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장. 땅 없어요?
“러시아?”
“러시아로 출국했습니다.”
“무슨 일로?”
“정보에 의하면 푸틴을 만난 것 같습니다.”
“푸틴?”
오정 그룹 회장실.
임성철 회장은 장한수 실장의 보고를 받았다.
몇 달 사이 확연히 눈에 띄게 노쇠해 버린 임성철.
고민이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었다.
장태산이 내민 손을 잡기 위한 대가를 고민했다.
고민이 깊어질수록 늙은 몸은 피곤했다.
사업은 안정 궤도였지만 몇 년 뒤를 예측하기 힘들었다.
세계를 호령하던 대기업들이 작은 실수 한 번으로도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앙상한 뼈대만 남기고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10년이 아니라 5년을 내다보는 먹거리도 찾기가 벅찼다.
100만 명에 달하는 직원들과 그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
대기업 총수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평범한 직장인들처럼 쉬는 날 쉬고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여유조차 없었다.
겉보기에는 그 누구보다 화려하지만 외로운 직업이었다.
연예인들처럼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을 통해 온 국민에게 알려졌다.
부러워할 만한 부는 움켜쥐었지만 그런 만큼 삶에서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았다.
이제는 뒤로 물러나 쉬고 싶은 심정의 임성철 회장.
아직 제 몫을 충분히 해내지 못하는 자식들로 인해 주름이 깊어졌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상당히 친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대체 장태산 그 녀석 뭐하는 놈이야? 동룡 정도는 우습다는 거지?”
재계 순위에서는 한참 뒤에 있지만 그래도 이름깨나 있는 그룹이었다.
안아와 천일 그리고 삼룡자동차에 이어 동룡까지 장태산 손아귀에 의해 작업됐다.
“주순자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 발을 뺐습니다. 저희 쪽 경고도 무시하던 주순자인데……. 뭔가 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순자가 고집을 꺾을 정도라……. 정말 대단해.”
풍문으로만 들었던 주순자.
조근영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하는 권력의 진짜 주인.
임성철 회장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과거처럼 정치인들이 직접 자금을 요청하지 않았다.
차떼기로 홍역을 치른 정치인들과 경제인들.
최대한 조심하며 보이지 않게 지원을 했다.
정권의 눈 밖에 나면 그룹을 운영하는 데 피곤해졌다.
아무리 오정이라도 해도 입장이 다를 게 없었다.
행정부가 가진 힘은 일반인의 상식을 초월했다.
하지만 장태산은 달랐다.
지난 최병박 정권에서도 작심하고 노렸지만 그 모든 감시를 뚫고 무사히 지냈다.
이번 조근영 정권도 마찬가지.
새롭게 권력을 잡은 자들은 만만한 맛보기 상대로 장태산을 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대상을 잘못 정했다.
임성철 회장도 쉽게 만남을 가질 수 없는 푸틴을 친구처럼 만난다는 장태산.
“TS 그룹 움직임도 수상합니다.
“뭐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관련 중소기업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야?”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그리고 에칭가스입니다.”
“……도대체 꿍꿍이가 뭐야? 그것들 전부 일본에서 생산되는 것들이잖아. 설마 반도체 회사라도 차릴 건 아니겠지?”
임성철은 어이가 없었다.
모두 다 오정 반도체에 공급되는 핵심 재료들이었다.
그걸 국내 중소기업과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 들었다.
함부로 라인을 바꿀 수 없는 고난이도 공정.
일본 기업들이 수십 년 동안 개발하고 발전시켜 온 부분이다.
“자세한 이유는 아직 파악 못했습니다.
“‘소금 먹은 놈이 물켠다’고 했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이 녀석아 이번에는 또 어떤 꿍꿍이더냐.’
신출귀몰한 홍길동도 아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장애물을 넘나들고 있는 장태산.
동룡의 목줄을 움켜쥔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여러 곳에서 사건을 벌였다.
“푸틴을 만난 것도 그 이유이겠지. 자네 생각은 어때?”
“잘 모르겠습니다…….”
천하의 장한수 실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끙.”
임성철 회장이 신음을 흘렸다.
도저히 자신의 머리로는 짐작할 수 없는 장태산의 행동과 사고방식이었다.
잘 나가는 투자자라지만 국내 투자는 내실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월가의 자본가들과 대단히 친밀했다.
임성철 회장 눈에는 자선가 수준으로 투자금을 지불했다.
그럼에도 화수분처럼 장태산의 자금은 결코 마르지 않았다.
투자 회사 대표가 아랫사람으로 바뀌었다.
본인은 회장으로 불렸다.
임성철도 조심하는 어둠 속 재계 거물의 등장.
그런 장태산이 또다시 뭔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
“러시아에서 뭘 하는지 자세히 좀 알아봐.”
“지사와 국정원을 통해 정보를 받고 있습니다.”
“그걸로는 안 돼. 러시아 정부 쪽 정보 라인 있지?”
“좀 더 세밀하게 살피겠습니다.”
“그래, 자네가 직접 챙겨. 그놈 어디로 튀는지 잘 봐.”
“알겠습니다.”
