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6
회귀의 전설
376장. 이상한 나라의 귀신들과 선수들 (1)
사아악 사아악 사아악.
경쾌하게 스케이트가 빙판을 갈랐다.
시간은 늦은 밤 11시.
새벽부터 시작된 연습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김유나는 이 공간을 독점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아직은 열악한 피겨 스케이팅 훈련 환경이었다.
새벽 일찍 나와 2시간 정도 사용하다, 나머지 시간은 후배들에게 양보했다.
그 이후에는 아침을 먹고 실내 체육관에서 스트레칭을 하거나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대체했다.
사방에서 보이는 관심에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김유나는 혼자 있는 공간을 선호했다.
그러다 다른 선수들이 사라지면 밤 9시 이후에 스케이트장을 이용했다.
국민적 관심에 선수촌에서도 나름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만큼 김유나의 어깨가 무거웠다.
7살 때부터 피겨를 시작했다.
피겨 특강이라는 걸 받다가 흥미를 느끼면서 시작한 스케이팅.
이제는 두려웠다.
2003년 트리플 점프를 뛰다가 발목 부상을 당했다.
그 여파가 작지 않았다.
부모에게 스케이팅을 그만 두겠다고 반항도 했었다.
또래 친구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운명처럼 다시 스케이팅을 시작하게 되면서 2004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게 됐다.
피겨의 길이 쉽지 않았다.
계속되는 부상과 동료이자 경쟁자인 아사다 마유와의 비교도 감당하기 벅찼다.
선플 속에서도 악플들이 범람했다.
김유나는 알게 모르게 많은 상처를 받았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처럼 피겨를 평생 취미로 삼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일이 커졌다.
그냥 재미있어서 시작했다가 이제는 전 국민이 김유나를 응원하기에 이르렀다.
또 다른 형태의 피 말리는 한일전이 되었다.
하늘은 김유나를 한국에 허락한 대신 일본에도 아사다 마유를 보냈다.
김유나도 오기가 생겼다.
실력도 뛰어났다.
대한민국 피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재라는 칭송도 받았다.
100년 이내 다시 탄생할 수 없는 피겨 천재라 불렸다.
김유나는 힘들게 버텨내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적이 많았다.
세계 피겨 협회를 좀 먹는 파벌들과 그들만의 자존심이 김유나를 밑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피겨 협회에 가장 많은 후원금을 내는 일본 선수에는 모든 점수가 후했다.
하지만 김유나 점수는 언제나 최고의 실력을 보여도 박하기만 했다.
교과서라 불리는 엣지도 롱엣지 판정을 받았다.
그에 반해 아사다는 감점 요소가 도리어 플러스가 됐다.
프리나 플립도 어텐션 판정이 수시로 떨어졌다.
고질적인 허리 부상도 재발을 반복했다.
진통제를 맞고 대회에 나가기를 몇 차례나 했다.
끝을 보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시비를 거는 플립을 단독 프로그램으로 바꾸고 트리플 러츠와 트리플 토룹으로 교체했다.
연습을 반복해도 완성이 쉽지 않았다.
코치들도 쉬는 이 시간에 나와 빙판을 누볐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프로그램을 짜는 건 코치들이지만 그걸 연습해 완성해 가는 건 김유나 자신의 몫이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니 내밀어도 도움이 안 됐다.
촤아아아아앗! 촤앗!
김유나는 쇼트 프로그램을 끝내고 바로 프리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빙판을 돌며 리듬을 탈 준비를 시작했다.
숨을 고르고 마지막 화려한 비상을 위해 날개를 펴갔다.
음악은 흐르지 않지만 지금껏 수백 번을 들었던 리듬에 동작을 맞췄다.
동계 올림픽이 멀지 않았다.
실력으로 압도하면 됐다.
찍소리도 못하게 더러운 심판들의 눈을 홀리면 끝나는 것이다.
김유나는 힘을 짜냈다.
다른 어떤 곳보다 이곳 태릉 아이스링크장에 오면 힘이 났다.
뭔지 모르지만 누군가 지켜봐 주고 힘을 주며 도와주는 것 같았다.
