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7
회귀의 전설
397장. 땅 장사란 이런 것이다. (3)
“러시아?”
“사하 공화국 수도 야쿠츠크 공항에 방금 도착했다고 합니다.”
“러시아라….”
리장창은 제갈유랑의 보고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인상을 썼다.
장태산의 출입국 기록은 그의 움직임에 따라 즉시 전달됐다.
한국에 심어 놓은 첩보원들이 특급으로 처리했다.
“누구를 만나고 있나?”
“그것까지는 파악 못했습니다.”
한국과 달리 러시아는 땅이 넓고 공무원들 일처리가 늦었다.
특히 보잘 것 없는 공화국과 도시에는 첩보원 파견 자체가 힘들었다.
중국인에 대한 배타 심리가 생각보다 강했다.
모스크바 쪽에 요원들이 많았다.
“아무것도 없는 얼음 왕국에 왜 갔을까? 보석이라도 캐려고?”
사하 공화국은 원유와 가스, 다이아몬드 같은 광물 자원이 풍부했다.
장태산과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껏 장태산은 금융 쪽에서 자금을 불렸다.
굳이 어려운 사업에 손을 댈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러 경로를 추적해본 바 지난 번 홍콩사건 때 장태산을 도운 조직이 러시아 같습니다.”
“알고 있다. 미국 쪽은 관심이 없었고 유럽이나 한국, 기타 조직은 감히 우리를 건들지 못할 것이다.”
“경고를 할까요?”
조직의 복수는 언제나 대상을 완전 제거하는 걸로 귀결됐다.
첩보원들의 목숨은 거래나 경고 차원의 희생 대상이었다.
“일단… 은 기다려라.”
리장창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무엇보다 러시아에서 지금 장태산이 만나고 있는 인물이 궁금했다.
사하 공화국은 자치공화국이지만 무늬만 그랬다.
체첸과 달리 푸틴의 지시를 철저히 따랐다.
이제는 러시아까지 날아간 장태산.
놈은 언제나 뒤통수를 뜨겁게 만들었다.
“러시아 보스의 행방과 관련될 수도 있습니다.”
“차르가?”
“제 예상으로는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왜?”
“그게 차르 스타일입니다.”
“흐음….”
틀린 말이 아니기에 리장창의 인상이 굳어졌다.
장태산이 러시아 보스와 친분이라도 쌓는다면 불행한 일이 된다.
동지인 것 같지만 과거부터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를 경원시 했다.
같은 공산권이지만 추구하는 바와 가는 길이 엄연히 달랐다.
“사람들을 풀어보겠습니다.”
“조심해…. 러시아 놈들은 음흉해.”
“넵!”
***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유리잔에서 독한 보드카 냄새가 흘러나왔다.
“한 잔하겠나? 몸을 녹이는 데는 이만한 게 없지.”
편하게 말을 놓는 남자.
큰 키는 아니지만 내적 기운은 거인이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날 보고 탐색전을 벌였다.
관상이…. 조정희 대통령상과 비슷했다.
독재자.
불안한 러시아 정치를 휘어잡아 안정을 취했다.
정적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단하는 냉정함도 닮았다.
남자의 손에 의해 사라진 숫자는 수백, 수천을 넘었다.
미래에 가서는 수시로 독극물로 무수한 이들을 제거했다.
웃고는 있지만 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 총을 들 남자였다.
2008년 금융위기 속에서도 철권을 휘둘러 러시아를 안정시켰다.
지금도 금융 시장이 불안하긴 마찬가지이지만 끄덕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술잔을 건넸다.
“잘 마시겠습니다.”
이곳 남자들은 긴 말이 필요 없었다.
그가 내민 유리잔을 잡자 독한 보드카가 채워졌다.
타샤도 즐겨 마시던 러시아 국민 소주.
보기에는 그냥 물 같지만 내부는 깡으로 똘똘 뭉친 슬라브 민족의 피를 닮았다.
“위하여.”
잔을 들어 뭘 위하자는 건지 주어도 없이 외치며 목젖에 털어 넣는 남자.
“차르를 위하여.”
위험한 발언이지만 둘만 있는 자리이니만큼 진심을 담았다.
술을 털어 넣었다.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투명한 악마의 술.
신음 한 마디 흘리지 않고 삼켰다.
“좀 마시는군.”
“제 친구 타샤에게 배웠습니다.”
적당한 타이밍에 타샤 이름도 팔아줬다.
그녀 덕분에 홍콩에서 위기를 건넜다.
“소문대로 겁이 없는 친구야.”
