영어가 무척 짧은 임성철 회장이었다.
자칫 위장한 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네가 장립이고 장립이 곧 나야. 영어는 문제없어.”
“!!!”
오! 마이 갓!
임성철 회장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버터로 코팅한 듯 혀를 굴렸다.
게다가 내가 뿌리고 걷던 그 대사.
기분이 이상했다.
장립과 공유되었던 모든 것을 임성철 회장이 누리고 있다.
내로남불같은, 이 찝찝함은 무얼까?
“이것도 가능해? 듣기 좋지?”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프랑스어.
달궈진 올리브유에 버터를 던져 녹인 것 같은 느끼한 동글동글한 언어가 귀를 파고들었다.
크리스 반스데일 신선의 프랑스어 구사 능력과 거의 동급이다.
“독일어로 해줄까? 아니면 스페인어?”
“…….”
유창한 외국어가 계속 흘러나왔다.
누가 들어도 준 원어민 수준을 넘었다.
이거 아주 위험하다.
장립 이 녀석 제대로 사고를 친 거 같다.
임성철 회장도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산 자가 아니었다.
내 수중에 있던 상당한 포인트를 이용해 목숨을 연장한 것.
향냄새 맡기 직전의 임 회장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켜 놓은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분명 장립과 잘 통할 게 뻔했다.
주파수가 제대로 맞아떨어져 서로 교신이 잘된 듯했다.
장립은 똑똑한 놈이다.
유럽에 살면서 배웠던 각종 언어와 현대 교육.
임성철 회장의 경영 노하우와 배짱까지 합쳐지면…….
“음.”
답답한 마음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통제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다.
임성철 회장의 몸뚱이를 원래의 노구로 돌려놓아도 답이 없었다.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인이라 알아보는 자가 많을 게 빤했다.
장립에 대한 감시도 철저했다. 그가 필요했다.
이미 내 주변으로 무수한 정보원들이 깔려 있었다.
지금 이 현장도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최대한 의연한 척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는 웃음, 썩소다.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흥분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장 회장에게 실망했어.”
“???”
느닷없이 얼굴을 붉히며 진짜 실망한 내색을 비치는 목소리.
어리둥절한 눈으로 임성철 회장을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실망?
“좋은 건…… 같이 봐야지?”
“뭘 말입니까?”
“그거.”
“그거라면……. 헛!”
지끈 머리가 아파왔다.
장립, 이 자식 그렇게 밖으로 유통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공범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게 화낼 일이야?
연세도 지극한 양반이 왜 야동을…….
“나도 남자야. 여자 좋아해. 그것도 미녀.”
짧고 굵게 끊기는 임성철 회장의 말이 귀에 쏙쏙 박혔다.
어른들 말씀 하나도 안 틀렸다.
자고로 남자는 문지방 넘을 힘만 있으면 된다더니 진짜였다.
다만 문제는 지금 임성철 회장의 몸뚱이가 가짜라는 것.
하지만 동시에 진짜이기도 하다.
내가 워낙 잘 바꿔놔서 피까지 젊어졌다.
외적으로 아주 퍼펙트했다.
“저 여자분 아세요?”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발의 글래머 미녀.
머리카락을 여러 차례 쓸어 넘기며 한껏 유혹을 뿌리고 있다.
웬만한 남자들은 쉽게 혹할 만큼 매력적이다.
인구가 무척 많은 미국이지만 의외로 미녀는 드물다.
그 악조건 속에서 임성철 회장이 제대로 미녀를 낚았다.
어쩌면 스파이일 수도 있다.
나야 매사 철두철미하지만 피 끓는 귀신과 임성철 회장이라면 눈 뜨고 당할 수도 있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교육학부 박사 과정 학생이야. 립이 확인해줬어. 영어를 배우기에 완벽한 조건이지?”
흐뭇한 눈으로 여인을 돌아보는 임성철 회장.
느낌이 그랬다.
야생 아프리카 초원에서 안성맞춤인 암컷을 정복한 수사자 같은 느낌.
그에 따른 위험신호가 계속 감지됐다.
“장립의 능력을 습득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무슨 소리야. 진짜 그 국가의 언어는 미세한 문화와 정신까지 습득해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법이야. 그것도 몰랐어?”
“…….”
한순간에 바보가 됐다.
그러니까 그 미세한 걸 느끼기 위해……. 몸으로 배운다고?
“고마워.”
“네?”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
아니 회장님!
뻔뻔하게 곧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시선은 금발 미녀를 향한 채 미소를 날렸다.
오늘은 건들지 말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복상사해도 좋으니 오늘만큼은 내버려 두라는 말을 행동으로 해 보였다.
아! 나는 프로가 아니었다.
세상 오래 살아온 대기업 회장님의 영업 방식은 시대를 초월했다.
“끙.”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장 회장. 웃어.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접대 미소를 짓고 있는 임성철 회장.
당했다.
꼴통 장립과 만나면서 엄청난 걸 각성해 버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자신들이 을이 아니라 갑이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하룻밤 스치는 인연이야. 그것도 내 일이 아니라 총각 귀신 립의 일이야.”
저기 회장님.
총각 귀신 립은요 전혀 느낄 수가 없거든요.
- 아니에요! 느껴져요!
“!!!”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오는 장립의 목소리.
너 내 생각까지 들려?
- 헤에, 같이 있는 시간이 길었잖아요. 그리고 제 육신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영적 파동이 감지돼요. 뭐라고 해야 할까? 요즘 말로 와이파이 신호 같은 거예요.
와, 와이파이!
입이 쩍 벌어졌다.
위험도가 팍팍 상승했다.
-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장립 육신이 사라지면 저도 휴면기에 들어가요.
도리어 립이 나를 달랬다.
위로 아닌 위로가 됐다.
그런데 방금 저……, 그 말은 무슨 의미야? 진짜로 느껴져?
- 임성철 회장님은 본인의 본래 기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제 싱크로율이 더 높아져요. 대박이죠?
헐 대박!
어이가 없어 임성철 회장을 다시 쳐다봤다.
이제는 더 말릴 수도 없었다.
오늘은 진짜 총각귀신이 한을 풀 수 있는 길일인 셈이다.
톡톡.
임성철 회장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장 회장. 좋은 게 좋은 거잖아.”
“…….”
임성철 회장의 말에 할 말이 없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여 기다리는 처자에게 가봐. 자네도 뜨겁게 공부할 시간 같은데. 흐흐흐.”
귓가에 바짝 다가와 속삭이는 음흉한 목소리와 웃음.
할 말이 없었다.
누구를 훈계하기에는…….
나에게도 아직 배움의 길은 멀고 길게 남아 있었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