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장. 복수의 시간들 (1)
“이, 이게 뭐야!”
이른 아침 분주하기만 한 출근 시간.
엘자 경제연구원 사업전략2부문 안미소 대리.
그녀는 사내 게시판에 붙어 있는 인사 발령에 관한 게시물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 사업전략2부문 사원 고연지 엘자 화학 대외 사업팀 팀장 발령.
- 사업전략2부문 대리 안미소 엘자 화학 대외 사업팀 팀원 발령.
절대 말이 안 됐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어떤 언질도 없었다.
그리고 곧 과장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던 안미소 대리.
자신이 아닌 고연지가 과장급 팀장으로 발령이 난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인쇄가 잘못 됐을 리도 없다.
대기업에서 인사이동에 있어 실수란 용납할 수 없는 일.
문제는.
“고연지 사원…… 사실 회장님 딸이었다며?”
“그 소문이 진짜였네…….”
“으으으. 나 잘못 보인 거 없지?”
“엘자 그룹도 딸들을 경영에 참여시키다니…… 개벽이네.”
안미소 등 뒤쪽으로 서 있던 직원들 입을 통해 흘러나온 내용.
너나할 것 없이 사방에서 소곤거렸다.
‘회…… 장 딸!’
게시물 앞에 서 있던 안미소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고연지가 신입 사원으로 입사했을 당시부터 줄곧 눈엣가시처럼 괴롭혀왔던 그녀.
자신보다 눈에 띄게 예쁘기도 했지만 신입 같지 않게 일처리도 빠르고 깔끔했다.
국문과 출신답지 않게 여러 경제 상식도 풍부했다.
학벌도 한국대.
SKY 출신이 아닌 안미소는 고연지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결하기 난감하고 신입에게 벅찬 일을 주로 던져주며 은근히 갈궜다.
잘났다고 고개 쳐드는 신입사원들 조용히 태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몇몇 직원들과 단합해 고연지를 여러 차례 물 먹여 온 안미소.
어느 날 사표를 던지고 뛰쳐나갈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보통 신입들 같지 않게 독하게 버티던 고연지.
그녀의 밝혀진 신분 앞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발령 명단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연지가 자신을 콕 찍었다는 걸.
‘나갈 수 없어! 여기서 버텨야 돼!’
안미소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이를 악물었다.
평소와 다름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평소 일찍 출근하는 걸로 정평이 난 팀장 얼굴이 먼저 보였다.
“팀장님!!!”
“왔어.”
다른 때 같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아침 인사를 받는 팀장.
“방금 인사 발령 보고 왔습니다. 어떻게 제 의견은 묻지도 않고 그럴 수 있죠? 제가 왜 아무것도 모르는 고연지 씨 밑에서 일해야 되냐구요!”
안미소는 날카롭게 따지듯 물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두 사람.
팀장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사표 써.”
“네???”
“회사에서 인사 발령이 났는데 마음에 안 들면 나가야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상식 아냐? 여기가 안 대리 투정 부리는 곳인 줄 알아! 여긴 조직이야 조직!”
팀장이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티, 팀장님…….”
평소와 다른 팀장의 반응에 안미소가 더 당황했다.
함께 일하는 동안 평생 끌고 가겠다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팀장이었다.
둘만이 공유한 비밀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사표를 권하는 팀장.
“내가 써줄까?”
“…….”
팀장은 일절 틈을 보이지 않았다.
“연지 씨에 대해서 안 대리가 너무한 거 다 알잖아. 가서……. 반성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죠! 고연지 씨 일 못하는 건 저희 팀원 다 잘 알잖아요! 그런데 그 멍청한 애 밑에서 팀원으로 일하라는 건가요? 그래요, 차라리 사표를 쓰겠어요!”
안미소 역시 강하게 나갔다.
죽어도 굽힐 수 없는 자존심.
“그 말 책임질 수 있나요 안 대리님.”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
“헛!”
몸을 돌리던 안미소는 깜짝 놀랐다.
고연지가 어느새 출근해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
평범한 사원일 때와 다르게 고연지 몸에서 자연스러운 포스가 너울거렸다.
오랫동안 제대로 교육 받아온 이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그런 기세.
꿀꺽.
당황한 안미소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동안 자신이 봐왔던 어리숙한 고연지가 아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든 가방도 모두 다 명품.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와, 왔어요. 고 팀장.”
