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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의 전설 2부
526장. 내가 키우는 선수
“이 뇌물은 뭐냐?”
“선배님을 향한 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 으으. 금방 닭살 돋았다.”
“애정 표현이 부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신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전 인류애적 관점에서…….”
“됐고. 오늘은 또 무슨 사고 쳤어?”
“제가 애도 아니고 매일 사고만 치고 삽니까. 그냥 저녁에 갑자기 선배님이 보고 싶기도 하고 술 한잔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강남에 위치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와인바.
강남 야경이 죽여주는 빌딩 최상층에 자리한 와인바 룸에서 조용히 손대균 이사를 만났다.
집에서 최고급 와인 몇 병을 직접 가져왔다.
영업장인 와인바지만 개인 와인을 가져와 마실 수 있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만큼 와인을 팔아서 영업 이익을 남기는 게 목적인 곳이 아니다.
고급 와인바에서도 웬만해서는 보기 힘든 명품 와인을 준비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와이너리 수십 곳을 구매해 놓은 덕을 톡톡히 봤다.
그곳에서 생산한 와인들 중에서 최고급 상품들을 당당하게 상납받았다.
오늘은 와인이 마시고 싶었다.
아니, 솔직하자면 누군가와의 편안한 술자리가 필요했다.
일식집에서는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주방장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다금바리 회도 몇 점 집어먹지 못했다.
본래 계획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려고 했다.
고인태 부장판사에 관해 살짝 알아봤다.
조윤태 변호사님이 오승택 대법관 쪽 사람이라고 언질을 줬다.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고인태 부장판사는 훗날 대법관에 오르게 되는 인물이다.
만남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사법농단의 주역으로 불명예를 안고 현직 대법관 최초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2011년에 대법원장에 임명되는 영광을 안는 오승택 대법관.
욕심 많은 두꺼비는 여기 눈앞에 있는 리앤장 로펌과 손을 잡고 대한민국의 정신을 일본에 팔아먹는다.
그 전에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게 마련된 술자리.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입맛이 고약해졌다.
나를 핫바지로 삼으려는 심산인 야비한 그들의 모습에 배알이 뒤틀렸다.
누가 생각해도 나를 앞으로 내세우면 모양새가 꽤 그럴싸했다.
그 발상이 그들의 패착이었다.
스스로들 엘리트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우물 안에 갇혀 자리다툼을 벌이는 개구리 떼들로 보였다.
판사는 대한민국 내에서나 먹히는 직군이지 나라 밖으로 나가면 X도 아닌 것들이 나를 노렸다.
미래를 겪고 회귀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감출 수 없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와 경멸에 사고를 쳤다.
맛 좋은 회와 음식들을 못 먹을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나의 선전포고였다.
뒤돌아 생각해도 내 성격은 참 까칠했다.
조금만 참고 심사숙고하겠다고 말해도 그만인 것을…….
그래도 마음은 생각보다 후련했다.
놈들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새롭게 등장한 이완용의 현신이었다.
자신과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나라의 명예를 헌신짝처럼 팔아먹었다.
X새끼들!
또로로로록.
와인이 잔에 채워졌다.
“바르바리라는 피에몬테 지역 와인입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세기부터 와인을 생산한 명가의 작품입니다. 손맛이 제대로 느껴집니다.”
“색감은 좋네.”
“드셔보십시오.”
와인 애호가인 손대균 이사는 천천히 소믈리에처럼 시음했다.
“!!!”
“좋죠?”
“이 녀석 뭐냐? 백후추에 펜넬 같은 허브류 맛에 레드 체리 맛까지…….”
“부드럽고 고귀한 질감에 긴 여운까지……. 제법이죠?”
“맛있다. 정말.”
두 마디의 말은 최상의 표현이었다.
“그럼 저 부탁해도 되죠?”
“빨리도 말한다.”
고인태 부장판사와 그 윗줄인 오승택 대법관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의 삼대 권력 중 한 곳인 법원을 휘어잡는 자들이었다.
죄는 미워하지만 권력은 무시하지 않는다.
고인태가 사고 치기 전에 사건을 묻어야 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귀찮아질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2년 동안 뺑이 쳐야 하는 사법연수원 생활도 고달파질 게 확실했다.
“고인태 부장판사를 만났습니다.”
“고인태? 걔가 널 만났어?”
“아시는 분입니까?”
“물론이지. 사법계의 로얄층이다. 그런데……. 설마?”
“사고 쳤습니다.”
“끄응…….”
사고 쳤다는 말에 손대균 이사가 앓은 소리를 내뱉었다.
“얼마나 쳤어?”
“같이 회 먹다가 그 위에 쓰레기 좀 뿌렸습니다.”
“잘 한다~. 잘 해.”
“칭찬이시죠?”
