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장. 한 번 해보시던가
“괜찮아요?”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지만…… 오늘은 심하네요.”
장주아가 친절한 질문에 쓴 입맛을 다셨다.
복학한 선배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 사심이 담겼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도촬까지 하는 줄은 몰랐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다행히 오빠가 나타났다.
도촬한 선배들은 다시 얼굴 보기 힘들 게 뻔했다.
“태산이 동생 맞죠?”
“네? 맞는데…… 누구세요?”
‘무슨 피부가…… 이렇게 좋아?’
허보영은 장태산의 여동생을 가까이서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변 친구들과 옷 입는 스타일로 보아 졸업반인 듯했다.
그런데 신입생보다 더 뽀송뽀송한 피부에 더 어려보이는 장태산의 여동생.
“로스쿨에 재학 중인 태산이 친구 허보영이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먼저 손을 내미는 허보영.
“미대 재학 중인 장주아라고 해요.”
‘성격이 좋네.’
장태산 친구라는 말에 활짝 웃는 장주아.
장주아의 밝은 미소와 은근히 풍기는 분위기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무기가 됐다.
같은 여자가 봐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
“학년이…….”
“올해 4학년이에요.”
“정말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피부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로스쿨생에…… 오빠 친구면 언니인데…… 말 놓으세요.”
‘예의도 바르고.’
장주아에 대한 허보영의 점수는 팍팍 올라갔다.
“그럴까?”
“네~.”
‘말도 잘 통하고.’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허보영은 장주아가 마음에 쏙 들었다.
말하는 것도 행동도 답답하지 않고 시원시원했다.
“오빠한테 혼나겠네. 짧은 치마 입었다고.”
“괜찮아요. 오빠도 짧은 치마 좋아해요.”
“……그래?”
허보영은 내심 오늘 백화점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오빠 은근 얼굴 따지고 집안 따지고 학벌도 따져요.”
“정말?”
‘얼굴, 집안, 학벌……? 그럼 나 정도면…….’
장주아 말에 허보영은 살짝 자신감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다방면 스펙을 자랑하는 여성은 드물었다.
아빠 허대부가 음지에 묻혀 있지만 쥐고 있는 현찰만 해도 수조가 넘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 회장님들도 아빠 앞에서는 어려워했다.
허보영의 외모도 배우 할 생각 없느냐며 몇 번 길거리 캐스팅을 받았을 정도.
학벌이야 이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빠지지 않았다.
“아직 점심 전이지?”
“보시다시피……. 엉망이 됐네요.”
웅성거리던 학생들 상당수가 이미 흩어진 뒤였다.
“같이 밥 먹을래? 언니가 쏠게.”
“정말요?”
“그럼~ 태산이 동생이라면 내 동생도 되잖아.”
“감사합니다.”
“얘들아. 여기 태산이 여동생 장주아.”
“안녕~ 난 권예림.”
“난 신은진.”
“안녕하세요. 미대 4학년 장주아라고 합니다.”
“오후에 수업 있어?”
“7교시 강의가 있어요.”
“그래? 그럼 밥 먹고 차도 마시자. 주아 친구들도 같이 가자.”
“네에!”
장주아 옆에서 주춤주춤 서 있던 친구들도 힘차게 답했다.
학식도 선배가 사 줄 때 맛이 더하는 법이다.
특히 로스쿨생들은 알아두면 나중에 쓸 만한 인맥이 될 수 있는 인재들.
4학년쯤 되면 이 정도 세상 사는 방법은 안다.
자박자박.
여학생들이 3층 식당으로 향했다.
허보영과 장주아는 나란히 걸었다.
“주아야. 오빠 여자 친구 있어?”
궁금했던 핵심 사항을 묻는 허보영.
“애인은 없어요.”
“진짜?”
“네~ 그런데 여자 친구들은 많아요.”
“마, 많아? 누구?”
자신도 모르게 허보영은 장태산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흐음……. 졸업식 때 소개받았던 엘자 그룹 연지 언니하고…….”
“엘자 그룹 고연지?”
“네~. 그리고 저에게 무척 잘해주셨던 오정의 윤아 언니가…….”
“뭐……? 오정의 그 막내딸 임윤아?”
허보영도 아빠에게 얘기를 들은 적 있는 오정의 임윤아.
“외국 언니들도 말해줘야 하나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생글거리며 웃는 장주아.
밝았던 허보영 얼굴에 금세 짙은 그늘이 순식간에 드리워졌다.
***
“증거 다 채증하셨죠?”
“네.”
“단톡방 대화자들도 모조리 고소하겠습니다.”
“네? 전부 다요?”
“그럼 그 쓰레기들을 놔둬요?”
“그게…….”
사건이 심각해지자 지구대에서 바로 경찰서로 이첩이 됐다.
한국대 교내에서 발생한 불법 도촬과 단톡방 성희롱 사건.