‘조만간 만나야겠어. 이제는 결정해야지.’
점점 더 쇠약해져 가는 기운이 느껴졌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장태산과의 만남.
임성철 회장의 잔뜩 찌푸려진 이마는 쉽게 펴지지 않았다.
***
“지금 온다고?”
“곧 비행기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이거 긴장되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지사님.”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공항의 귀빈실에서 두 명의 남자가 긴장한 채 대화를 나눴다.
VIP가 곧 도착할 예정이다.
차르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은 상황.
자신과 피를 나눈 형제가 찾아갈 예정이니 차르를 대하듯 대우하라는 명령.
극동 연방지구 연해주 주지사인 올레그 보로비예프와 블라디보스토크 시장 세르게이 알리하노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차르가 속해 있는 통합러시아당 이름으로 주시자와 시장에 당선됐다.
민선 시장이지만 차르의 말 한마디면 목이 날아갔다.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가는 밤사이에 총살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차르의 권력은 확실했다.
그런 차르가 피를 나눈 형제라고 똑똑히 말했다.
러시아에서는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의 사이가 아니면 쓰지 않는 말이었다.
‘분명 투자라고 했어. 투자!’
올레그 보로비예프는 두려움과 동시에 한 줄기 희망을 보고 있었다.
가까운 사하 공화국 대통령과 친분이 많았다.
그에게 들었던 VIP에 대한 정보.
쓸모없이 버려진 땅을 99년 동안 임차하기로 한 인물이었다.
그것도 거액으로.
차르도 넌지시 말을 흘렸다.
친구에게 최대한의 투자를 받아보라는 언질.
특별히 올레그 보로비예프의 능력을 지켜보겠다고 말을 덧붙였다.
기회였다.
러시아 전체의 0.92% 달하는 16만 4700킬로 제곱미터의 땅을 소유했지만 인구는 겨우 200만에 불과했다.
대부분 산악 지형에 산림지대인 연해주.
추운 겨울이 유난히 길고 여름은 짧고 건조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워낙 극동이었다.
얼마 전까지 사람들이 찾지 않던 추운 항구 도시.
요즘 들어서야 투자가 늘어났다.
러시아 정부는 국동 개발을 국가 역점 사업으로 선정했다.
미래 중요성을 염두한 것이다.
러시아가 태평양 함대의 거점이기도 했고, 2012년 APEC을 계기로 러시아 제 3의 수도로 삼아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외국 자본 직접 투자는 아직도 미미했다.
‘한국인 투자자라고 했으니……. 잘만 엮으면.’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인과 관련이 많았다.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
베이징 조약으로 획득한 도시가 커지면서 임시정부격인 대한 국민 의회가 설립되기도 한 곳이었다.
지금도 주변 곳곳의 유적지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때는 6만 명이 넘는 한인들이 살았던 블라디보스토크.
“주지사님. 다니엘 장은 도대체 어떤 한국인입니까?”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이 궁금한 듯 물었다.
“몰라. 다만……. 모스크바 놀이 공원이 VIP 작품이라더군.”
“오! 모스크바 놀이동산!”
시장 세르게이 알리하노프는 진심으로 놀랐다.
얼마 전 가족 여행으로 모스크바에 개장한 놀이동산에 다녀왔다.
미국의 디즈니월드에 버금가는 엄청난 시설이었다.
자부심과 함께 이틀 동안이나 즐겁게 놀다왔던 모스크바 놀이동산.
‘만약 이곳에도 놀이동산을 만들어 진다면…….’
시장은 살짝 욕심이 생겼다.
인구가 정체됐다.
5성급 호텔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공사가 지지부진했다.
APEC으로 그나마 이름이 알려졌지만 무언가 핵심적인 부분이 부족했다.
60만 명이 거주하는 시내도 걸어서 구경이 가능할 정도로 중심가가 작았다.
극동의 샌프란시스코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추진 중이지만 따라오는 투자는 미약했다.
1년에 들어오는 해외 자본 투자는 도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그그그그극.
그사이 자가용 비행기 한 대가 활주로에 가뿐하게 내렸다.
미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제트 자가용 비행기.
“움직이자고.”
“넵!”
주지사 올레그 보로비예프는 슈트를 매만졌다.
반쯤 벗겨진 머리의 머리칼도 손으로 정리했다.
차르의 방문 시와 동급 수준으로 최선을 다했다.
두 사람 모두 결코 어떤 식으로든 한국인 VIP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
“내리시면 됩니다.”
승무원이 친절하게 웃었다.
푸틴을 만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왔다.
푸틴과 사냥을 하고 난 뒤 하룻밤 술을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러시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솔직히 말했다.
푸틴이 ‘왜’냐고 물었다.
많은 걸 다 말할 수는 없었다.
2019년에 시작된 일본의 치졸한 보복에 한국 경제가 위기를 맞는다.
그런 국운에 관한 내용까지 밝힐 수는 없었다.
한국인들이 100년 전처럼 자신들 발아래 엎드리며 구걸하는 걸 기대하는 아베와 일본인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루아침에 뒤통수를 때렸다.
