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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장. 이의를 제기합니다! (2) (547/1,284)

549장. 이의를 제기합니다! (2)

“이의요?”

합의부 주심판사 지은재는 겁 없는 국선변호인의 말을 재차 확인했다.

“네. 본 변호인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목소리에 힘이 넘치는 국선변호인.

“검사가 제출한 증거자료와 조서 전부에 대한 이의인가요?”

“맞습니다. 검사의 모든 증거와 주장을 배척하는 바입니다.”

“흐음……. 그래요?”

지은재는 패기 넘치는 국선변호인을 빤히 바라봤다.

옆에 앉아 있는 다른 합의부 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이가 없어 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사법연수생이라 뭘 몰라 용감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법학 드라마를 너무 본 거겠지.’

가끔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경우가 있었다.

갓 연수원을 졸업한 변호사나 연수원 수료 중인 국선변호인들이 의욕적으로 나올 때였다.

스스로들 정의를 수호하는 사도쯤으로 착각하는 경우다.

그러나 오늘 사건은 이의를 재기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

여러 증거와 제시된 사실관계들이 명확했다.

한국 나이 16세의 소년 이영진은 특수강도의 주범으로 특정됐다.

야심한 시각에 뻑치기로 젊은 여성에게 상해를 가했다.

지금 법정에서 발언하는 국선변호인과 달리 갑자기 집안 사정으로 사임한 전 국선변호인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다 할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공판준비절차에서도 반론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공판기일 모두 절차에서도 선처를 구하는 일도 없었다.

피고인 소년은 진술에서 자신의 무죄만 주장했다.

보통 이렇게 사실관계가 명확한 상황에서는 피고 측은 선처를 구하거나 반성문을 먼저 제출하는 게 관례였다.

하도 못해 그런 반성의 기미초자 보이지 않고 있었다.

판사도 사람인지라 괘씸죄를 걸면 형이 몇 년은 가중되는 게 이치였다.

사실심리절차로 넘어온 상황에서 새로 선임된 초짜 국선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연수원생이죠?”

지은재 판사가 물었다.

“넵! 42기 연수생입니다.”

“하아.”

지은재 판사가 한숨을 쉬었다.

연수생 4학기 8월부터 시작되는 실무수습기간.

변호사 실무 중인 장태산 연수생이 국선변호인이 된 것이다.

용돈벌이로 생각하는 변호사들과 태도가 달랐다.

피고가 미성년자에 3년 이상의 형이 떨어질 수 있는 사건이다.

게다가 사선 변호인이 없어 판사가 재량으로 변호인을 선정해야 했다.

일이 많아 다른 배석 판사에게 맡겼더니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수습 중인 사법연수생들은 의욕만 넘쳤지 일의 맥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론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이번 달도 사건이 많은데…….’

판사가 구하는 정의도 달랐다.

요즘 들어 일거리가 넘쳤다.

여성 판사가 형사 합의부 부장판사를 담당하는 게 쉽지 않았다.

범죄인들 상당수는 불손하고 거칠었다.

여성 판사들은 대부분 가사나 행정 쪽으로 빠지는 추세였다.

산더미처럼 일이 쌓인 민사 쪽보다는 낫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육아를 병행하면서 판사 생활을 한다는 건 어떤 사회생활보다도 벅찼다.

오늘도 자정 전에 퇴근하기는 불가능했다.

2007년 공판중심주의 법정심리절차 도입 이후 사건이 빨리 진행됐다.

아니 빨리 진행시켜야만 한다는 말이 맞았다.

위에서는 재판 진행이 빠른 판사를 최고로 쳤다.

판사들이 갈려 나갈 판이었다.

항소심에서 지적당하지 않기 위해 찾아야 할 판례나 법률 이론도 만만치 않다.

지은재 판사는 누구보다 승진하고 싶었다.

초등학생 아이가 둘 있지만 동기들에게 절대 밀리고 싶지 않았다.

여성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장으로 아름답게 퇴장하고 싶었다.

그런 지은재 판사는…….

