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화 기진맥진한 르네브 (137/148)


#외전 1화 기진맥진한 르네브
2023.08.15.


르네브는 잠기운이 남은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러자 이카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르네브, 졸리면 좀 더 자.”

르네브는 이카르의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제 일어나야죠…….”

말은 그렇게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르네브의 응석에 옅게 미소 지은 이카르가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언제 준비했는지 테이블 위에는 아침 식사가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카르가 그녀의 입에 구운 생선을 가져다 다며 말했다.

“먹여 줄게. 입 벌려.”

르네브는 반쯤 눈을 감은 채로 입을 벌렸다. 이내 껍질은 바삭하면서도 속살은 야들야들 부드러운 생선 살이 입안으로 쑥 밀고 들어왔다.

우물우물 생선 살을 씹어 삼키는 르네브를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카르가 다른 접시 위의 음식을 떠올렸다.

“르네브, 이것도 한번 먹어 봐.”

이번에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로스트비프가 입 앞에 내밀어졌다. 르네브는 입만 살짝 벌리고 음식을 받아먹었다.

그렇게 접시 위의 음식들이 착실히 비워졌고, 아침 식사가 끝나 갈 즈음이었다.

“흠…….”

무언가 고민하는 듯 이카르의 잘생긴 미간에 실금이 드리웠다.

“왜 그래요, 이카르?”

“황후의 체력 저하가 나날이 심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군.”

르네브는 시선을 떨군 채로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이카르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르네브의 체력은 점점 떨어져 가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직후 이카르는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밤낮 가리지 않고, 르네브를 탐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의 남다른 체력과 회복력은 제국에서도 제일이었지만, 르네브의 사정은 달랐다.

결국, 르네브는 병든 닭처럼 골골거리기에 이르렀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걸 힘들어했으며, 어디든 머리만 대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러자 보다 못한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이카르에게 항의했다.

‘황제 폐하께서 신혼을 즐기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황후 폐하의 몸에 무리가 갈 정도이신 건……. 조금 자중하심이 어떠신지요?’

하지만 이카르의 미간이 실시간으로 깊어지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항의는 끝에 가서는 다소 소극적으로 변했다.

‘황후의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가?’

하지만 그 정도로도 이카르는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 다급하게 말을 뱉었고, 벤더펠트 공작 부인은 서둘러 입을 뗐다.

‘그, 그것이 아니옵고……. 황후 폐하께서 요즘 낮 동안 많이 힘들어하십니다.’

‘나와 황후의 금실이 좋다는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오?’

‘그것은 그렇지만…….’

단단히 경고를 해 주겠다며 벼르던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었으나, 그녀 또한 이카르의 앞에서는 다소 기를 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르네브가 거들었다.

‘폐하, 제 체력이 못 버티는 건 사실입니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이카르가 말을 이었다.

‘황후의 일을 도울 만큼 유능한 시녀를 몇 명 더 들이면 될 게 아니오?’

이카르와 영 말이 통하지 않는다 생각했을 때였다. 타이밍도 좋게 르네브의 머리가 핑 돌았다.

맥없이 흐느적거리는 르네브를 보고 나서야 이카르가 생각을 바꿔 먹었다.

‘좋아, 그럼 하루 한 번으로 타협을 보지.’

그 이후 이카르는 바슈케르 제국 전역에서 몸에 좋은 음식과 약재들을 공수하라 일렀다.

해서 르네브는 식사 외에도 먹어야 할 것들이 대폭 늘었다.

“저 너무 배불러요. 이제 그만 먹을래요.”

르네브가 부른 배를 문지르며 말하자 이카르가 그녀를 타일렀다.

“그럼 오늘은 이것까지만…….”

결국, 몸에 좋다는 것들을 기어코 꾸역꾸역 르네브에게 먹이고 나서야 이카르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휴…….’

그제야 욕실로 향하는 이카르의 너른 등짝을 바라보며 르네브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욕실로 향하던 이카르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는 그녀를 돌아봤다.

르네브는 언제 한숨을 내쉬었냐는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같이 씻을까?”

갑작스러운 이카르의 제안에 르네브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와 함께 욕조에 들어가는 것이 부끄러워 피했다면, 이제는 다른 이유로 이카르와 함께 씻는 걸 피하게 된 그녀였다.

“그렇게 격하게 부정하면 상처받는데…….”

전혀 타격이 없는 얼굴로 이카르가 말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르네브는 이카르가 넓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저런 말을 하면 어쩔 줄 몰랐다.

그를 정말로 상처 입힌 것일까 봐.

하지만 이제는 그의 연기에 속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이카르가 혼자 편히 씻을 수 있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
이카르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르네브는 미소로 응수했다.

“좋아.”

그러자 이내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모습이 욕실로 사라지고 나서야 안심했다.

