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장. 올가미.
- 잘 지냈어요? 아! 그 말은 실례군요. 손 장로님과 아드님이 병고 중인데……. 미안합니다.
담담하고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말투다.
손대균은 저절로 긴장했다.
회주와의 통화는 언제나 몸과 마음을 경직되게 했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오랜 시간 이 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골동품이나 마찬가지인 2G폰의 번호.
구체적인 신분이나 이름 석 자도 몰랐다.
그냥 회주로 통했다.
그러니 얼굴은 더더욱 알 수가 없다.
언젠가 한번 아버지께 회주가 누구냐 물었지만 빙그레 웃으며 ‘생각보다 더 가깝게 계신다’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괜찮습니다.”
손대균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송회 회주는 보통 장로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장로직을 물려받지 못한 손대균은 아주 가끔 회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 수준이다.
- 이번 사태에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연을 끊을 각오를 했지만 아들 문제가 더해져 손대균의 입장이 몹시 난처해졌다.
기로에 선 순간 이렇게 회주가 연락을 해왔다.
- 직접 찾아뵙고 위로를 드리고 싶지만 제 입장이 그렇습니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손 장로님이라면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네?”
손대균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자신에게 ‘장로’라는 호칭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회주.
결코 실수를 하실 분이 아니었다.
- 당연한 호칭 아니겠습니까. 회칙에 명시돼 있습니다. 일송회의 장로가 사망이나 기타 변고로 부재시 그 직계 자손이 계승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설마 모르셨던 것은 아니시죠?
“…….”
손대균은 입을 다물었다.
일송회의 장로직을 받는 순간 전혀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남은 인생의 길고 긴 세월 동안 짊어져야 할 멍에.
- 손 장로님.
회주가 조용히 손대균을 불렀다.
“네……. 회주님.”
- 선조 때부터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피의 동맹입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장로급이 일송회를 나가는 방법은…….
회주는 말을 다 뱉지 않았다.
‘죽어야 끝난다.’
손대균은 눈앞이 캄캄했다.
회주의 침묵은 분명한 경고였다.
최근 손대균이 어떤 행보를 보여 왔는지 회주가 모를 리 없다.
현재 손국중과 손주혁은 회주의 관심 밖 인물들이었다.
리앤장의 실질적 주인이나 진배없는 손대균을 이 순간 장로로 추대하겠다 의사를 전하는 회주.
회주가 던진 그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전무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께 저항했고 벗어나고자 프랑스로 떠났던 손대균.
- 유리 양은 프랑스에서 잘 지내죠?
“!!!”
회주는 딸 손유리까지 언급했다.
손대균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전 약속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요. 손 장로님는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세상에 한없이 관대한 사람이지만 배반자는 용서치 않는답니다. 특히 회에서 맺은 피의 맹약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주듯 잔잔하게 설명하는 친절한 회주의 말투.
그러나 손대균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회의 그늘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하는 순간 가족들 모두가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나마 멀쩡한 딸도 예외는 아니다.
- 우리 아들이 유리 양을 많이 보고 싶어 해요. 과거 맺은 약조처럼……. 돈독하게 지내야죠. 손 장로님.
손국중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 이미 약속이 된 손유리의 혼처.
손대균이 손유리의 연애사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네……. 그래야죠.”
- 며늘아기 잘 부탁합니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 하하하. 며칠 전 새로 도착한 사진을 봤어요. 참 마음에 들었어요. 장 베로 작품 속 ‘콩코르드 광장의 파리지엔느’처럼 아주 세련 됐어요.
“!!!”
회주는 손유리의 파리 생활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파르르르.
온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 손대균 장로.
천의 목소리를 가진 듯 회주의 음색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네……. 회주님.”
손대균은 눈을 질끈 감고 목소리에 힘을 담아 대답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장로직분.
- 장태산에 대한 모든 공격은 당분간 멈추세요. 제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무조건 보류입니다.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 아직 비밀입니다.
“알겠습니다.”
- 손국중 장로님과 손주혁 검사 일은 안타깝지만 참으세요. 복수할 날은 곧 올 겁니다.
손대균의 마음도 모른 채 자연스럽게 복수를 운운하는 회주.
“감사합니다.”
-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하도록 하죠.
