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장. 아마존의 눈물.(11)
“도대체 어딜 가신 거야?”
김한별은 갑자기 사라진 장태산을 찾느라 분주했다.
자신의 판단은 옳았다.
사건이 터진 직후 도움을 요청한 게 전부였다.
보스라 불리는 그가 현장에 정말 나타나줬다.
그 뒤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생각지 못한 경호원들이 헬기를 타고 대거 동행했다.
무소불위의 이 지역 맹주 휘하 사병들을 홀로 다 처리했다.
엠마도 무사히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친구로서 시간을 함께했던 김한별도 엠마의 정체는 모르고 있었다.
이해관계가 엮이지 않은 순수한 관계였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미래에 관한 꿈을 꾸는 드림워커가 분명했지만 모두의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녀의 아빠가 정치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존 피어스 상원의원이 아빠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 1, 2위를 다투는 존 피어스 상원의원.
많이 놀라긴 했지만 그뿐.
장태산 회장 덕에 어지간한 사건에 있어서는 면역력이 생겼다.
홍콩 일뿐만 아니라 암중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장태산 회장.
시간이 지나도 역시 그의 능력은 측정불가였다.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을 것만 같던 브라질 사건도 거짓말처럼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리오 마을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브라질 최고 경호회사 직원들이 철통방어를 했다.
바울 신부님은 거액의 기부금을 받고 철야 감사 기도에 들어갔다.
한숨 돌린 김한별은 장태산을 찾았다.
문득 그가 보고 싶었다.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껏 보기 힘든 남자.
김한별은 마을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걸음을 멈췄다.
깊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는 시각.
진한 밀림의 어둠을 물리고 곧 붉은 동이 터올 시간이다.
“아!”
김한별은 오랜만에 찾아온 예민한 감각에 신음을 토하며 두 눈을 감았다.
잊고 있었던 자신의 능력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아마존이 이렇게 위험한 곳인 줄 미처 몰랐다.
한창 예민했던 과거 같았다면 얼마간의 미래는 쉽게 봤을 것이다.
그러나 꼭 누군가 고의로 훼방을 하는 것처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미래.
부연 안개처럼 맑지 않은 기운이 그나마 자각하던 김한별의 능력을 제한했다.
그렇게 막혀 있던 제약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듯 밝아지며 김한별에게 보이기 시작하는 장면.
은빛 호수와 찬란한 황금빛 나무 정령들.
그리고.
“……여왕!”
***
전사? 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나를 두고 ‘나의 전사여’라고 말했다.
자욱한 안개가 뒤덮은 호수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여성체.
아마존 원주민 여성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단단한 체격에 살짝 그을린 건강한 피부, 공들여 매만진 가죽으로 가린 상체와 하체.
어깨에는 알 수 없는 문양과 글자 같은 게 새겨진 활을 메고 손에는 창을 들고 있다.
머리카락은 나무껍질로 보이는 끈 같은 걸로 묶었고 눈빛은 맑고 시원했다.
주변으로 경계 없이 확 퍼져 있는 강렬한 기운.
아무래도 신이 확실했다.
그것도 지금까지 대면한 적이 없는 고위 신.
- 최상급 정령계 신과 조우했습니다.
정령계 신?
과거 인간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모습은 인간에 가까웠지만 그녀에게서 풍기는 순수한 기운은 인간의 것과 달랐다.
아마존 밀림에서 느껴졌던 넘치던 그 기운 자체였다.
더욱이 난 정령사다.
낯선 묘정의 여성체에게서 진한 친밀감이 느껴졌다.
“누구십니까?”
나 역시 최상급 존재는 처음 만났다.
비록 정령이라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보통 정령과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말투가 알아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녀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파아아앗.
그 순간 예기치 못한 빛이 날 감쌌다.
그리고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은!”
단지 눈 한번 깜빡였을 뿐인데 공간이 바뀌어 있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거대한 강폭의 물이 빠르게 흘렀다.
물빛은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몸이 땅 위에 서 있지 않고 허공에 뜬 채 지상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줄기 옆으로 빽빽한 원시 밀림이 존재했다.
꾸게게게게게게.
까우우 까우우우우.
이름 모를 동물과 새들의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며 서라운드로 들렸다.
촤아아앗 촤아아아앗.
강에는 아마존에 산다는 분홍 돌고래 ‘보토’들이 무리지어 헤엄쳤다.