피식 웃는 모습이 기분은 나쁘지 않는 것 같다.
이곳은 용담호혈이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정말 장난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십 명이지만 주변에 중대 이상의 특수요원들이 포진해 있을 것이다.
비행기를 비롯해 탱크도 부르면 바로 달려올 게 뻔했다.
21세기 러시아의 황제 푸틴.
몇 년 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를 몇 번이나 오르기도 한다.
현재 총리의 신분이지만 대통령도 그의 구두를 혀로 핥아야 할 정도다.
레닌그라드 노동자 가문 출신이었다.
부모는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살아남았지만 가난하고 아팠다.
없는 집안의 머리 뛰어난 자식들의 개천 용 루트를 따랐다.
실력을 바탕으로 첩보부에 뛰어 들었고 KGB요원이 됐다.
동독 파견 중에 독일 통일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봤다.
그곳에서 소련의 몰락을 예견했고 KGB를 그만뒀다.
그리고 정치계에 투신해 업적을 남겼다.
탁월한 능력으로 1999년에 옐친에 의해 총리에 올랐고 체첸 전쟁으로 국민적 영웅이 됐다.
그리고 차지한 2000년의 권좌.
미국과 외교적 대립을 통해 국민적 자존심을 회복시켰고 독재로 경제, 군사, 정치, 사회적 안정을 이뤄냈다.
총선에 140%가 넘는 불법 투표율을 지휘할 정도로 뻔뻔했다.
국민들은 먹고 살만했기에 그를 용서했다.
아니, 정적이 없다 보니 감히 반발하지 못했다.
뱀과 같은 두뇌를 가진 사내였다.
만만치 않은 힘도 소유했다.
필요하면 미국 대통령에게도 욕을 퍼부었다.
유일하게 세상에서 미국과 맞짱 뜰 수 있는 군사력이 바탕이 됐다.
나토의 위협에도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주변 국가를 무력으로 제압했다.
세계의 진정한 깡패 푸틴.
전 재산이 수천 억 달러에 달하는 그가 지금 날 보고 있었다.
오늘 만남으로 인해 앞으로의 미래가 결정됐다.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와 난 얽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한 잔으로는 모자란 것 같습니다.”
잔을 내밀었다.
“이곳이 많이 추워.”
푸틴이 보드카를 채워줬다.
대한민국 국적으로 대통령 빼고 이런 대접 받는 사람은 없었다.
두 번째 잔을 비웠다.
“그 동안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만족한 거래였지.”
러시아 친구 사귀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한번 마음 열면 평생 배신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미래 시리아 대통령도 푸틴이 살려줬다.
미국과 유럽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고 보호를 받아 다시 시리아를 재건했다.
푸틴은 세상 누구라도 만만하게 보는 북극의 황제였다.
“새로운 거래를 트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놀이동산 착공에 들어간다.
금융 위기 여파로 러시아는 달러가 부족했다.
러시아 은행들이 지금도 무너지고 있었다.
바닥을 치고 유가가 상승했지만 러시아는 타격을 받았다.
전체 산업에서 석유와 천연 가스, 광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높았다.
베네수엘라처럼 모든 재정이 석유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러시아도 만만치 않았다.
지방 권력은 철저하게 나눠먹었다.
기업들은 영세하고 회계장부는 불투명했다.
국가 자금운용과 관리능력은 취약했고 시스템이 비효율적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계속 노력했지만 외환보유고는 빠르게 녹아 사라졌다.
주가지수는 바닥을 찍고 상승 중이지만 작년의 반 토막밖에 안 됐다.
신용 리스크도 계속적으로 유동적이었다.
“거래라…. 러시아에 대해서 뭘 좀 아나?”
한 모금 보드카를 마시며 묻는 차르.
조국에 대한 자존심이 대단한 자였다.
“2009년 국내총생산액은 1조 2,300억 달러, 1인당 국내총생산은 8,700달러, 올해 성장률은 금융위기 여파로 -8%, 전체 교육 규모는 4,400억 달러, 오늘까지 외환 보유고는 4,367억 달러, 총 외채 4,720억 달러 정도 되겠군요.”
“!!!”
줄줄 나오는 러시아 경제 상황에 푸틴이 놀라움을 표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러시아 시장에 대한 보고서를 받았다.
“그리고 총리께서는 두려워하고 계십니다. 유가를 비롯해 자원이 다시 폭락해 치명타를 가할까 염려하고 있는 거지요. 환율 또한 과거처럼 엉망이 될까봐 걱정되고요. 그 때처럼 말입니다.”
