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9
회귀의 전설
379장. 선수촌에서 (1)
“저 자식 뭡니까?”
“어제부터 재수 없더니….”
“간뎅이가 부은 거 아닙니까?”
“X새끼!”
선수촌 내에도 파벌이 존재했다.
어떻게든 안면이 있고 아는 사람들 위주로 밥을 먹는 건 인지상정이었다.
같은 운동을 하는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곳곳에서 식사를 했다.
훈련 양이 많은 고된 하루를 보내려면 높은 열량을 필요로 했다.
아침밥을 저녁처럼 먹었다.
그중에서도 격렬한 운동에 속하는 아이스하키 대표들은 먹는 것부터 달랐다.
전원 남자인 데다 식사량이 장난 아니었다.
다른 운동과 달리 선수들도 많아 선후배 간의 군기가 엄했다.
소속감이 남다른 하키 선수들 중 몇몇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선수촌에서는 절대 불가침의 성역 같은 그녀가 밥맛 떨어지는 놈 앞에 앉았다.
모든 이들이 정신없이 숟가락을 움직이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지금껏 코치나 같은 파트인 피겨 후배들이 아니면 함께 밥을 먹지 않던 김유나였다.
그런 그녀가 그놈 앞자리를 잡았다.
“뭐야? 아는 사이였어?”
“어머…. 웬일이니.”
선수촌은 생각보다 공간이 작았다.
사방의 여자 대표선수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시작됐다.
동성인 그녀들에게도 김유나는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런 김유나의 파격적 행동에 모두 입을 놀리기 바빴다.
“민재 선배, 저 자식 손 좀 볼까요?”
“아우! 제비 같은 새끼가!”
하키 선수들이 같은 무리 중앙에 앉아 있는 천민재의 눈치를 봤다.
하키 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인물이었다.
10대 그룹에는 못 들지만 제법 탄탄한 천일 그룹 장손이 바로 천민재였다.
성장하는 동안 본인이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컸다.
공부도 곧잘 했고 체육도 좋아했다.
고등학교 유학 중에 하키를 배웠다.
고국에 들어와서도 하키 운동을 계속했고 대학교 졸업 후 국방체육부대에 입대한 상태였다.
신분은 군인이지만 모든 게 자율적이었다.
국가대표 신분으로 부대가 아닌 이곳 선수촌에서 생활했다.
휴가도 많아 일반인과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생활 리듬에 변화가 없었다.
말하자면 무늬만 군인이었다.
그런 천민재는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하키팀의 주장처럼 군림했다.
천일 그룹의 압도적인 지원으로 하키팀 재정은 항상 빵빵했다.
수시로 해외 원정을 나갔고 그때마다 천일 그룹 측에서 상당한 금액을 후원했다.
그러다 보니 선수들이 눈치를 봤다.
천민재에게 잘 보이면 천일 그룹 소속 하키 선수가 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사업체들 중 몇 곳만이 존재하는 하키팀이었다.
“저 새끼…. 돌았네.”
천민재 눈에 광기가 돌았다.
있는 집 자식답게 한 번 욕심 낸 건 반드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김유나도 그중 하나였다.
나름 공을 들이고 있었다.
얼마 전에야 선수촌 남자들 중 피겨 계열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김유나와 말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선물뿐만 아니라 김유나가 좋아하는 초콜릿 같은 간식을 수시로 건넸다.
선수촌에서도 암암리에 소문이 파다했다.
천민재가 김유나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건 알만 한 사람은 알았다.
그런데 오늘 예기치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평소 홀로 밥을 먹던 김유나가 그 녀석 앞에 앉았다.
약속이나 한 듯 모두의 눈이 쏠린 그 순간.
“오빠….”
김유나가 그놈을 향해 오빠라고 불렀다.
“!!!”
그 모습에 놀란 천민재가 쥐고 있던 숟가락을 움켜쥐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손가락 끝에서 휘어지는 숟가락.
천민재 얼굴이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
오빠?
유나야, 너 그러면….
-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를 습득했습니다.
- 지속적으로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 당신을 원망하고 질투하는 기운이 강해졌습니다.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가 가속으로 지급됩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밥 먹는 중에 사방에서 레이저가 날아왔다.
여자 대표선수들과 달리 남자 국대들 대부분이 곧 나를 잡아먹어 버릴 것 같았다.
