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1화 (480/1,284)

 # 481

회귀의 전설

481장. 멘토 (1)

“도대체 뭣들 한 겁니까! 오정에서 먼저 선수를 쳤지 않습니까! 예약 판매량이 30만 대랍니다. 그것도 한 달 예약자만 말입니다!”

탕!

엘자 그룹 회장이 주제하는 사장단 회의.

회장 고자룡이 주먹으로 책장을 내리치며 분개했다.

그의 손에는 얼마 전 출시된 오정의 갤루시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아이펀의 안드레이드 버전 최신형 폰이 출시 됐다.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지금까지 소프트웨어 개발을 소홀히 했던 엘자 그룹은 치명상을 입었다.

핸드폰과 달리 스마트폰은 기계 한 대에 화질 좋은 카메라, 이동하는 빠른 인터넷 기능이 탑재돼 있었다.

세계에서 첫 번째 가는 얼리어답터 성향의 한국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너도나도 신규 폰은 오정의 스마트폰으로 향했다.

그렇게 급격하게 전향하지 못할 것이라 자신했던 사업부의 패착이었다.

엘자의 핸드폰은 기하급수적으로 판매량이 줄었다.

핸드폰에 넣고 실험하던 기능들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디자인과 인터페이스를 비롯해 모든 게 혁명적인 스마트폰과 비교됐다.

“다들 말 좀 해보십시오! 도대체 우리는 지금껏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제가 그동안 누누이 빠르게 개발을 서두르라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오정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도 왜 다들 침묵하고 있었던 겁니까? 기술이 기술을 낳는 세상입니다. 하룻밤이 지나면 어떤 세상으로 변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단 말입니다!”

고자룡 회장의 격한 발언이 공간을 뒤흔들며 떠다녔다.

“…….”

사장들 누구 하나 선뜻 답하지 못했다.

한때 잘나가는 엘자 반도체를 빼앗긴 이후 엘자 그룹은 전자 쪽에서 유독 몸을 사렸다.

1999년 IMF 후폭풍으로 강제적 사업구조조정을 당했다.

당시 오정과 연대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엘자 반도체는 그룹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을 것이다.

살기 위해 엘자 반도체를 버렸던 여파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쳤다.

손쉬운 것들만 따라하려고 했다.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는 정신은 후퇴했고 고민하는 일도 희박해졌다.

오정의 뒤를 따라가는 일에 만족해하는 만년 2인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은연중에 패배 의식이 그룹 전체를 집어삼키고 사주는 물론 사원들까지 물들였다.

고자룡 회장을 비롯해 수뇌부들이 그 사실을 자각하고 수정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전자 쪽에서는 기세가 확실히 꺾여 버렸다.

“회장님……. 외람된 말씀이나 아직 오정의 스마트폰은 안정화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을에 출시되는 저희 전자의 스마트폰은 안정화를 비롯해 여러 가지 획기적인 기능을 담아…….”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십니까? 남동영 대표는 시장 선행개발자의 이득을 모르십니까? 시장에 처음 제품을 선보이는 자는 최소 50%의 점유율을 획득합니다. 거기에 오정이라는 이름이 더해지면……. 그 점유율은 80% 이상입니다! 도대체 그동안 뭐하셨습니까? 곧 개발된다고 저에게 몇 차례나 안심하라고 보고하지 않았습니까!”

고자룡 회장은 얼마 전부터 전자를 닦달해 왔다.

장태산을 만난 이후 그룹의 위기감을 확실히 온몸으로 캐치했다.

지배구조가 복잡한 만큼 그룹 내 소통이 느렸고 기획력도 떨어졌다.

회장이라는 명패를 달고 있었지만 그룹 사장단에 대한 지배력이 낮았다.

주식이 분할되어 사장들 임명도 여러 대주주들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 실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엘자 전자의 남동영 대표가 얼굴이 벌겋게 된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회장 직속 라인이 아니다 보니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 그는 아직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그룹의 위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신제품 출시가 아니란 말입니다! 빠른 시간 안에 스마트폰이라는 세상에 뛰어 들어가야만 합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십시오! 여러분들의 생각 하나가 엘자 그룹과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자룡 회장이 열변을 토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단이 힘차게 답했다.

물론 입만 동조하는 분위기였고 대부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추된 회장의 권위가 엘자 그룹의 가장 큰 문제였다.

“모두 각 사업장에 가서 오늘 제 뜻을 피력해 주십시오. 자칫 한 발자국 잘못 내딛는 순간……. 1999년의 치욕을 다시 맛보게 될 겁니다.”

엘자보다 순위가 높았던 대웅이 공중분해 되던 걸 똑똑히 봤던 고자룡 회장과 임원들이었다.