“변호인, 그런다고 명백한 사건이 희석되는 건 아닙니다.”

일단 경고를 날렸다.

보통 판사가 이린 말을 날리면 초심 변호인들은 움찔 놀라 한발 물러났다.

그러나.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의 이익이라’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에 따라 본 변호인은 피고의 무죄를 주장하고자 합니다. 불과 어제서야 변호인은 국선변호인으로 임명됐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 정황을 살피고 피고와의 대화도 없이 변호에 임할 수 없음을 존경하옵는 재판장님께 밝히는 바입니다.”

연수생 변호인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검사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공판검사도 일거리가 쌓이다 못해 넘치고 있었다.

이런 사건은 빨리 정리하고 다른 일을 맡아야 했다.

“휴우.”

지은재 판사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어려보이고 모자라 보여도 국선변호인도 변호인이었다.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이들 몇 명이 판사의 결정을 기다렸다.

기자가 끼어 있을 수도 있었다.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 과거에 주목받지 않던 사건들도 속속 여론을 타기도 했다.

“30분 휴정하겠습니다. 변호인과 검사는 잠시 제 방에서 보도록 하죠.”

오전부터 계속된 재판에 지친 지은재 판사는 휴정을 명했다.

국선변호인을 조용히 불러 혼을(?) 내야 할 순간이었다.

“모두 일어나 주십시오.”

판사의 착석과 이석 시는 기립이 기본 예의.

법정 경위의 목소리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새끼 뭐야?’

기립한 검사 황준혁은 인상을 구기며 당당하게 변호인석에 앉아 있는 장태산을 노려봤다.

밝은 표정의 긍정적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국선변호인.

황준혁의 인상은 더 깊게 찌푸려지고 있었다.

***

“편하게 앉아요. 둘 다 커피 괜찮아요?”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선배님.”

검사가 넉살이 좋았다.

“장태산 국선변호인은 어느 학교 졸업이죠?”

“한국대 법학과 08학번입니다.”

“그래? 동문이네. 반가워. 난 91이고 저기 황준혁 검사는 95학번이야.”

살면서 판사실에 처음 들어와 봤다.

후배라는 소리에 판사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판사실은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몇 평 안 되는 공간에 낡은 모니터와 서류가 수북이 쌓여 있는 책상.

그 앞에 놓인 5인용 낡은 의자 세트가 전부였다.

책장에는 누가 봐도 읽지 않을 법 관련 서적이 장식용으로 꽂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적인 판사와 검사가 아닌 편안한 학교 선배들을 만났다.

“뭐야? 너도 후배였어?”

황준혁 검사가 의자에 앉은 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저 밥맛 떨어지는 표정은?

“덜떨어진 행동을 해서 난 어디 지잡대 출신인 줄 알았지.”

일단, 저 자식 마음에 안 든다.

지잡대든 한국대든 법정에서는 동등한 위치의 국선변호인일 뿐이다.

사람을 대놓고 차별하는 게 눈빛에서 고스란히 읽혔다.

“황 검. 애 놀리지 마. 딱 보니까 군대도 안 갔다 온 것 같은데 봐줘. 나름 열심히 하려고 그러는 거야.”

“크크. 어이 후배. 군복무는 또 언제 마치냐? 군대라고 군법무관도 편하지 않아~.”

안경 낀 단발머리의 피곤해 보이는 지은재 판사와 달리 날라리 제비 같은 황준혁 검사는 나를 슬슬 놀렸다.

말투가 저급해 특히 귀에 거슬렸다.

“안 갑니다.”

“안 가? 왜?”

“면제입니다.”

“면제? 와아아……. 사지 멀쩡해 보이는데 왜 면제야? 아버지가 잘 나가셔?”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잘 나간다!

“동계 올림픽에서 메달 땄습니다.”

“뭐……. 메, 메달?”

황준혁이 진심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네가 그 유명한 법대 후배였어?”

지은재 판사가 눈을 크게 뜨며 아는 체를 했다.

“선배님 아세요?”