김유나는 이곳에서도 원탑이었다.
근육질의 여자 선수들 중에서도 단연 빛났다.
그런 김유나가 내 앞에 자연스럽게 앉으며 오빠라고 부르자 난리가 났다.
들리지 않지만 무서운 소리 없는 아우성.
잘못한 것도 없이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가 착실하게 적립됐다.
“앉아도 되죠?”
앉기 전에 물었어야지, 너 이미 앉았다.
김유나는 아직 어렸다.
머리칼을 질끈 묶고 나타난 김유나는 지난밤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법정 미성년자인 그녀를 대하는 데 조심스러웠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빙판의 여왕.
“당연하지~.”
눈길과 질투가 두려워 내 갈 길 못 가는 바보 아니다.
활짝 웃으며 김유나를 앞에 앉혔다.
“고맙습니다~. 헤에.”
김유나가 웃었다.
해맑다는 표현이 정말 어울리는 소녀였다.
쌍둥이 여동생을 보는 것 같았다.
“아침 훈련하고 왔어?”
“네! 오빠 덕분에 몸이 완전 가벼워요!”
그러고 보니 하룻밤 사이에 김유나 얼굴이 많이 밝아졌다.
특별 치료 덕분에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빙판 위를 훨훨 난 것 같았다.
얼굴 표정이 그녀의 현재 컨디션을 말해줬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네~.”
그녀와 나 사이에 정답게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갔다.
-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가….
계속 터지는 알림음.
아니 김유나와 아침 밥 좀 같이 먹었다고 이런 적개심은 아니잖아?
나도 미성년자는 관심 없다고!
“그런데 그걸로 되겠어?”
김유나의 아침 식사가 부실해 보였다.
과일과 풀밖에 보이지 않았다.
“따로 마시는 단백질 셰이크로 보충해요.”
여왕은 먹는 것도 달랐다.
다른 동성 국가대표들 접시에는 수북하게 온갖 고기가 쌓여 있었다.
“먹자.”
“……오빠. 정말 고마워요.”
김유나가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압박 같은 거 받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해. 넌… 이미 최고야.”
격려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김유나.
“진짜 오빠 같아요.”
“친오빠라고 생각해. 언제 내 쌍둥이 여동생들 소개시켜 줄게.”
“정말요?”
“그럼~ 한 번 오빠는 영원한 오빠 아니겠냐.”
“우와! 약속!”
갑자기 김유나가 손을 뻗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파바바바밧.
그 순간 사방에서 바늘 침처럼 날아오는 질투의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는 것 같았다.
“그, 그래.”
하지만 나도 손가락을 걸었다.
-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 하루 습득 기록이 갱신되었습니다. 특별 보너스가 지급되었습니다.
***
“반갑다. 크로스컨트리 스키 코치를 맡고 있는 허준원이다.”
아침 식사 후 시작된 본격적인 오전 훈련.
나와 룸메이트 조영준, 그리고 여자 대표 권예림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해 봐야 크로스컨트리 스키는 단 세 명의 선수가 전부였다.
반갑다고 인사하는 허준원 코치는 사십 대 초반.
색깔 있는 스포츠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어깨를 잔뜩 올린 채 허세를 부렸다.
한눈에 봐도 대표팀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 달에 450만 원 고정 수입에 수당까지 받는 지도자 신분이었지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영준과 권예림도 허세 작렬인 코치를 신뢰하지 않는 눈치였다.
관상도 별로였다.
권력 있는 자들의 눈치를 보는 간신배 상이었다.
코치라면서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도 별로 없었다.
“반갑습니다.”
그래도 내 앞에 지도자로 선 만큼 나도 예의를 갖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네가 장태산이냐?”
“네.”
“……어린 게 빠져가지고.”
뭐야? 보자마자 시비야?
아침부터 어둠의 카르마 포인트를 잔뜩 받은 참인데, 분위기도 모르고 시비 터는 허준원.
뜨거운 감자인 나를 몰라봤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빠져요? 뭐가요?”
호구 인생은 이번 생에는 살고 싶지 않고 용납할 수도 없다.
코치고 뭐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싸가지 없는 인간에 대한 교육이 선행돼야 했다.
“뭐야? 너 지금 나한테 개기냐? 나 누군지 몰라?”