담당 형사 문동국은 눈앞의 변호사 말에 당황했다.
과장을 통해 서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대에서 관계자를 파견하겠다는 연락이었다.
문동국 형사는 죽을 맛이었다.
사건 내용은 명확했고 처분도 정해져 있었다.
증거가 확실한 만큼 조사해서 검찰에 넘기면 그만이었다.
구속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벌금형 이상은 확실했다.
문제는 한국대가 그냥 평범한 대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자들도 냄새 맡은 것 같은데…….’
과거처럼 대충 덮거나 틀어막는 게 점점 불가능해졌다.
언론사 기자들과 적당한 선에서 조율도 가능했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문제였다.
아무리 사건을 축소해도 사건에 해당한 내용이 삽시간에 퍼져버렸다.
엠바고라는 상부상조가 사라져갔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문동국 형사는 눈동자를 굴리며 출입문 쪽으로 시선을 뒀다.
피의자들은 일단 유치장에 넣었다.
시간을 벌려는 속셈.
“형사님, 저 바쁜 사람입니다.”
장태산 변호사.
한국대 법학과 출신이라고 밝혔다.
변호사 신분에 피해자 오빠라는 것까지 확인됐다.
“변호사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이쪽에도 절차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나이는 어려도 변호사였다.
문동국 형사는 최대한 흠 잡히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국대 출신 변호사들은 인맥이 짱짱했다.
괜히 선배 검사들한테 도움이라도 청하면 담당 형사들은 더 귀찮아진다.
저벅저벅.
그때 중년의 두 남자가 출입문으로 들어왔다.
입구에서 형사들에게 뭔가를 묻는가 싶더니 바로 문동국 쪽으로 다가왔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한국대 미술대학 학장 심철수라고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학장님.”
문동국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방금 전 있었던 사건의 피해자 쪽과…….”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어! 장태산! 자네가 왜?”
“그러는 교수님은 어쩐 일이십니까?”
“휴우. 예비역 놈들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다. 지금 학교 다 뒤집어지고 난리다.”
심철수는 형사 앞에 앉아 있는 장태산과 말을 주고받으며 한숨을 쉬었다.
올해 학장이 된 심철수 교수.
아직 학장이 되기에는 젊은 연배였지만 동료 교수들이 보낸 신임과 능력으로 미술대학 학장이 됐다.
“그래요?”
장태산이 빙그르르 웃으며 대꾸했다.
“두 분이…… 아시는 사이십니까?”
문동국 형사가 반색했다.
“네, 왜 그러십니까?”
심철수 교수가 의아하게 물었다.
“이쪽이 피해자분 오빠이자 변호인입니다.”
“어? 장태산…… 자네 변호사 됐어? 주아를 통해 합격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아직 졸업 안 했지?”
“네.”
“그나마 천만다행이네. 그래도 같은 학교 학생인데……. 자네, 미대와 인연도 깊잖아.”
심철수는 진심으로 한시름 놓았다.
예술대 학생들 단톡방까지 문제가 되면서 7명의 남학생들이 사건에 연루됐다.
앞이 캄캄했다.
국립대학이라 학생들 관리가 아주 깐깐했다.
연루된 7명 학생 모두 퇴학을 당하면 미술대 라인 하나가 쑥 빠지게 된다.
총장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최대한 조용히 이번 사건을 처리하라는 주문이었다.
“교수님, 제 여동생 일입니다.”
“……음.”
심철수는 난처한 듯 신음을 흘렸다.
자신도 아끼고 예뻐하는 미대의 보물 같은 장주아.
본능을 숨기지 못한 제자 놈들이 장주아를 놓고 일을 냈다.
아슬아슬한 사진을 찍고 그것을 단톡방에 공유하며 음탕한 말을 주고받은 것.
잠깐 풀렸던 분위기가 금세 무거워졌다.
“저랑 말씀 좀 나누시죠.”
“누구십니까?”
그때 심철수 교수와 함께 들어왔던 고급 슈트 차림의 남자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형사님, 조용하게 대화 좀 하고 싶은데.”
“저기 상담실 이용하십시오.”
“후배님. 잠시 대화 좀 나누시죠. 저도 한국대 법학과 출신입니다.”
“그러죠.”
“교수님, 잠시 후배와 얘기 좀 나누겠습니다.”
“그러십시오.”
‘흐흐. 오늘 용돈 좀 벌겠네.’
변호사 서광현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다급하게 떨어진 오더.
성폭력 사건은 후에 가져올 이미지 타격 때문에 대부분 조용히 처리하길 원했다.
특히 돈 많은 피의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던 일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할 정도다.
오늘 사건의 주범 격인 용창승이 그랬다.
외가 쪽이 아주 빵빵했다.
끼릭.
상담실 정도로 사용되는 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서광현.
흡연실인 듯 작은 티비와 소파, 재떨이가 함께 놓여 있었다.