“하아아…….”

사장들이 평소와 달리 고개를 숙인 채 축 처진 어깨로 물러났다.

아무도 없는 넓은 회의실에 앉아 고자룡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몇 달 만에 시장 판도가 이렇게 바뀌었다.

핸드폰 시장 점유율이 뚝뚝 떨어졌다.

아이펀의 선전이 무서웠다.

엘자를 비롯해 공룡 노키아도 무섭게 무너졌다.

“이동진 교수가 그렇게 극찬한 학생이 장태산이라니…….”

어제 고자룡 회장은 엘자 그룹 비공식 경영자문 위원인 한국대 경영학과 이동진 교수를 만났다.

오정의 스마트폰 출시로 위기를 느끼고 대처 방안을 논의하고 싶었다.

대화가 오가던 중 이동진 교수가 한 학생에 대해 전례 없었던 칭찬을 했다.

2008년에 겨우 1학년에 불과한 법대생이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을 예견했다는 것이다.

이동진 교수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학생을 칭찬했는데 그가 바로 장태산이었다.

자존심 강한 한국대 경영학과 교수의 찬양에 가까운 칭찬에 고자룡은 심각해졌다.

자신 앞에서 장태산이 말했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닥치고 있었다.

딸을 통해 몇 번 찾아오라고 넌지시 만남을 청했지만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룹 회장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잠룡이었다.

고자룡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장태산을 만나면 이번 위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일개 학부생에게 고개 숙이고 조언을 구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나이가 한참 어린 학생을 멘토로 삼는다는 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세상 눈 때문에라도 꺼려졌다.

대한민국에서 수십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그룹의 회장이 자신이었다.

“허허. 아직도 멀었군.”

그러나 이내 자신의 실책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고자룡.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찾아 화면에 띄웠다.

***

“다들 긴장을 늦추지 마십시오. 1차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풀어질 때가 아닙니다. 이번 2차 시험이 인생 마지막 시험이라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매진하십시오. 지금껏 배우고 습득했던 내용들이 문제로 나올 겁니다. 2차 시험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당황하지 말고 출제자의 핵심을 파악해 서술해야 합니다.”

“넵! 강사님!”

나이가 나보다 많은 선배들이 깍듯하게 나를 강사님이라고 불렀다.

신림동에 위치한 45평 아파트에 다섯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강아린 선배와 예린 선배, 그리고 고등학교 동창인 강현수, 학필 선배가 추천한 두 명의 남녀가 합류했다.

신림동에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해 합숙시켰다.

경제적 정신적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차 시험은 관여하지 않았다.

최소한 기본 소양은 품고 있어야 합격할 자격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 다섯 명 모두 1차에 가볍게 합격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현수도 독학사로 법학과목을 이수해 시험 보는 데 지장이 없었다.

2차 시험이 6월 말인 다음 주였다.

모두들 얼굴이 핼쑥해졌지만 기운만은 넘쳤다.

눈빛이 살아 있는 그들을 마주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미래를 위해 내가 심고 있는 사과나무들이었다.

“제가 써머리로 제공한 문제들 위주로 잘 살펴야 합니다. 헌법 같은 경우에는 몇 년 동안 이슈가 되었던 교육공무원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위헌적 문제나 헌법 소원이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되도록 ‘헌법재판소 판례나 국가공무원법이나 정당법에 규정한대로 위헌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적시하십시오. 선진국과 달리 대한민국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엄중하게 묻고 있습니다.”

“강사님~ 이제는 세상이 변했는데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되지 않나요? 대학 교원들은 정당 활동이 가능한데 초, 중, 고등학교 선생님들에게만 정당 가입 행위를 차단하는 건 위헌 같아요~.”

강아린 선배가 핵심을 짚어왔다.

“정치적 결사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아직 이성적 판단이 미숙한 미성년자를 교육하는 선생님들은 어느 정도 제약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자칫 특정 정당에 대한 이념 교육이 실시된다면 사회에 크나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강아린 선배 덕분에 2010년도 사법시험 2차 헌법 기출문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아직 약자입니다. 강자들이 만들어 놓은 리그에 올라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투에 임한다면 100전 100패입니다. 자기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납작 엎드려 힘을 기르십시오. 복수를 위해 10년을 참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정신 교육은 덤이었다.

자칫 정의로움을 앞장세우다 크지도 못하고 쓰러질 수 있었다.

마음속에 칼을 품되 내색하면 안 됐다.

들키는 순간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 번 형성된 거대한 권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권력 속에 뛰어들어야 싸움이 가능했다.

“강사님의 설명 소녀 가슴 깊이 명심하겠나이다~ 으흐흐.”

강아린 선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딱할 수 있는 분위기가 그녀로 인해 부드러워졌다.