“동문들 사이에서 소문 돌았잖아. 법대 후배 중에 운동 천재가 들어왔다고 말이야. 아마 한국대에서 메달 따 군면제받은 애는 쟤가 처음일 걸?”

“…….”

황준혁 검사의 나를 보는 시선이 또 한 번 비틀어졌다.

아무래도 전생부터 날 곱게 보던 놈은 아닌 것 같다.

“자 마셔. 믹스 두 개 탔어. 당 떨어질 때는 믹스만 한 게 없어.”

지은재 판사는 다소 지쳐보였지만 심성이 나쁜 분은 아닌 듯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달달한 믹스 커피를 내 앞으로 밀었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래. 잘생긴 후배. 황 검이 지금껏 가장 잘난 후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판사답게 보는 눈이 정확했다.

“황 검도 마셔.”

“감사합니다. 선배…….”

기가 한풀 꺾인 황 검.

“그건 그렇고 막내 후배는 이번 재판에서 뭘 원하는 거야?”

본인의 커피를 타서 의자에 앉으며 지은재 판사가 본론을 꺼냈다.

“제 의견은 같습니다.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무죄? 어이. 잘난 후배님. 변호인이 아무리 피고인의 이익을 위하는 존재라지만 이번 사건은 증거와 증인이 넘쳐. 어떻게 무죄야? 기록 검토는 제대로 해본 거야?”

역시 황 검은 삐딱하게 나왔다.

“갑작스럽게 어제 저녁에 통보 받은 터라 검토 못해봤습니다.”

“허어……. 미치겠네. 지금 여기가 학교 모의 법정인 줄 알아? 밖에 있는 꼴통 새끼는 선량한 피해자 뒤통수를 몽둥이로 깐 악질 뻑치기야. 동료들과 피해자가 저놈이 주범 맞다는데 무죄라고?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황준혁 검사는 말투 자체가 시비조였다.

“피고의 눈빛이 맑아서요.”

대답은 간단했다.

“!!!”

두 사람의 시선이 어이없다는 듯 변했다.

“너 정체가 뭐야? 뇌가 근육이냐? 피고 눈빛이 맑아? 너 또라이야? 지 영혼도 속이고 사기 치는 사기꾼 새끼들 눈깔 보면서도 맑다고 할래? 아예 천사라고 해라.”

황준혁이 목소리를 높이며 몰아붙였다.

“후배, 그건 아닌 것 같다. 다른 증거가 있다면 모를까 이번 사건은 빨리 집중심리해서 끝내는 게 좋아. 증인이 차고 넘치는데 이 상황에서 뒤집어질 가능성이 없어. 국선변호인으로 임명 될 정도라면 연수원 성적도 나쁘지 않다는 건데. 빨리 끝내자.”

지은재 판사도 황 검과 마찬가지로 소년에게 이미 유죄를 확신했다.

“너 인마 선배님 잘 만난 줄 알아. 성격 괄괄한 남자 선배 판사님 같았으면 쪼인트 까졌어. 나 때만 해도 선배님들 살벌했다.”

황준혁은 숫제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이다.

“그래도 전 무죄를 주장합니다.”

나도 바보가 아니다.

억울함에 진심으로 슬퍼하는 피고의 절절한 눈빛을 봤다.

그 눈빛은 심장으로써만 느낄 수 있는 빛이었다.

무죄가 확실했다.

“……후배. 첫 변호라 그런 것 같은데. 이게 감정적으로 끌릴 사건이 아니야.”

지은재 판사가 타이르는 듯한 시선으로 날 봤다.

“선배님 됐습니다. 저 자식 보니까 뭔가 이력서에 한 줄 넣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선배들이 양보 하죠.”

황준혁이 생각하는 척 비릿하게 웃으며 날 쳐다봤다.

“내일까지 피고가 자백하고 반성문 써오면 최고 구형에서 2년 깎아줄게. 내가 원래 이런 거에 독한데 후배 아끼는 차원에서 인심 썼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야. 그럼 난 거기서 1년 더 빼줄게. 단기 2년에서 장기 4년 정도로 끝내자.”