팀장이 단번에 고연지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당장 커피 심부름을 시키던 어제와 완전히 다른 자세.
“팀장님,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많은 가르침…….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고연지.
팀장 얼굴 또한 안미소의 표정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감히 회장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희롱 발언을 농담처럼 수시로 던졌던 팀장.
다가올 앞날에 먹구름이 잔뜩 끼는 게 훤히 보였다.
“안미소 대리님, 화학 본사 주소 알죠?”
“……네.”
금세 꼬리를 마는 안미소.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고연지가 쥐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고자룡 회장의 딸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제가 배울 게 더 있어서 같이 발령 내 달라고 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안미소에게도 고개를 짧게 숙이는 고연지.
평소 웃던 모습이 아니었다.
직급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
사실이었다.
팀장 고연지는 정말 팀장이 돼 있었다.
“그럼.”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는 고연지.
“하아…….”
“아…….”
등 뒤쪽에서 흘러나오는 두 마디 신음.
돌아서는 고연지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
“장태산 그 자식 뭐예요? 날 상대로 인생 교육을 시키겠다고요? 참나…….”
“조금만 참아. 복수할 날이 곧 올 거야.”
“정말 피는 못 속인다니까요. 천박한 지 어미 닮아서…….”
용창승의 이모인 윤지숙은 화가 머리끝까지 찼다.
여동생이 간곡히 부탁했지만 결국 조카를 빼내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룹 사모라고 가족 행사에서 고개깨나 빳빳이 들고 살아온 윤지숙.
그런 지난 시간들이 낯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여동생에게 큰소리를 뻥뻥 쳤기에 더욱 그랬다.
“나만 믿어. 그년이 빼돌린 아버지 재산 모두 가져올 테니까.”
“정말요? 나 요즘 눈꼴시어서 볼 수가 없다니까요. 잘나가는 사모들 그 집에 줄 대려고 장난 아니에요.”
질투심이 넘치는 윤지숙은 코맹맹이 목소리로 남편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평일임에도 회사로 쫓아와 회장실에 앉아 장씨 집안을 씹으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이복 여동생 일가가 보유한 엄청난 재산에 눈독을 들였다.
‘싸그리 죽여서라도 찾아와야 해!’
대웅 건설을 손에 쥐면 휘두를 수 있는 힘의 파급 효과가 달라진다.
한국 사회에서 재력은 곧 힘.
평등과 공평이라는 가치는 상류 사회에서 통하지 않았다.
적당한 시기가 오면 주순자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한꺼번에 처리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웬만해서 돈으로 안 되는 건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현태는 곧 도래할 그 순간만 생각해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회, 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콰다다당.
오붓하게 대화를 나누던 회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비서실장이 노크도 없이 거칠게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얼굴은 사색이 된 상태.
“무슨 일이야!”
와이프와 중요한 사담을 나누며 퍼터를 들고 퍼팅 연습을 하고 있던 주현태.
갑작스러운 소란에 인상을 찌푸렸다.
주말에 중요한 인사들과 골프 예약이 되어 있었다.
접대 골프 약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필드에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한 게임 하고 나면 몸이 나른하게 풀리고 좋을 것이다.
또 뒤에 이어지는 음주가무와 뜨거운 시간들.
아내와의 대화 중에도 몸이 달아오를 정도로 기대되는 시간들이었다.
그런 흥이 와장창 깨졌다.
“……강등됐습니다!”
“뭐가!”
“신용등급이 정크 본드 수준이 됐습니다!”
“가, 강등?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 돼! 갑자기 강등이라니 누가 그런 짓을 해!”
주현태 얼굴이 사색이 됐다.
회사채 신용 수준은 곧 회사의 목숨과 같았다.
대웅 건설 인수를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신용 등급을 유지해야만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 자본도 들어와 있는 상태.
“마디스 압력을 받고 대한신용평가사에서 절하한 것 같습니다!”
“마디스! 그놈들이 왜……. 헛!”
당황한 주현태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갑자기 스친 한 놈의 얼굴.
“여보 왜 그래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래요?”
윤지숙도 회사 경영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다.
언뜻 들어도 예사롭지 않은 사건.
‘자, 장태산! 네놈 짓이렷다!’