“들어가십시오.”
띠릭.
회주와의 통화가 끝났다.
“허어어어억…… 허억.”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는 손대균.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협박 수준은 보통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음색에서 느껴지던 사악하고 치밀한 기운.
손대균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병실을 둘러봤다.
마치 병실 어딘가에서 사방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당신도…….”
그리고 손국중을 자세히 바라봤다.
당신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던 아버지의 삶.
얼떨결에 장로로 임명되고 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회주.
대신 그 대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만만치 않았다.
굵고 거대한 크기의 거미줄처럼 짜여진 올가미.
손대균은 답답증에 자신도 모르게 목을 손으로 여러 번 매만졌다.
***
- 카르마 포인트가 입금되었습니다.
- 중금리 이자를 미리 떼어 놓겠습니까?
하아! 저놈의 중금리! 중금리!
이자를 미리 뗀다는 말은 대출 전문 업체 담당자들이 말하는 선이자 차감을 얘기했다.
등골이 서늘하다.
손국중을 엄청난 고액 포인트까지 사용해 처리하고 났더니 그에 따른 또 다른 포인트가 들어왔다.
이것저것 연말 결산하듯 세상에 뿌려진 자선 사업으로도 계속해서 포인트가 저축됐다.
문제는 내가 땡겨 쓴 원금과 중금리에 대해 정확히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신들이 엿장수도 아닌데 계약만 존재하고 계약서나 세부 내용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고금리로 빌려 썼다면 바로 다음 날부터 이자 폭탄을 맞게 될 것 같았다.
말로만 듣던 조폭들의 하루 이자 계산법이 신들 세계에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 고금리 대출 상품이 궁금하십니까?
노! 노노노노노!
대출은 저금리도 무서운 법이다.
아무리 빚도 자산이라지만 역시 돈을 빌리는 건 위험한 행동이다.
물론 세상 살다보면 금수저가 아닌 이상 차용은 당연한 경제 행위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빚은 무엇을 해도 제 발목을 잡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
처음에야 푼돈을 빌려 쓰게 되지만 습관이 되면 큰돈도 겁 없이 빌리게 만든다.
바늘 빌린 돈으로 나중에 소도 빌린다는 속담이 그래서 존재하는 거다.
중금리 계산에 포인트 대출을 승인한 조상님들께 서운한 감정은 없다.
아무리 대한민국을 위하는 일을 하는 자라 해도 한민족 조상님들의 특혜를 몰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를 회귀 시킨 이유만으로도 다른 신들에게서 눈치깨나 받았을 터.
그런 상황에서 싼 이자로 카르마 포인트 대출까지 감행했다면 타국 조상신들이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상위 신계에 신고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나도 계산 때려보고 던진 중금리.
최상급 악신도 놀랐을 만큼 파격적인 신의 한 수였다.
생각만 해도 통쾌하고 시원하다.
물론 중금리 때문에 배가 아팠지만 버틸 만했다.
세상은 넓고 악인은 곳곳에 널렸다.
흐흐흐.
“장 회장. 얘기하다 말고 왜 그래? 손주혁이 옆 방 알아봐줘?”
“이사님, 저 멀쩡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웃어. 무섭게스리.”
“그런 게 있습니다.”
“손국중 회장 골로 보내서?”
“무슨 소립니까. 제가 뭘 보냈다고요.”
딱 시치미를 뗐다.
이런 일은 하늘과 나만 알면 된다.
최측근이라 해도 결코 발설하지 말아야 할 범죄행위.
“난 왜 자꾸 의심이 들까?”
“조 이사님, 밝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서로 믿어주고 끌어주는 그런 교과서적인 관계 모릅니까?”
“나야 그러고 싶지. 하지만 난 장 회장 속을 모르잖아.”
“까서 보여드려요?”
“됐어.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장 회장을 경험했잖아. 그 시커먼 속을 까봐야 까맣기나 하지.”
“조 이사님!!!”
“왜 찔려?”
너무 오래 교류한 것 같다.
눈치가 귀신이다.
“손국중 회장 많이 안 좋답니까?”
모르는 척 물었다.
“뇌출혈이래.”
“쯧쯧 어쩌다……. 조 이사님도 몸 관리 잘하십시오. 연세 드시면 하루가 다르다고 다들 그러더군요.”