세계 국가 깡패 두목 앞에서 조잘거렸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첩보국 출신답게 능숙하고 재빠르게 감정을 숨겼다.
“독일이 통일될 때 느꼈던 감정을 기억하십니까?”
“…흥미로웠지.”
“두려우셨겠지요.”
“내가?”
두 번째 질문이 나왔다.
“국내로 돌아와 첩보국에 사표를 내고 옛 동료들이 부를 때 숨어 계셨지 않았습니까. 소련연방이 붕괴될 때도 지금과 비슷했습니다. 인간이라면 공포심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공포라….”
푸틴은 공포라는 말을 곱씹으며 보드카를 한잔 더 마셨다.
“1998년 그 때도 기억나지 않습니까?”
“…….”
푸틴이 술을 마시며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시아 각국에 퍼져버린 IMF발 독감 바이러스가 러시아에도 치명타를 입혔죠. 비열한 월가의 탐욕가와 미국 정부는 러시아를 무장 해제시켜 난도질했습니다.”
남의 일처럼 말했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남들처럼 달콤한 말로 저 위험한 황제를 친구로 만들 수 없었다.
“돈 몇 푼에 러시아의 자존심을 건들었습니다. 특히 IMF의 피셔라는 작자의 행태는 치가 떨렸죠. 세금을 늘리고 재정적자 규모를 줄이라고 협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에서도 일본과 독일을 꺾었던 러시아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습니다.”
이야기가 줄줄이 엮여 나왔다.
“12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와, 유럽과 짜고 친 포커판에 놀아났죠. IMF의 배후인 미국에 의해 옐친과 러시아 의회인 두마까지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총리께서도 알고 계시나 모르겠습니다, 골드만삭스가 크레믈린 당국이 모라토리움과 루블화 평가절하를 실시하기 전에 연맹회관에서 파티를 벌인 일말입니다.”
잔을 내밀었다.
말없이 잔을 채워주는 푸틴.
“엉망인 러시아 채권 발행을 자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멍청한 관료들이 12억 달러를 빌리기 위해 5,000만 달러를 수수료로 지불했습니다. 12억 달러 중에 5억 달러는 골드만삭스에 먼저 갚도록 판이 짜졌습니다. 연리 40%짜리 고율의 채권이었습니다. 그리고 벌어진 러시아 정부의 파산~ 한 편의 아름다운 시나리오였습니다.”
시원히 보드카를 원 샷으로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봐야 취하지 않았다.
트럼프를 잡는 것과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가난하게 태어난 푸틴과 달리 트럼프는 금수저였다.
자존심의 무게와 중심이 달랐다.
푸틴은 러시아가 곧 자신이었다.
그에 반해 트럼프는 돈이 자신이었다.
“러시아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군.”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한국도 IMF에 철저하게 농락당했습니다. 월가의 핫머니들이 국민의 자산을 모조리 쓸어 갔습니다. 멍청한 관료 조직은 푼돈에 영혼을 팔았습니다. 확실하게 제거하지 못한 친일파 상류층과 파티를 벌였습니다.”
러시아는 IMF에 영혼까지 탈탈 털린 동지였다.
“더러운 놈들이지.”
“돈에 모든 걸 파는 세상의 기생충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두려워한다는 것인가?”
“네. 총리께서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푸틴이 날 직시했다.
“언제 또 당할지 모릅니다. 지금은 외환보유고가 넉넉해 보이지만 월가의 자본가들이 어떤 판을 짰는지 모릅니다. 당장 루블화가 평가 절하되고 유가가 폭락하면…. 1년 안에 러시아는 다시 악몽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올 초 주가가 2,498에서 492로 폭락했던 이유가 그냥 나타난 수치가 아닙니다.”
물론 뻥이다.
푸틴에게 약을 팔았다.
나는 빤히 알지만 그는 미래를 모른다.
내가 아는 미래에 러시아는 위기를 겪을지언정 망하지는 않는다.
워낙 땅이 넓고 기초 체력이 강했다.
국민들 스스로 버텨내는 힘이 대단했다.
수백만 병력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도 다시 일어나 독일을 밟았던 민족이었다.
그 저력의 DNA가 그들 몸에 새겨져 있었다.
“내 공포의 이유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
“총리를 러시아 국민들이 사랑하십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답했다.
또로록.
푸틴은 다른 말없이 보드카를 따라 마셨다.
“…….”
짧게 이어진 깊은 침묵.
“더 마시게…. 이 잔은 친구가 주는 술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