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회귀의 전설
245장. 호랑이 굴의 여우
“부사장님. 어떻게 할까요?”
경호팀장이 움직이지 않는 임준형에게 다가와 물었다.
엄청난 결례와 폭언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 중에 미친놈 빼고 오정에 저렇게 함부로 하는 놈은 처음이었다.
명령만 내리면 확실하게 처리 가능했다.
오정의 힘으로 압력을 걸어 모든 사업에 태클을 걸 수도 있었다.
가족들과 친척들도 일용직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숨만 쉬고 겨우 연명하는 삶으로 만들 힘을 오정은 소유하고 있었다.
‘100배……. 이상이라고?’
임준형은 충격을 받았다.
경호팀장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골프는 처음이라는 사실은 이미 사전 정보로 파악했다.
그래서 불러냈다.
아버지 임성철 회장이 대단한 놈이라 평가했지만 여동생 오빠와 오정의 후계자라는 지위로 살짝 눌러놓을 생각이었다.
거기에 더해 언더를 치는 골프 실력으로 좀 더 밟으려 했다.
이것저것 트집을 잡아 괴롭히려던 생각이 박살났다.
야생에서 홀로 방랑하는 수컷 사자가 떠올랐다.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강렬한 투기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더욱이 아이언으로 날려버린 골프공의 비거리는 잴 수도 없었다.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버지가 왜 녀석에게 귀히 여기는 막내딸을 넘기려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놈은…… 보통 놈이 아니었다.
노련한 사냥꾼 같은 놈이었다.
“부사장님…… 그놈을 잡아다가…….”
“혼자 있고 싶어.”
“넵!”
경호원들이 뒤로 물러났다.
골프장은 하루 종일 전세를 냈기에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임준형은 천천히 잔디 위를 걸었다.
요즘 무뎌진 자신의 칼날을 점검했다.
“국내에만 재산이 있지 않겠지……. 우리 또한 그러하니까.”
임준형의 머리가 모처럼 비상하게 돌아갔다.
지금껏 받았던 경영수업과 획득한 지식으로 철저히 점검했다.
다들 국내 주식 평가액만 알지 해외에 은닉한 비자금 규모는 몰랐다.
임준형이 알고 있는 바로 해외에 박혀 있는 가문의 비자금은 수십조가 넘었다.
해외 투자자 이름으로 들어와 주식을 소유하고 백기사 노릇을 담당했다.
장태산은 똑똑한 놈이다.
최소 알려진 자금의 몇 배 이상이 해외 자산으로 감춰져 있을 수 있었다.
그룹 정보망에 잡히지 않았을 뿐이다.
“건들지 말라고……. 후후훗.”
장태산은 안아 그룹을 직접 무너트렸다고 고백했다.
안아가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오정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스로 망해서 무너지기 전까지는 10대 그룹을 공중분해로 날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맹수들끼리 싸우다 상처입고 쓰러지면 다른 놈들에게 사냥당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장태산의 말이 사실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도 안아가 박살 난 진짜 이유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일을 장태산이 고백했다.
사실이라면 충분히 능력을 인정해줘야 했다.
“나이가 어리다고 얕봤어. 미련하게…….”
요즘 집안 문제로 정신이 맑지 않았다.
그러나 장태산을 만난 후 뭔가 확 뚫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미적거릴 일이 아니다.
어차피 아내의 마음은 떴다.
부부간의 정이 식은 지 몇 년 째다.
아이들에게서는 아빠와 함께 있겠다는 약조를 받았다.
아내 또한 집안에 그리 충실하지 않았고, 은근 친정 일에만 신경을 많이 썼다.
그룹에서도 눈치를 보고 아내의 친정을 밀어줬다.
정도가 심해지자 아버지가 경고하기까지 했다.
그 이후 아내와의 거리가 더 멀어졌다.
“장태산……. 고맙다. 그리고 일단 지켜봐주마. 만약……. 오늘 네가 한 말이 사실이 아니면……. 넌 내가 죽인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주먹을 움켜쥐는 임준형.
그의 눈동자가 오랜만에 샛별처럼 반짝였다.
***
- 카르마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재신이 당신을 위해 아낌없이 포인트를 지불했습니다.
갑자기 재신이 포인트를 쐈다.
재신의 정체는 임준형 가문과 연결되어 있는 조상이 확실했다.