“……칭찬으로 들린다면 너 정신 문제 있다. 병원 가 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건에 흥미를 보였다.
“오승택 대법관 귀에 들어가기 전에 막아 주십시오.”
“의뢰냐?”
“와인 값으로 퉁 치시죠.”
“너 돈 많이 벌면서 그럼 못 쓴다.”
“아껴야 잘 살죠. 선배님~.”
“내가 첫 사랑……. 아니 네가 협박용으로 삼는 유리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 어린 너한테 선배라고 불리는 게 묘하다.”
“아버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끄응……. 말을 말자.”
손유리 얘기를 먼저 꺼낸 손대균 이사.
어느 정도 감정 정리가 된 것 같았다.
“부탁드립니다. 당분간은 진짜 쥐 죽은 듯 살겠습니다.”
“연수원이 피신처는 아니다.”
“공부하러 갑니다. 공부요!”
“푸하하하하하하하하.”
손대균 이사가 뜬금없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누굴 속이려 들어~. 너 이번에 2차 성적이 꽤 높더라. 내가 답안지를 봤는데……. 알고도 안 썼던데.”
이 아저씨 무섭다.
일개 로펌 이사 신분의 사람이 사법시험 답안지를 봤다.
하긴 리앤장 이사 정도라면 대한민국에서는 가능했다.
“그거 위법 행위인 건 아시죠?”
“네 부탁 대부분이 위법 행위거든~.”
오늘따라 조용히 넘길 만한 말에도 강하게 나오는 손 이사님.
“방금 네 말처럼 조용히 살아라. 대한민국, 생각보다 작다. 너에 관한 소문이 많이 퍼졌다. 내가 막는 것도 한계가 있다.”
흘려 들을 충고가 아니다.
오정 임성철 회장님도 나에게 같은 말을 했다.
“조용히 살고자 매번 다짐하지만 태어난 곳이 들풀 세상입니다. 잔바람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걸 어떡합니까.”
금수저와 특정 권력층 자손이라면 이렇게까지 목적형 타깃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없는 자가 부를 얻게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질시를 당하는 법이다.
“이번 일은 막아주마.”
“감사합니다!”
“……다행히 내가 아는 후배다. 하지만 진짜 조심해. 오승택은 만만한 자가 아니다.”
대한민국 법조계의 슈퍼 귀족급인 손대균 이사가 오승택을 냉정하게 평가했다.
“알겠습니다. 당분간 착하게 살겠습니다.”
나도 정말 착하게 좀 살고 싶다.
그러나 이 엿 같은 세상이…….
나를 호구로 보고 덤비는 걸 어떡하라고?
***
“밟아 버린다! 이 X새끼!”
고인태는 꼭지가 한 바퀴 돈 상태였다.
감히 이제 사법시험 합격생 따위가 부장 판사이자 대학교 선배인 자신을 대놓고 똥파리라고 칭했다.
양심은 진작 팔아먹었지만 부끄러움은 심장 밑바닥에서 틈만 나면 꿈틀거렸다.
그래서 깨끗한 척하는 놈들이 더 싫었다.
꿀꺽 꿀꺽.
“크으…….”
평소 자주 출입하는 룸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스폰이 언제든 이용하라고 제공해 준 강남의 수준급 텐프로 룸살롱.
오늘은 서비스를 하는 여성도 없이 양주를 소주처럼 들이켰다.
“이래서 졸부 새끼들은 안 되는 거야. 가짠한 것들이 세상 무서운 줄 몰라? 넌 이제 뒈졌어! X발 새끼!”
사회적 신분은 부장판사였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평소 집안이나 법원에서는 품위 있는 척 행동했지만 고인태의 인성은 본래 이랬다.
강한 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지만 약자 자 앞에서는 얼음처럼 날카롭고 차가워졌다.
선배와 동기들을 밟고 또 밟아 짓이기며 오늘의 이 자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천둥벌거숭이 같은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이 욕을 퍼부었다.
“네놈이 어디까지 막을 수 있나 지켜보겠어!”
머릿속에 착착 그려지는 시나리오.
라인과 연결되어 있는 검사들을 대거 움직일 생각이었다.
내일 당장 오승택에게 권유해 놈을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자연스럽게 진행될 숙청의 과정.
사법연수원에 입학하기 전에 끝낼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사업하는 놈 치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먼지가 없으면 작업을 해서라도 보내 버린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저항하거나 밉보인 자들은 특별히 판사들을 매수하거나 겁박해 죄질을 높이고 양형 기준보다 더 높게 형량을 때렸다.
그 맛에 중독이 되었을 정도다.
지독한 쾌감이 보상으로 돌아왔다.
민주주의 법치 사회에서 어떤 인간들보다 높은 위치에 정당성을 띤 형별을 내릴 수 있었다.