넘어져도 덜 아팠고 울음이 터져도 슬프기보다 위로가 됐다.
공기 중에서 어깨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끼는 듯했다.
잠을 자도 숙면을 취할 때가 많았다.
그런 태릉선수촌의 아이스링크장.
사아아아아악.
김유나의 신형이 매끄럽게 빙판을 쳐나갔다.
4분 10초간 이어지는 프리스케이팅.
필수 구성으로 점프 7번, 스핀이 3번, 스텝과 스파이럴이 각각 1번씩 총 12가지 구성이 들어가야 했다.
척!
자리에 멈춰선 김유나.
숨을 골랐다.
음악을 생각하며 그녀만의 축제를 시작했다.
스륵.
칼날이 매끄럽게 나갔다.
김유나는 몸짓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갔다.
손끝에 담기는 5000년 한민족의 한.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그냥 어느 순간 스케이팅을 하는 시간이면 애절한 느낌과 선율이 몸과 마음을 점령했다.
마디마디 스치는 누군가의 아픔과 고통.
나비 같은 춤사위로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촤앗 촤아아아아앗.
힘차게 가르기 시작하는 매끄러운 빙판.
한 마리 우아한 천상의 새처럼 김유나는 가볍게 몸을 띄웠다.
첫 번째 구성 요소인 트리플 러츠와 트리플 토루프.
기본 점수 10.10의 가장 높은 기술.
부웅.
하늘은 나는 것 같았다.
누군가 허리를 잡아주며 허공으로 끌어올려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사라라라라랏.
몸이 거짓말처럼 가뿐하게 돌았다.
오늘따라 더 몸이 가벼웠다.
촤라라랏.
가볍게 착지하며 다시 이어지는 트리플 플립.
“아!”
완벽한 연속 동작에 김유나는 짜릿한 쾌감을 맛봤다.
이 맛에 스케이팅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우주의 기운과 내가 하나가 된 듯한 이 기분.
비상할 때마다 환상처럼 눈앞에 그려지는 전생의 모습.
김유나는 천상의 꽃밭을 나는 한 마리 나비였다.
근심도 미련도 없이 평안의 세계에서 꽃 잎 위를 날고 있던 나비.
애달픈 한민족을 위해 잠시 인간계에 헌신했을 뿐이다.
본향으로 다시 찾아가는 그 날까지 김유나는 스케이팅을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주루룩.
두 눈을 타고 흐르는 눈물.
그녀의 손과 발끝, 몸짓 하나하나에 살풀이 굿 같은 한이 풀려 날아갔다.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동작이 연결됐다
앞으로 석 달이 조금 넘게 남은 연습 기간.
오늘처럼만 같기를 바라며 김유나는 힘을 냈다.
어느새 열 번째 구성인 시퀀스가 끝나갔다.
마지막으로 가볍게 더블 악셀만 뛰고 스핀 동작으로 들어가면 됐다.
꿈처럼 흐른 시간.
김유나의 몸이 가볍게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데….
“!!!”
갑자기 허리에서 시작되는 찌릿한 고통.
김유나의 자세가 무너지며 비틀어졌다.
그리고….
콰다다당.
착지까지 문제가 생기면서 빙판 위에 김유나가 쓰러졌다.
“아아아악!”
발목부터 시작해 엉덩이, 그리고 허리에서 목뼈까지 온몸에 가해지는 고통에 김유나는 비명을 질렀다.
주변에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코치도 없었다.
선수촌의 배려로 이 시간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이스링크장.
“흑….”
김유나의 악 다문 입술 사이로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
진정 아름다웠다.
전 생을 통틀어 TV나 인터넷으로나 접했던 김유나.
그녀의 연기를 수백 번 돌려봤을 만큼 대단했던 영원한 빙판의 여왕 김유나.
그런 그녀가 눈앞에서 검은색 연습복을 입고 춤을 췄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실제로 보니 진짜 팔다리가 길었다.
몸매 비율이 천상 선녀 같았다.
얼굴도 조막만 했다.