장태산이 아니고서는 주순자를 뒷배로 삼은 주현태를 이렇게 자극할 자가 없었다.
마디스 뒤에는 월가의 자본가들이 버티고 있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자.
장태산!
‘놈을 우습게 봤어! 크으.’
주현태는 목으로 넘어오는 쓴 물에 손바닥으로 입을 닦았다.
대웅 건설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룡 그룹 산하 기업들의 거의 모든 주식을 담보로 잡혔다.
그나마 탄탄한 사업체는 전환사채까지 발행한 상황.
나중에 주식으로 바꿔줘야 하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까지 동원 됐다.
그런 상황에서 신용등급이 이렇게까지 강등됐다면 기다리는 건 파산 밖에 없었다.
‘막아야 해! 어떻게든!!!’
주현태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여보…… 이게 무슨…….”
“좀 닥치고 있어!”
주현태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자체 현금이 일단 1조가 있으니까 버틸 수는 있는데……. 문제는 기존 은행 채무인데…….’
예상치 못했던 생돈이 나가게 생겼다.
하이에나 같은 정치권과 언론, 행정부 관리들이 돈을 더 요구할 게 뻔했다.
인수 주식 수를 줄여야 할 수도 있다.
당장 이 위기만 벗어나면…….
“회, 회장님!!!”
그때 열린 문으로 재무이사가 뛰어 들어왔다.
“오 이사는 또 왜!”
불길함을 애써 부정하며 주현태가 소리쳤다.
“……내일 돌아오는 우리들 은행 만기 대출 연장이 거절 됐습니다!”
“뭐, 뭐라고!! 연장 거절!”
우려했던 일이 바로 터졌다.
마치 누군가 기획이라도 한 듯 터지는 악재.
“얼마야!”
“800억입니다.”
“크으…….”
1조 중에 800억은 그렇게 크지 않은 비중이다.
하지만 대웅 건설 인수에는 치명적인 자금.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은행에서 대출 연장이 거부됐다고 소문이 나면 다른 은행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주순자라고 해도 막아줄 수 없는 최악의 사태.
“현준규 행장 연결해!”
“넵!”
재무이사가 급히 스마트폰을 들고 통화를 시도했다.
“행장님 동룡의…….”
“줘!”
빼앗듯 낚아챈 스마트폰을 들고 직접 통화하는 주현태.
“현 행장 나 주현태요.”
- 안녕하십니까. 주 회장님.
“지금 안녕하냐는 말이 나옵니까? 지금 이게 무슨 심보입니까? 어제까지 아무 말 없다 갑자기 만기 연장 거절이라니! 제정신이 맞습니까!!!”
주현태는 쌓인 스트레스를 풀 듯 막나갔다.
은행장이 이렇게 나올 정도라면 뒤에 뭔가 있다는 소리.
- 대출 계약서대로 이행했을 뿐입니다.
의외로 차분한 현준규 회장의 목소리.
“뭐라고요? 무슨 계약 내용 말입니까!”
- 기업신용등급이 B등급 이하로 내려가면 만기 연장을 거절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거절할 수 있다는 내용이지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잖습니까. 현 행장…… 님……. 이번 한번만 봐줘요. 내가 섭섭지 않게 계산해 줄게요. 뭐 하고 싶으세요? 뒤도 봐드릴게요.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잖아요.”
주현태는 현준규를 어르고 달랬다.
- 법률과 은행 내부규칙 대로 처리할 뿐입니다. 그럼 이만.
“야! 현준규! 너 죽고 싶어!!!”
뚝.
주현태가 악을 쓰는 사이 통화는 종료됐다.
“으아아아! 이 개새끼를!!!”
와장창창창.
재무이사 스마트폰을 냅다 던져버리는 주현태.
누구 하나 눈이 돌아간 주현태를 말리지 못했다.
악마의 탈을 쓴 듯 일그러진 주현태의 얼굴에는 살기가 넘쳤다.
띠릿 띠릿 띠리리리~♬.
그때 주현태 개인 책상 위에 놓여있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직통 연락처를 알고 있는 인사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내 윤지숙이 스마트폰을 들어 건넸다.
모르는 번호다.
“누구야!”
신경질적으로 상대에게 화풀이를 하는 주현태.
- 외삼촌~ 접니다~. 사랑하는 조카 장태산~.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