사법 체계는 보수적이었고 보이지 않는 곳은 더 혼탁하게 타락해 있었다.
독재 정권 시절부터 권력에 빌붙어 양심을 팔고 법원에 남아 있던 판사들이 연명해 대법관과 같은 고위층 법관이 됐다.
선택된 자들은 알아서 위에서 끌어줘 쉽게 중앙 법원 권력까지 잡았다.
워낙 그 기반이 탄탄해 사법부 권력 반절 이상이 잘려나가지 않는 이상 어떤 형태로든 살아남을 것이다.
두려움 같은 것은 애초 없었다.
정치권력도 아래로 볼 정도의 자신감이 넘쳤다.
사법부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국민의 선택 없이 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여당이나 야당 의원 할 것 없이 적당한 선에서 청탁을 들어줬다.
선거법 위반 사건 같은 것도 윗선의 지시를 받아 해결했다.
판결문은 작성하기 나름이었다.
중요한 요처인 중앙고등법원부터 대법원까지 반수 이상이 다 라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검찰 쪽도 잡아가고 있었다.
자존심 강한 검찰 쪽에도 권력에 아부하는 선수들은 널렸다.
선별 과정을 거쳐 간택해 그들 중심으로 승진시켰다.
물론 청와대도 개입됐다.
여당 쪽에서 계속 정권을 잡아야 편했다.
검찰들 목줄인 민정수석을 통해 말 잘 듣는 사냥개들을 수도권 중심으로 포진시켰다.
언론도 한통속이었다.
가장 규모가 큰 신문사들도 한 편이었다.
좁은 대한민국의 권력은 상류층끼리 챙기고 서로 나눠 먹기에도 바빴다.
“개천에서 난 새끼들이 자존심만 살아서……. 크크.”
계획이 착착 세워지자 기분이 좋아진 고인태 부장판사.
“스트레스 좀 풀어볼까~.”
웨이터를 부르기 위해 호출 벨에 손을 뻗었다.
뚜루루루루루.
그때 울리는 단순한 벨소리.
스마트폰으로 바꿨지만 판사들 대다수는 품위 유지를 위해 기본 벨소리를 사용했다.
“누구……. 헛!”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고인태가 당황했다.
띠릭.
바로 통화가 연결됐다.
“전화 받았습니다. 선배님!”
- 고 부장 뭐해?
“조용히 술 한 잔 하고 있었습니다.”
- 흐음……. 오늘 일 때문인가?
‘오늘 일? 설마!’
고인태는 직접 물어오는 상대방의 물음에 퍼뜩 상황이 파악 됐다.
그리고 몰아치는 긴장감으로 숨이 막혔다.
- 왜 말이 없어?
“아, 아닙니다.”
- 오늘 저녁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 없던 일로 해.
장태산과 있었던 일이 맞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놈은 감히 우리들을…….”
차마 뒷말을 뱉지 못하는 고인태.
- 걔가 입이 좀 거칠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착한 놈이야. 그러니까 잊어.
“선배님……. 그건.”
고인태는 다른 때와 달리 반항을 해봤다.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 하아……. 이 새끼. 많이 컸네. 고인태 너 내가 누군 줄 잊었어?
낮게 깔리는 상대의 물음.
“그게 아니라…….”
- 까라면 까 새끼야! 너 오승택 선배님 믿고 이러는 거 같은데 제주도로 보내줄까?
귀에 쏙 들어와 박히는 경고.
“아닙니다! 이, 잊겠습니다!”
곧바로 상대가 원하는 대답이 튀어 나왔다.
- 어디다 나불대지 마라. 태산이는 내가 키우는 선수다. 오 선배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려.
“!!!”
상대의 말에 고인태는 진심으로 놀랐다.
리앤장의 이사가 대놓고 자기 사람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 말은 절대 건들지 말라는 의미.
- 알아들었냐고!
“넵! 확실히 알아들었습니다!”
고인태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병처럼 크게 대답했다.
-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끊는다. 태산이 이름이 조금이라고 언급되면…….
뒷말을 맺지 않고 이어지는 침묵의 협박.
뚝.
고인태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통화가 끝났다.
“에이! X미! 엿 같은!”
콰직.
룸 벽면에 던져져 박살이 나는 스마트폰.
주르르륵.
잔에 양주를 콸콸 넘치게 따라 마시는 고인태 부장판사.
“X발! 기분 더럽네…….”
본인 선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대의 협박에 흐려져 가던 분노가 다시 활활 일어났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법조계의 거물 집안 인사.
고인태도 그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한 개인일 뿐이었다.
와장창!
그래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노.
스마트폰에 이어 애꿎은 유리잔이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나며 산산이 부셔졌다.
고인태가 조금 전에 세운 완벽했던 장태산의 파멸 시나리오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