나 때문에 임준형이 뭔가 깨달은 것 같다.
좌우지간 경고했으니 함부로 나서면 오정도 아웃이다.
“골프 한번 배워봐?”
임준형 덕분에 골프 세트를 장만했다.
폼 나는 골프복과 골프채를 들고 사무실에 올라갔다.
커다란 사무실 한 쪽에 퍼팅 연습시설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앞으로 세계 각국의 거물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골프 실력이 필요했다.
오바마부터 시작해 트럼프도 골프광이었다.
이제는 비즈니스를 신경 쓸 나이가 됐다.
아직도 민법이 개정되지 않아 법정미성년자 신분이지만 누구도 그렇게 안 봤다.
LOR 투자전문회사 대표 장태산.
명함이 곧 나를 증명했다.
20층 사무실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빠르게 올라왔다.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유세라 팀장은 퇴근 시간 전이다.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 마셔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유 팀장님…….”
그런데 사무실 중앙 의자에 앉아 있는 낯선 중년 여성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
“대표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유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알렸다.
“손님요?”
커피를 마시고 있던 여성과 얼굴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젊었을 때 귀엽고 매력적이었던 미녀 같았다.
그리고 한눈에 딱 알아봤다.
안면 가득한 반골의 기운.
미모 속에 독을 감추고 있는 욕망과 가식 덩어리가 그대로 투영 됐다.
웃고 있지만 날 향해 보이는 독기는 숨기지 못했다.
“강주희 위원장님이 이곳에는 웬일이십니까?”
“어? 날 한눈에 알아봐요? 대표님 저에게 관심 있었나 보네~.”
관심이 아니라 짜증 비슷한 감정이다.
순진하고 무식한 사람들 뒤에서 교묘하게 그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이중인격자다.
그녀가 국회의원이 되고서 보였던 행태는 잊히지 않았다.
앞에서는 정의의 투사처럼 행동했지만 결국 똑같은 욕망에 찌든 정치인일 뿐이었다.
과거 투쟁 역사를 교묘하게 편집해 잘 써먹었지만 동료들 입장에서는 배신자였다.
긴 수배 시간 동안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던 전설적인 여자.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었다.
가진 자에 대한 분노로 몸서리 쳤지만 강주희도 결국은 사회와 타협했다.
“유 팀장님 퇴근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커피는 뽑아 놨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유 팀장은 빠르게 사무실을 정리하고 사라졌다.
강주희의 시선을 받으며 골프 가방과 모자를 사무실 한 켠에 놓았다.
강주희가 없는 듯 자유롭게 아이스커피를 만들었다.
그녀를 의식하지 않았다.
“골프 치고 오는가 봐요? 학생이라던데 시간이 많네~ 체격이 골프 선수 같아요. 후배님 소문보다 더 잘난 건 같아~.”
강주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말을 짧게 자르는 분들만 만난다.
“임준형 부사장님이 한 게임 하자고 부르더군요.”
“이, 임준형 부사장? 오정의 임준형?”
강주희는 내 말에 귀를 의심하는 듯 놀라워했다.
오정은 그 정도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줬다.
“절 갑자기 보고 싶었답니다. 선배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훅 들어가는 말에 강주희가 눈빛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입가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가식적인 미소가 피어있었다.
원조 구미호 같았다.
저 미소에 순진한 한국대 법학과 선배들 여럿 작살났을 것 같다.
“어머, 어떻게 여자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 후배, 선수 맞지?”
말을 텄다고 생각한 듯 자연스럽게 반말로 대하는 강주희.
선수는 내가 아니라 강주희다.
저 나이에도 교태가 잘잘 흘렀다.
나이든 아저씨들 혼을 빼놓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다만 내 눈에는 추태로 보인다는 점이 아쉬웠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안면도 없는 후배 사무실에…….”
잡담은 이제 끝낼 때가 됐다.
오늘 임준형과 부딪쳤던 스트레스면 충분했다.
임준형이 바보도 아니고 앞으로는 나에 대해 조심하고 여러 면으로 준비할 것이다.
더더구나 아줌마와 노닥거릴 시간은 더 없었다.
“교수님들이 후배 엄청 좋아하더라~ 법학과를 빛낼 인물이라고 말이야.”
불특정 교수를 들먹였다.
수가 얇았다.