“그러는 그쪽은 나를 잘 압니까?”
“뭐, 뭐? 이 새끼가!”
한 대 칠 기세로 확 다가오는 허준원.
어이가 없었다.
세상이 어느 때인데 코치 권위를 내세워 초면인 선수한테 반말 찍찍하고 시비를 건다고?
맞아가며 운동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2009년은 아직 과도기적 시기였다.
넓은 실내 체력 단련장 구석에서 사방을 지켜보고 있으니 가관이었다.
곳곳에서 욕설이 터졌다.
“야! 이 새끼야! 밥 안 처먹어? 힘을 쓰란 말이야! 힘!”
“아이고…. 두야. 너 대가리는 장식품이냐?”
선수들을 향한 지도자라는 코치들의 막말이 장난 아니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죄지은 사람처럼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긴 과거의 나도 이런 식의 문화는 익숙했다.
군대에서 수시로 갈굼 당하던 것과 비슷했다.
“이 새끼들 빠져가지고! 너희들 셋 세트 더 돌려!”
“한 대 맞아야 정신 돌아올 거지?”
특히 옆에 있던 쇼트트랙 팀은 눈꼴이 시려 못 볼 정도였다.
선배로 보이는 선수들이 후배들을 제대로 굴렸다.
그러고 보니 과연 과거 후배들 폭행으로 유명세를 탔던 얼굴이었다.
아버지가 체육회 관계자라던 놈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밑에 선수들은 다들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그의 미래를 알고 보려니 더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그중 한 놈이 유난히 더 악독하게 굴었다.
저 자식은 나중에 TV에도 나오고 잘 먹고 잘 살았다.
금메달리스트라는 경력을 가졌고 가정이 있음에도 바람을 수시로 피우고 다니다 이혼을 당했다.
성격도 개차반이었고 일명 주순자 사건에 연루되어 개쪽을 팔았다.
하긴 한번 걸레로 전락하면 다시 수건이 될 수 없는 법.
엘리트 체육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너 다시 말해봐. 그쪽은 나를 압니까? 너 뭐야! 한국대생이면 다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코치한테 대들어? 특혜 받는 유세하냐? 건방진 새끼가 어디서 큰 소리야!”
허준원이 나의 한마디에 뒤집어지며 지랄을 떨었다.
이곳에서 지금껏 이런 식의 태도와 성질로 군림한 것 같았다.
훈련 중이던 다른 선수들과 코치들이 흥미롭다는 듯 우리 쪽을 쳐다봤다.
다른 선수들이 욕을 먹고 폭력을 당해도 진심 어린 관심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선수촌에서 조용히 살다 가고 싶었지만 세상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꼰대 문화의 엑기스가 여기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한국대생이 왜 나옵니까? 특혜요? 그럼 특혜받은 자의 횡포 제대로 한 번 보여 드려요?”
참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입이 터진 김에 더 떠들어댔다.
“아는 로펌 대표 선배님께 전화 한 통 드릴까요? 아니지~ 선배 기자도 좋겠네. 여기가 선수촌 맞아요? 우리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입니다! 인격적으로 대해야 맞지 않습니까?”
나름 잠자는 사자가 포효를 터트리듯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우리라는 말로 선수들의 동조를 끌어냈다.
“…….”
처음 당해보는 상황에 허준원이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뒤늦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허준원 코치가 눈이 돌아갔다.
“이, 이 새끼가!”
쫘아앗!
볼에 느껴지는 화끈한 손맛.
싸대기였다.
충분히 날아오는 허준원의 손목을 잡을 수 있었지만 그냥 맞았다.
원래 멍석은 제대로 깔려야 제 맛.
이제 정당방위 요건이 1차 성립됐다.
“코, 코치님!”
룸메이트 조영준이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놀라며 내 앞을 막아섰다.
“넌 뭐야!”
“첫날이라 잘 모를 겁니다. 그러니 코치님이 이해하시고….”
“이 새끼가! 너도 한패야? 저리 안 꺼져!”
적과 동지는 이럴 때 확실히 구분되는 법이다.
허준원이 폭력을 행사했다.
눈이 휙 돌아간 미친놈.
이제 남은 건 진정한 갑질이 뭔지 보여주는 것.
“후후후….”
입술을 비집고 비릿한 실소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