비가 내렸다 개인 듯 거대한 무지개가 허공과 허공을 잇는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었다.
21세기 아마존에서는 마주하기 힘든 장관.
사라라라라랏.
생기 넘치는 푸른 기운을 가득 담은 바람이 옷자락을 스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평화 그 자체였다.
- 이곳은 나의 땅…… 나의 어머니. 내 사랑이자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공간…… 영혼들이 전하는 노래로 가득한 나의 심장이다.
최상급 정령계 신이 노래처럼 시를 읊조렸다.
내 옆에 서 있는 그녀는 따뜻함 가득한 눈빛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아마존을 바라봤다.
“아름답군요.”
다른 미사여구가 필요 없었다.
인간의 문명이 닿지 않은 태고의 아마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인간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근원적 고향이 있다면 이곳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인간들도 축복을 받아 번성했다. 욕심 없는 자들은 하루를 행복하게 살았다. 강에서는 맛있는 물고기가 잡혔다. 밀림에서는 과일이 언제나 풍성했다. 양육하기에 모든 것이 알맞았다.
정령계 여신은 마치 꿈을 꾸듯 노래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밀림은 많은 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어느 곳이 되었든 생존의 위험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에덴을 꿈꾸지 않는 자들은 자기 힘으로 노력해 역경을 이겨내며 성장하는 법.
정령계 신의 말처럼 이곳은 그야말로 양육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 확실했다.
그런데 진짜 정체가…….
- 나의 전사여, 수많은 세월 동안 모든 존재들이 나를 ‘숲의 마술사’, ‘강의 수호자’ 그리고 ‘여왕’이라 불러왔다.
나의 짐작이 맞았다.
원주민들이 말하던 그 여왕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른 인간들 눈에는 결코 보일 리 없는 여왕의 실체.
빙긋 그녀가 웃었다.
- 미안하구나.
“네?”
갑작스런 여왕의 사과.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오늘 여왕을 처음 봤다.
- 내가 너를 이곳으로 불렀느니라.
“!!!”
아마존 여왕이 나를 계획적으로 이곳으로 인도했음을 고백했다.
미래를 읽어내는 능력이 있었던 김한별.
그녀가 무기력하게 이번 사건에 당한 이유를 알게 됐다.
나를 아마존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여왕의 계책.
그 이유가 듣고 싶었다.
- 욕심이 장성하면 그 끝을 알 수 없는 법. 번성하라는 신의 소망에 응답하던 인간들의 욕망은 신들도 두렵게 하였다. 자신의 폐에 들어가 피와 살이 되는 밀림을 그들은 값싼 이익에 팔아먹었다. 보거라…….
파아앗.
또 한 번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으음…….”
입에서 바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름답다는 말은 내뱉을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아마존이 변해 있었다.
깨끗했던 강은 새카만 기름때가 뒤덮고 느릿느릿 흘렀다.
강 옆으로 즐비한 공장에서 흘러나온 각종 폐수들이 여과 없이 강으로 흘러들었다.
둥둥 떠다니는 플라스틱 폐기물들이 고기들을 대신했다.
울창했던 밀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곳곳이 파괴되어 속살을 훤히 드러냈다.
밀림을 태우며 번지는 화마에 동물들이 쫓기듯 내달리며 매운 눈물을 흘리고 또 타죽었다.
분홍 돌고래들은 오염된 강물을 거슬러 오르며 본래 색을 잃고 피부병에 걸려 시름했다.
밀림의 자취가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소떼가 남은 풀을 뜯으며 분뇨로 땅을 오염시켰다.
광물을 채취하는 광산업자들은 본격적으로 크고 작은 산들을 헤집었다.
펼쳐진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교차한 밀림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듯 전혀 다른 세상처럼 생각됐다.
- 모든 존재가 돌고 돈다는 걸 인간들은 잊었다. 오늘 누리는 잠깐의 행복을 위해 미래는 생각지 않는 어리석음이 너희들을 언젠가 벼랑 끝으로 인도할 것이다.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는 여왕의 경고.
나도 그들 오염자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 땅과 바다가 분노했다. 지진과 큰물로 일어나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을 파괴할 날을 그들이 계획하기 시작했다. 감히 너희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그들은 생각했다. 과거 이 땅을 지배했던 거대한 짐승들마저 소멸시켰던 그 방법을…….