“지금 이거 협박이지?”
“아닙니다. 걱정 돼서 드리는 충고입니다.”
“됐어. 누누이 말하지만 난 배신 같은 거 안 하니까 겁주지 마. 세상에 장 회장 만큼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어.”
“저 한국대 출신 변호사입니다. 항상 합법과 적법한 행동만 하고 삽니다. 조 이사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인터넷 발달로 요즘은 변호사들도 품위 유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크크크. 합법? 적법? 그냥 내가 웃고 만다.”
조 이사님 레벨이 많이 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순수하고 열정 넘치던 전직 차장검사는 이제 없었다.
“손대균 이사님 돌아왔다고 했습니까?”
“응.”
“연락은요?”
“전화해도 안 받아. 넌 안 해봤어?”
“아직요.”
“그래도 해봐. 대균이가 너 많이 좋아하잖아. 이럴 때 위로해 줘야지.”
나도 안다.
그래서 더 전화를 못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이번 사건의 설계자이자 주범이다.
손국중 회장을 직접 정죄했다.
손주혁 사건은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었지만 주순자를 이용해 후려친 건 나였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코 내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운명은 평범한 결말을 보기 좋게 걷어찼다.
“마음 좀 추스르시면 전화하시겠죠.”
나는 손대균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는 모든 사건 뒤에 내가 있었다는 걸 알 것이다.
그만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선택할 시간이 필요할 터.
개인적으로 손대균 이사와 친분이 있다고 해도 그가 풀어야 할 매듭을 대신 풀어 줄 수는 없었다.
꼬여버린 핏줄과의 문제도 그들이 풀어야 할 업의 문제에서도 난 제3자였다.
“이럴 때 보면 너 진짜 냉정해.”
“올가미인 줄 알았다면 스스로 잘라내야죠.”
“응? 갑자기 올가미는 왜?”
조윤태 이사는 손대균 이사와 나의 사이에 감춰진 이야기를 많이 몰랐다.
손국중과 손주혁을 상대로 내가 손을 썼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일송회와 손대균 이사, 나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문제는 짐작도 못했다.
“이사님도 조심하십시오. 사탕이 달다고 덥석 한입에 삼키면 목구멍 막힙니다.”
“걱정 마. 난 사탕 쪽쪽 빨아파야.”
가끔 조 이사의 정체가 불분명하고 난해할 때가 있다.
날고 긴다는 검사들 중에서도 고위직에 있던 분이 저런 동심 가득한 말을 툭툭 던질 때가 그랬다.
“그 존경스런 눈빛은 뭐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날 쳐다보는 조윤태 이사.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거 아시죠?”
“고럼~ 우리 서로 뜨겁게 싸랑하는 사이잖아.”
“싸랑요?”
“장 회장 그 말 몰라?”
“무슨……?”
“좋아하는 데 이유 있으면 존경이고, 좋아하는 데 이유 없으면 사랑이래. 어느 순간부터 난 장 회장을 조건 없이 싸랑해~.”
닭살이 팍 돋았다.
중년을 훌쩍 넘어가는 아재의 싸랑 타령은 무척 부담스럽고 위험했다.
“그건 그렇고 대웅조선 인수 자금은 어떻게 할 거야? 정부 쪽 조건이 만만치 않은데 감당할 자신 있어?”
인수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삼우로펌.
“실사 나가서 후려치죠. 어차피 분식회계가 판을 칠 테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해외 쪽에서 소송 건다고 하던데. 들었어?”
“그래요?”
내가 지시한 내용이지만 모르는 척했다.
“수상해…….”
“또 뭐가 말입니까?”
“안팎에서 동시에 흔들어 아주 간단하게 대한민국 재벌들을 정신없이 후려쳐 삼키는 게 장태산 회장 특기잖아.”
“특허 기술이죠.”
“그건 인정. 그래서 말인데…….”
띠리리리리리리리.
그때 울리는 전화 벨소리.
자연스럽게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좋은 학교 선배’라는 글자가 화면에 떴다.
“받아봐.”
소파에 몸을 푹 기대며 말하는 조윤태 이사.
스륵.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장태산입니다.”
- 우리 잘난 후배님~. 그동안 잘 있었어?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