어떤 여자 연예인들보다 더 강렬한 오로라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인간계에 잠시 하강한 여신이 분명했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애절한 표정 연기는 연습에서도 변함없이 감동을 줬다.
한 편의 종합 예술을 보는 듯했다.
감동과 몰입으로 김유나의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름다웠다.
스케이팅 한 번에도 그녀의 모든 정성이 스며들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모습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대로였다.
김유나는 빙판 위에서 빛나는 별이었다.
그것도 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 대 스타.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벌린 채 그녀의 모습 하나 하나를 지켜봤다.
운 좋게 쇼트 프로그램부터 시작해 프리까지 볼 수 있었다.
이 넓은 아이스링크장에서 나만 홀로 그녀를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그녀는 한 마리 검은 나비 같았다.
모든 색이 그녀와 어울렸지만 올 블랙 연습복은 더 멋졌다.
물 흐르듯 그녀의 동작들이 연결됐다.
뭔지 모르지만 김유나도 깨달음을 얻은 듯 동작들이 더 매끄러워졌다.
아름다운 구성들이 하나둘씩 마무리 되어갔다.
나도 모르게 몰입해 그녀를 응원했다.
김유나를 본 것만으로도 선수촌에 들어오면서 느낀 모든 불만이 녹아내렸다.
“!!!”
그런데 그때 김유나의 자세가 비틀어지는 게 보였다.
콰다다당.
당황한 사이 빙판 위에 김유나가 쓰러졌다.
“아아아악!”
김유나가 비명을 질렀다.
제대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주변에 나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코치도 없었다.
김유나의 비명에도 조용하기만 한 아이스링크장.
“흑….”
김유나는 쉽게 일어서지 못하고 서러운 듯 눈물을 흘렸다.
가슴이 미어지고 아파왔다.
그러나 달려갈 수가 없었다.
괜히 나섰다가 오해에 휘말릴 소지가 있었다.
“헛!”
그때 갑자기 눈에 들어온 광경 하나.
응원석 정중앙 상단에 일단의 그림자들이 보였다.
순간 그 무리들이 쓰러져 흐느끼는 김유나를 향해 날아갔다.
한둘이 아니었다.
복장은 모두 다 조선시대 궁중 궁녀들 모습이었다.
선두에 선 궁녀는 상궁인 것 같았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남색 치마와 진녹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몇 명의 나인들.
빠르게 흘러가듯 움직여 넘어진 김유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폈다.
물론 김유나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상궁과 나인은 김유나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상태가 심하옵니다.
- 자칫 큰 병이 될 것 같사옵니다.
- 그 정도냐?
자기들끼리 말이 빠르게 오갔다.
넘어진 김유나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은 것 같았다.
고통 때문에 진통제를 맞고 경기를 뛰었다는 김유나였다.
다리부터 시작해 허리까지 고질병이 생겼다는 소문도 있었다.
특히 지금은 동계 올림픽이 석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연습은 고사하고 병원에 눕게 생겼다.
상궁이 갑자기 휘익 날아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 그곳에는….
화려한 왕후복장을 차려입고 있는 중년의 미부가 있었다.
딱 봐도 조선 궁중의 왕후다.
죽은 자들 사이에서도 그 기세가 장난 아니었다.
이곳 태릉의 안주인인 문정왕후가 확실했다.
늙어서 죽은 것으로 아는데 눈에 보이는 모습은 중년의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쌓아 놓은 카르마 포인트가 많았던 것 같다.
주변으로 상궁들 몇 명과 수십 명의 나인들이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안광이 시퍼런 무관들이 그 주변을 넓게 호위했다.
상궁이 무슨 얘기인가를 전달하며 조용히 입을 놀렸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눈빛이 나에게로 향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급기야 상궁이 둥둥 떠서 나를 향해 날아왔다.
“???”
나에게? 왜?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스륵.
눈 깜짝할 순식간에 상궁은 내 앞에 도착했다.
딱 봐도 차갑고 냉철하게 생긴 중년 아줌마였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상궁 귀신.
“어의는 왕후 마마의 명을 받들라!”
뭐, 뭐라고요? 어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