형사들이 피곤할 때 쉬었다가는 휴게 공간이었다.
딸깍.
서광현은 들어서자마자 양해도 구하지 않고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앉아.”
취조실에 들어선 피의자를 대하듯 서광현이 폼을 잡았다.
전직 부부장 검사 출신으로 권위주의가 몸에 배었다.
서광현이 말한 대로 조용히 소파에 앉는 후배 장태산.
‘일단 기 좀 죽이고.’
스윽.
장태산을 향해 서광현이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법무법인 강촌 변호사 서광현.
굵직한 서체로 박힌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5대 로펌 소속 변호사를 증명하는 신분증이었다.
변호사로 밥 먹고 살기 위해서는 대형 로펌과 절대 부딪치지 않는 것이 이 바닥 관례.
학교 후배에 이제 갓 연수원을 졸업한 변호사.
이 정도 액션이면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었다.
“후배. 짧게 끝내자. 피해자 오빠라고 한 것 같은데 내가 1000만 원 줄게.”
“…….”
일언방구 없는 후배 변호사.
‘얼굴 뜯어 먹고 살 놈이군.’
키가 작고 뚱뚱한 자신과 절로 비교되는 변호사 후배.
서광현의 눈에는 스펙 쌓은 제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단 기분이 별로였다.
“적어? 그럼 내가 의뢰인에게 특별히 말을 넣어 2000 정도로 맞춰줄게.”
합의금 2000만 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번 사건만 잘 덮으면 최소 1장이 들어오는 일이었다.
남는 건 다 보너스.
“누가 보냈습니까?”
말 한마디 없던 후배 장태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용창승이라고 알지?”
“네. 오늘 스마트폰 카메라로 사진 찍던 주범입니다.”
“주범은 좀 그렇잖아. 오기 전에 사건 내용 들어보니 별일 아니더구만. 치마 속을 촬영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후배가 예뻐서 뒷모습 좀 찍어 단톡방에 올렸는데……. 그게 죄야? 후배도 남자니까 알잖아. 그 정도는 우리 대학 다닐 때 범죄 취급도 안 받았어. 그리고 참고해! 용창승 이모가 모 그룹 안주인이야.”
“모 그룹? 어디 말입니까?”
“요즘 TV에 자주 나오잖아. 대웅 건설 인수자로 거론되고 있는 동룡 그룹! 거기 사모.”
서광현은 알아서 기라는 의미로 대수롭지 않게 용창승의 뒤에 누가 있는지 말해줬다.
유난히 성문제에 예민해지고 있는 시대이니 만큼 언론에 알려지면 문제가 커졌다.
과거에는 강간죄 같은 성범죄도 잘만 해석하면 무죄로 풀려나는 경우도 많았다.
“여동생 있습니까?”
“여동생? 그건 왜?”
“딸은 있습니까?”
“……있긴 한데 왜!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기분 나빠진 서광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설프게 물고 나올 다음 질문을 예상하고 짜증을 냈다.
냉정하게 내 식구만 아니면 됐다.
어차피 이런 일들은 사방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런 일들 모두 나만 엮이지 않으면 상관없었다.
스윽.
그때 소파에서 말없이 일어나는 장태산.
“선배님, 딸이 성폭력을 당해도 이딴 식으로 말할 겁니까?”
차가운 눈빛으로 서광현에게 묻는 장태산.
‘이 새끼 봐라?’
예상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는 장태산.
“너……. 선배가 우습게 보여? 나 강촌 소속 변호사야! 합의서 없어도 이딴 사건 교육 이수 조건으로 기소유예 만드는 거 일도 아냐! 후배라고 대우 좀 해줄까 했더니……. 건방지게 어디서.”
서광현은 장태산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조용히 끝내기 위해 합의금까지 넉넉하게 제시했다.
그런 아량을 거부하고 건방을 떠는 후배 변호사.
아직 사회 초년생이니 세상 물정 모르는 티가 났다.
“한 번 해보시던가.”
“뭐, 뭐라고?”
서광현을 향해 가까이 다가서며 노려보는 장태산.
장태산의 손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치이익.
서광현 손에 들린 담배를 손가락으로 집어 꺼버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똑바로 쳐다보는 후배 장태산.
“사회생활 기본 예의도 모르는 게…… 어디서 선배질이야.”
“!!!”
‘이……. 새끼 뭐야!’
서광현은 장태산의 눈빛에 깜짝 놀랐다.
이런 놈들은 딱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 X도 모르는 미친 새끼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자꾸 뒤통수를 스치는 불길한 기분.
감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느낌상…….
학교와 연수원 선배를 상대로 이런 건방을 떨 만한 후배는 없었다.
‘X발……. 이거 X된 거 아냐!’
서광현은 떨칠 수 없는 불길한 느낌에 인상이 구겨졌다.
“가서 그 회장 사모한테 전해요. 외조카가…… 인사 제대로 한 번 하겠다고.”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