다른 학생들이었다면 좋아라 하겠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교수들은 내기 상대자였다.
“제가 입학한 것만으로도 법학과는 고마워해야죠. 한국대 법학과 이름 팔아먹고 사는 선배들보다 1,000배쯤 도움이 될 겁니다.”
완전 잘난 놈의 전형적 싸가지 말투로 응대했다.
빠직 강주희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대놓고 자신을 겨냥한 말이라는 걸 간파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잘난 후배들 덕분에 나 같은 허접한 선배들이 어깨를 펴고 사는 거지~.”
그러나 빡침을 바로 풀어버리고 웃는 강주희.
단수가 보통이 아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상대를 띄워주는 방법도 알았다.
“그럼 잘 하셔야죠~.”
“응?”
“후배들 안 쪽팔리게 선배님들이 관리를 잘함이 예의가 아닐까요? 이것저것 탈날 것들 주워 먹지 말고 말입니다!”
“!!!”
화살 하나가 공간을 가르고 강주희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말 속에 담긴 독기가 묻은 화살촉이 깊숙이 꽂혔다.
파바바바밧.
이제야 강주희 눈빛에서 감춰진 독기가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일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가면 벗기는 맛이 기가 막히다.
“후배……. 세상 무서운 게 없나 보네.”
이를 갈면서 나직하게 으르렁 거리는 강주희 본모습을 차분히 지켜봤다.
으드득 아이스커피의 얼음을 부셔 먹었다.
오늘 살풀이 한 번 진하게 해야 일진이 무사히 끝날 것 같았다.
때를 잘못 맞춰 찾아온 하이에나.
제대로 세상 무서운 걸 알려 줘야 할 것 같다.
오늘은 누구를 봐주고 하기에 마음이 너그러운 날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제가 사시미에 총 맞을 뻔한 거 모르시죠?”
빙긋 웃으며 말하는 나를 노려보는 강주희 눈동자가 흔들렸다.
세상 무서운 것 없냐는 말에 대한 완벽한 답변이다.
“총 맞아봤는데 화끈하던데……. 선배도 맞아 보실래요?”
“너, 너 지금 협박하는 거야!”
“에이, 이 정도는 협박도 아니죠. 대한노총 화학섬유연맹 정책위원장 그냥 따신 거 아니잖습니까? 수없는 협박과 억압 속에서 쟁취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곧 국회의원에도 도전할 생각 아닌가요?”
“헛!”
“뭘 놀라고 그러십니까.”
“너, 너 지금 내 뒷조사 했어?”
“선배님……. 아니 강주희 위원장. 당신도 그랬잖아!”
버럭 호통을 쳤다.
그녀가 내 뒤를 판 모든 행동들이 유추됐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림들.
“순진한 교수님들 뒤통수 그만 쳐. 그리고 좋은 말할 때 지금 하고 있는 일 손 떼.”
“……무슨 헛소리야!”
좋은 선후배 사이는 진작 글렀다.
아름답게(?) 반말이 오고 갔다.
일명 개싸움.
여자라고 이럴 때 봐주면 제대로 잔머리 굴릴 줄 아는 분이다.
서로 쿨 하게 깔 건 까고 가야 했다.
“안아, 아니 TS는 내가 찜한 밥이다. 당신 같으면 다 말아놓은 밥에 숟가락 들이밀면 좋겠어?”
씨익 웃었다.
이거 제대로 나쁜 놈 같았다.
“안아 네가 작업한 거 맞지? 네 거 맞지?”
이 와중에도 확인 작업 들어오는 강주희.
저렇게 독하니까 살아남은 거다.
그리고 미래에도 잘 먹고 잘 산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사무실에서 마음껏 웃었다.
왜 저렇게 아등바등 악에 바쳐 세상을 사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굴레를 만들고 벗어나지 못했다.
뚝.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강주희를 바라봤다.
“조금 전 임준형에게 했던 말 그대로 다시 들려주겠습니다.”
호랑이 굴에 걸어 들어온 잔머리 여우에게 던지는 마지막 충고.
“나 건드려서…… 두 발로 걸어 다닌 인간이 없습니다. 당신이라도…… 봐주지 않습니다. 강주희 선배……. 호랑이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리고 회색 꼬리는 감추는 걸 모르시지는 않겠죠? 평안하게 인생 마무리 하고 싶으면…… 후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