2019년 당시에 그 사태를 두고 기해왜란이라 말했을 정도다.
글로벌 경제 사슬 체제를 거부하던 쪽바리들.
입으로는 세계 자유 경제를 부르짖으며 뒤로는 온갖 비열한 짓을 다 했다.
한국 내에서도 토착왜구들과 친일파들이 주축이 되어 당시 정부에 매질을 가했다.
특히 가장 선두에 선 조국일보는 확실히 자신의 색을 드러냈다.
일본 불매운동을 어리석고 감정적인 짓이라 명명하며 구한말 친일파 지식인들처럼 행동했다.
그 당시 흐릿했던 친일파가 누군지 확실히 드러났다.
수구친일파 정당은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정부를 비난했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과거 세력이 되살아나 발목을 잡았다.
공작소에 속한 어둠의 세력들도 합류했다.
다시 떠올려도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결코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 당할 수 없는 일본의 농락.
푸틴은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종이서류보다 더 믿음이 가는 그의 한 마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헌신짝처럼 등을 찌르는 쪽바리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
차박차박.
자가용 비행기에서 내렸다.
“다니엘 장 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연해주 주지사 올레그 보로비예프입니다.”
“환영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장 세르게이 알리하노프입니다!”
러시아 중년 아저씨 두 명이 활짝 웃는 얼굴로 환대를 했다.
그들 옆에 서 있던 여성 통역가가 막 입을 열려고 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니엘 장이라고 합니다.”
유창한 러시아어로 인사를 하고 손을 내밀었다.
“완벽한 러시아어입니다!”
“대단합니다!”
두 명의 중년 아저씨가 놀라워하며 악수를 했다.
통역 담당 여성은 당황한 눈빛을 보냈다.
“공기가 시원합니다.”
4월을 향해가는 블라디보스토크.
기분 좋게 쌀쌀했다.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활주로에는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해외 정상들 방문 시 수준의 의전이었다.
모든 국제공항에서 이런 의전을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러시아에서만 가능한 일.
부우웅.
조수석 뒷자리에 앉았다.
시장은 조수석, 내 옆에는 연해주 주지사가 자리를 잡았다.
차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도시의 첫 인상이 어떻습니까?”
무뚝뚝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러시아 주지사가 비즈니스맨처럼 굴었다.
주지사가 갖는 파워는 대단했지만 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나를 대했다.
푸틴 형님이 단단히 주의를 준 티가 났다.
“자연 경관이 좋습니다.”
“하하. 이곳이 공기 하나는 깨끗합니다.”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투자가 조금만 더 이루어진다면…… 엄청난 이점을 품고 있는 도시인데…….”
의도적으로 말끝을 살짝 흐렸다.
꼴깍. 꿀꺽.
두 남자에게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와주십시오!”
주지사가 까놓고 입을 열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시청에 가시면 제가 자세히 투자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시장이 활짝 웃으며 미끼를 던졌다.
“국제공항이라고 하기에는 시설이 낙후됐습니다. 시설 확충에 재무적으로 투자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공항 규모를 엄청나게 키울 생각이다.
차는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로 향했다.
곧바로 눈앞에 나타난 금문교.
도시와 도시가 연결됐다.
생각보다 입지가 괜찮았다.
이스탄불을 꿈꾸는 블라디보스토크.
“저쪽 경관이 좋군요. 5성급 호텔 자리로 좋겠습니다. 건설 가능합니까?”
이곳에 오기 전 블라디보스토크 지도를 살펴봤다.
내항이 바라다 보이는 햇살이 잘 드는 명당터를 가리켰다.
“물론입니다!”
러시아에서 정부의가 갖는 힘은 막강했다.
원하면 바대로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내항이 비좁습니다. 새로운 항구에 대해서 논의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관광 인프라가 뒤처졌습니다. 놀이 공원도 추진하도록 하죠.”
“말만 들어도 행복합니다!”
주지사와 시장은 금세 내 열성 신도가 됐다.
“농장터가 필요합니다. 99년 정도로 장기 임차 가능한 곳 있습니까? 쌀과 밀을 재배할까 하는데.”
미래를 위해 식량 주권도 확보할 생각이었다.
이곳 연해주는 과거 배고팠던 대한민국 조상님들의 한과 서러움의 눈물로 적셔졌던 곳.
그들의 후손들을 위해 땅을 구입할 것이다.
“농경지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요? 다행입니다. 땅이 없으면 다른 곳을 알아보려 했습니다.”
살짝 불안감도 줬다.
밀당은 언제나 소중한 경영 스킬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면 없던 땅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러시아 주지사 아저씨, 마음에 든다.
“그리고 공장부지도 필요합니다.”
“부지는 규모는 어느 정도…….”
시장 아저씨가 뜨거운 시선으로 날 봤다.
인구를 늘리는 데 공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직도 일자리가 부족한 러시아.
“일단 소소하게 1000만 세제곱미터부터 시작하죠.”
“헙!”
한국 기준으로 300만 평.
이건 공장 터 하나로 도시를 조성하겠다는 의미였다.
“왜요? 땅 없어요?”
“있습니다! 땅 있습니다요!!!”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