“형법 같은 경우에는 공모공동정범 문제가 요 몇 해 동안 출제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이론이기에 올해 출제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위법성 조각사유 같은 문제는 기본으로 풀어낼 실력들이 되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배점이 큰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행정법은 행정명령에 대한 재결 불복 구제 수단과 대집행에 관한 경우, 국가배상청구에 관한 민사법원의 관할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요즘 신도시 문제로 토지수용위원회에 대한 행정 소송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한 번쯤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제작한 각 법학 과목에 대한 핵심 내용을 짚어줬다.

“그리고 시군에서 제정한 조례의 재정가능성, 쟁송수단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치권이 확대 될수록 민원 발생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과거 기출 문제로 한 번 풀어봤기에 설명이 가능했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렇게 버틸 수 있었다.

그 전에 내가 원하는 인재들을 법조계 곳곳에 심어둬야 했다.

최소 사법시험 성적 순위로 100위 안에 들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수도권 판사나 검사로 임용되어야 그나마 힘을 쓸 수 있었다.

“강사님은 언제 이렇게 공부해 놓으셨어요? 이 방대한 법학 과목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다니……. 진심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예린 선배가 감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기출 문제를 찍어주지 않아도 내가 정리한 써머리만으로도 충분히 2차는 대비 가능했다.

그만큼 이들은 큰 행운을 잡았다.

동시에 도래하지 않은 계약의 의무이행자들이었다.

아직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곧 이자까지 붙어 이들의 힘을 사용할 날이 올 것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존경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지금은 힘들고 버겁겠지만 조금만 더 달려주십시오. 개인의 영광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올바른 양심을 소유한 법조인들이 많이 배출 되어야 합니다. 법은 힘없는 국민들을 위한 마지막 수단입니다. 그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게 제가 바라는 진정한 소원입니다.”

“넵!”

그동안 누누이 강조하며 세뇌시켜온 말이다.

어차피 다들 먹고 살만한 집안 자제들이었다.

환경이 열악하면 돈과 권력의 유혹을 물리치기가 쉽지 않다.

먹고 사는 일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아니었다.

물론 인척들의 청탁이 없을 수 없겠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그 또한 문제없을 것 같았다.

“강사님~ 시험 끝나고 뭐 할 거예요? 여름휴가 가실 거죠?”

아린 선배가 틈새를 노려 애교를 부리며 물어왔다.

그녀를 알게 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신입생 때 봤던 청순한 여대생은 간 데 없고 눈가에 잔주름이 많이 보였다.

“바쁩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 제 1시간은 여러분의 수백 시간과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오만하게 들리겠지만 현실이 그랬다.

출발선상이 달랐다.

이들의 목표는 법관이나 검사가 되는 것이겠지만 난 아니다.

법조인의 삶은 수많은 종류의 인생에 있어서 한 수단에 불과했다.

“고맙다. 태산아…….”

강현수는 나의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후배님 정말 고마워요. 1차에 합격 하고도 번번이 고배를 마셨지만 올해는 다를 것 같습니다.”

“맞아요. 반드시 합격할 것 같아요.”

학필 선배가 추천한 두 명의 학생들도 고마움을 표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합격 후에도 법과목을 손에서 놓으면 안 됩니다. 연수원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기반 지식이 탄탄해야 합니다.”

“누가 보면 태산이가 후배가 아니라 엄청난 대선배인 줄 알겠어요~.”

“맞아. 태산이는 인생 선배야~.”

“인정합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태산이는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랐습니다.”

“이렇게 놀랄 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태산 후배밖에 없을 거예요~.”

“앞으로도 멘토로서의 역할 잘 부탁합니다.”

선배들이 합심해서 나를 찬양했다.

이런 기분 좋았다.

어차피 인생 2회 차를 살고 있으니 이들의 선배가 맞았다.

“지금 하신 말씀 나중에 철회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태산이 말은 무조건 따를 걸 약속합니다~.”

예린 선배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 내가 빠지면 섭하죠~.”

- 신들이 지켜보는 인간들의 맹약이 발생했습니다.

-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지난 생의 카르마가 앞당겨 실행될 것입니다.

나에게만 들리는 알림음.

이들은 자신들이 뱉은 말에 무조건 책임을 져야 남은 인생이 편안할 것이다.

이젠 우리 사랑을~♬.

스마트폰 벨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오정에서 최근 출시된 스마트폰으로 갈아탔다.

미래에서 사용하던 것들에 비하면 느리고 불편했지만 그 전 핸드폰과는 비교 불가능했다.

“여보세요.”

- 날세 태산 군.

모르는 전화번호가 분명했는데 나를 아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십니까?”

- 엘자 고자룡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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