반면, 욕조에 몸을 푹 담근 이카르는 한쪽 입매를 삐뚜름히 끌어 올린 채로 조금 전 르네브의 반응을 반추했다.

‘설마…… 벌써 질린 건가?’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이카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불과 몇 시간 전의 상황만 떠올려도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 품에 안겨 행복에 젖은 채 울어 대던 그녀를 떠올리자, 또다시 몸에 열이 올랐다.

‘제길…….’

자신이 얼마나 절제하며 참고 있는지 르네브는 하나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

그날 밤.

욕조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나자 졸음이 밀려들었다.

르네브는 소파에 기댄 채로 이카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르네브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침실 안에서 이카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으시고…….”

르네브는 잠기운이 내려앉은 눈을 비비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곤히 자는 것 같기에.”

그녀의 이마에 쪽 입을 맞춘 이카르가 이내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 침대 위에 조심히 옮겨 주었다.

툭.

침대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르네브는 동그랗게 커진 눈을 깜빡이며 이카르를 쳐다봤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이카르가 이내 바닥에서 책 한 권을 집어 올렸다.

이카르가 책 내용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고, 르네브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게 왜…….”

그의 미간이 살짝 모였다.

반면 르네브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이카르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무슨 책인지, 어째서 그 책이 침실에 있는지 궁금했으니까.

“잠깐!”

그러자 그가 더 다가오지 말라는 듯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자연히 르네브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무슨 책인데 그래요?”

르네브의 물음에도 이카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듯.

신기한 일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던 이카르의 말문이 막히다니?

대체 무슨 책이기에?

게다가 그는 은근히 책을 빨리 눈앞에서 치우려는 듯했다.

그런 이카르의 태도는 르네브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살짝 몸을 웅크린 르네브는 반동을 이용해 이카르 쪽으로 몸을 날려 책을 빼앗으려 했다.

“아…….”

하지만 이카르가 엄청난 순발력으로 르네브의 손길을 피했고, 그에 따른 반동으로 르네브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

다행히 이카르가 재빨리 르네브의 몸을 받아 냈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유리 공예품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카르가 르네브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이런…… 놀랐겠군.”

갑자기 몸을 움직인 탓일까?

르네브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그건 이카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도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책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이카르야말로 많이 놀란 것 같은데요.”

르네브는 이카르의 품에 안긴 채로 그의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그렇게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있다 보니 곧 두 사람의 호흡도 안정을 되찾았다.

“괜찮은가? 아이는?”

르네브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이카르의 등을 아프지 않게 살짝 때렸다.

“아이는…… 아직 없잖아요.”

있지도 않은 아이의 안부를 묻다니.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

“어제 새벽, 오늘 아침. 언제 아이가 들어섰을지.”

그러면서 이카르가 은근히 그녀의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금세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오묘해졌다.

이카르의 얼굴이 서서히 르네브에게로 기울었다. 부드럽게 얽어 오는 이카르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르네브는 살짝 시선을 내렸다.

“……!”

그리고 바닥에 고스란히 펼쳐진 책을 보고는 기함했다.

순간, 르네브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단박에 눈치챈 이카르가 맞닿은 입술을 살짝 떨어뜨리며 물었다.

“왜 그러지?”

르네브는 황급히 이카르의 양 뺨을 쥐고는 제 쪽으로 돌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르네브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이카르였지만, 그가 딱 하나 참지 못하는 게 있었다.

바로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이렇게 그에게 집중하지 못할 때면 이카르는 르네브를 더욱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역시나. 이카르가 불쾌하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이카르가 제 뺨에 닿은 르네브의 손을 간단히 떼어 낸 뒤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고, 이내 촤라락 펼쳐진 책을 발견했다.

“아…….”

이내 낭패라는 듯 헛숨을 들이켠 이카르가 말을 이었다.

“르네브.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그, 정상적인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보는 것으로…… 교육 목적이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해.”

이카르가 답지 않게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무척 당황한 듯했다.

“교육, 이요?”

“그래.”

이카르가 태연한 척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안쪽의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어쩌다 이 책이 여기 있는지는 조사해 봐야겠지. 하지만 절대로 이 책 내용이 내 취향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란 것만 알아 둬.”

이카르가 하찮은 변명을 내뱉으며 책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듯 침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벽난로에서 멎었다. 태워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이카르!”

“……?”

“자, 잠깐만요!”

재빨리 이카르에게 다가간 르네브는 책을 든 그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이카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르네브를 쳐다봤다.

“후우…….”

르네브는 들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깊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입을 뗐다.

“폐하, 그건…….”

그러나 쉽게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건?”

르네브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이카르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설마 이게…….”

이대로라면 저 책이 르네브의 것이라고 이카르가 오해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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