공룡의 멸망처럼 인간들의 종말을 준비한다는 땅과 바다.
정령계 최상급 신인 아마존 여왕은 그 비밀스러운 소식을 이미 들어 알고 있는 듯했다.
- 인간들이 만들어 낸 사라지지 않는 더러운 기운들이 지구를 뒤덮었다. 분노한 땅은 타들어가는 불길로 보복할 것이다. 태고부터 청결함을 소망해 온 바다 또한 그러할 것……. 어리석은 인간들만 땅과 바다가 인간의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모든 신들과 정령들은 살아 있는 모든 만물에 공평하다. 아파 신음하는 다른 생명들을 위해……. 기꺼이 인간들을 벌할 것이다.
쿠구궁!
심장을 강타하는 여왕의 경고.
일말의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100년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인간들이 매일 벌이는 일들에 대해 부정할 수 없었다.
잠깐의 편리함을 위해 수만 년 동안 보관해야 하는 오염 덩어리들은 생산해 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극단적 이기주의의 공범들이었다.
후손들을 위해 한 달에 몇 천 원 부담하는 것도 아까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여왕이시여…….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여왕은 말과 달리 인간을 사랑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러니 나를 불러 땅과 바다의 마음을 이렇게 낱낱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땅과 바다 입장이어도 인간이 싫을 것 같았다.
여왕이 나를 돌아봤다.
- 눈물을 흘려 주거라. 진심으로 이 땅과 바다를 위해 속죄의 눈물을 흘려 주거라. 저기 아파 울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너만이라도 진심으로 아파해야 한다. 그 눈물이 너의 뜻하는 일에 힘을 더해 줄 것이다.
“!!!”
여왕이 나의 계획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
나의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성과 양심이 없는 이웃집 개들을 작신 패는 것.
성장을 위해 세상에 독가스와 폐기물을 쏟아내는 이웃의 큰 개.
화산지대에 원자력을 설치한 무모한 똥개.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양심 없는 이웃집 개들을 몽둥이로 패는 게 나의 남은 미래이고 뜻하는 바다.
- 나의 전사여……. 너에게 주어진 축복을 사용해 아파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거라. 나 또한 너를 지켜보고 있는 자들 중 하나. 성스러운 축복이 너에게 임할 것이다.
여왕의 축복이 내려졌다.
나의 숨은 능력에 대해 여왕은 알고 있다.
마법을 비롯한 여러 능력을 한껏 사용해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계시처럼 들렸다.
스윽.
여왕이 자신의 어깨에 메고 있던 대형 활을 벗어 건네줬다.
“이것은…….”
- 고마움을 대신해 내가 주는 선물이다. 어느 날……. 이 활을 쓸 때가 올 것이다.
얼떨결에 활을 받아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
파아아앗.
활을 잡는 순간 손에 느껴지는 강맹한 기운.
신물(神物)다운 신물을 처음으로 얻었다.
역시 공짜는 아니었다.
아마존의 여왕을 위해 아파하는 자연을 위해 엄청 눈물을 흘려야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아파하는 모든 존재들의 눈물을 닦아 주겠습니다!”
맹세했다.
너그러운 미소로 웃는 여왕.
- 나의 전사여. 바람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전진하라. 네가 누군가를 위해 흘리는 진실한 눈물이, 네 자신을 위한 축복이자 무기가 될 것이다. 나의 전사여……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것들을 기억하라.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기꺼이 사랑하거라……. 그게 나의 마지막 당부이니라.
여왕의 말이 에코처럼 울렸다.
그리고.
파아앗.
빛과 함께 사라져 버린 여왕의 그림자.
처음 산책하던 그 호수와 숲으로 돌아왔다.
모든 게 환상 속의 경험 같았지만 손에 들린 활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마지막에…… 여왕이 눈물을 흘렸어.”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기꺼이 사랑하라는 여왕의 마지막 당부.
아직은 명확히 이해하기 힘든 수수깨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마음은 한없이 따스해졌다.
이 지구를 위해 요구한 나의 땀과 눈물이 적지 않았다.
파스스스스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찬란하게 부서지는 빛을 뿌리며 떠올랐다.
절망의 어둠을 꿰뚫고 매일 세상을 밝히는 희망의 메신저, 태양.
동이 터오는 방향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서 쏟아지는 태양빛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