판사실에서 이런 대화가 오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미국처럼 플리바게닝이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 사법부였다.

이미 선배들은 소년에게 유죄를 확정하고 형을 흥정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나에게 고정됐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판사님. 검사님.”

선배가 아니라 판사와 검사로 호칭을 정확하게 했다.

“!!!”

점점 더 굳어가는 두 사람의 얼굴.

“그럼 어쩌자고! 사실심리 중인데 다시 공판준비절차라도 진행하자는 거야! 선배님이 거부하면 다 땡이야! 이 뭣도 모르는 애송이 새끼야!”

급기야 황준혁은 열이 받은 듯 고함을 질렀다.

“황 검. 소리가 너무 커.”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에 반해 지은재 판사는 흥분하지 않고 품위를 유지했다.

“장태산 국선변호인, 뭘 원하죠? 이 재판 불리한 거 다 들었죠. 이러면 피고 형량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자세를 고치며 공적으로 나오는 지은재 판사의 사무적 말투.

차라리 이게 편했다.

“재판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봤는데 다른 피고들은 왜 증인으로 소환하지 않았습니까? 피해자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건 사건이 워낙 명확하고 다른 피고들은 재학 중인 학생이라 그러지. 피해자도 저 악마 같은 새끼 다시 보고 싶겠어? 이미 모든 걸 경찰과 검찰조사에서 끝냈어.”

뭔가 찔리는 게 있는 듯 황 검의 목소리가 다소 잦아들었다.

그러니 더 수상했다.

“그래서 이상하다는 말입니다. 저 연약한 체구의 피고도 학생인데. 구속영장 발부 받아 몇 년 형을 받을지 모르는 마당에 공범들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더군요. 특수강도 공동정범에 대해 우리나라 법이 원래 그렇게 후했습니까?”

“야! 걔들은 밖에 있는 저 자식하고 근본적으로 달라! 잠시 일탈한 거고 부모를 비롯해 본인들도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문까지 제출했어. 그리고 피해자와도 원만히 합의가 끝나서 영장 청구 안 한 거야!”

황 검이 늘어놓는 변명 중에서 허점이 있었다.

근본이 다르다는 말.

“돈 많은 놈들 집안 자식들은 범죄도 고급집니까? 제가 보기에는 똑같은 것 같은데……. 그리고 이 정도 사건이면 소년부에 송치해도 되지 않습니까? 초범이고, 피해자도 전치 8주라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말입니다.”

구려도 너무 구린 냄새가 진동했다.

파바밧.

황준혁이 날 죽일 듯 노려봤다.

이제야 제대로 판이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공판준비절차는 시간 및 여러 관계상 다시 열기 불가능할 것 같군요.”

지은재 판사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하죠. 선배님. 요즘 일도 많으신데 내일까지 심리 끝내고 구형해서 종결하면 될 것 같습니다.”

황 검이 알랑방귀를 꼈다.

“심리기일을 일주일 연장하겠습니다. 국선변호인이 제출한 증거와 검찰과 경찰 조서 능력을 전부 부정하니 공범 피고들과 피해자를 소환하도록 하세요.”

“서, 선배님.”

지은재 판사의 생각지 못한 깔끔한 정리에 황 검이 당황했다.

“두 사람 다 나가세요. 나도 좀 쉬고 싶어요.”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손가락으로 짚는 지은재 판사.

“죄송합니다. 판사님.”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이 새끼 제가 교육 좀 시켜놓겠습니다.”

황 검도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철컥.

판사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 순간.

“너 이 새끼 연수원에서 그렇게 가르치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어린놈의 새끼가 X도 모르면서 날 가르치려고 해? 너 검사가 만만해 보여!”

판사 사무실 복도에서 조용히 이빨을 드러내며 으러렁거리는 검사 황준혁.

그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역시 입술 끝이 올라가며 물리는 차가운 미소.

살짝 왼쪽 어깨를 그의 귀 가까이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그러게 내 말이. X도 아닌 공판검사 나부랭이가 날 가르치려고 드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후훗.”

회귀의 전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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