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끝은 새로운 시작 (136/148)


#136화 끝은 새로운 시작
2023.08.14.


좋은 일이 겹쳐 오듯, 나쁜 일 또한 그랬다.

파라디움의 황제는 가장 사랑했던 여자와 믿었던 이들의 배신자들을 처단한 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몸져누웠다.

“……해서 현재 파라디움에선 1황자의 황위 계승이 확실시되는 상황인 모양입니다.”

드한이 말을 마치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르네브는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1황자의 건강은 이제 완전히 회복된 건가요?”

“최근엔 건강이 호전된 모양입니다만, 한때 죽음에 문턱에 다다른 전적이 있던 터라 1황자의 황위 계승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 1황자든 2황자든 황후 소생의 황자가 황위를 계승한다면 바슈케르에게 손해는 없을 테지만요.”

“그렇겠죠.”

“아, 그리고 황후 소생의 황자가 황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 영애의 공이 컸다는 사실을 바슈케르에 공공연히 알리자는 게 폐하의 의견이십니다.”

드한의 말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럼요! 꼭 그렇게 해야죠. 전쟁 없이 양국 간의 화합을 이루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게다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영애의 명성에도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말대로 르네브가 외국인 황후라는 데서 반감을 품는 귀족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파라디움에 관한 대화를 좀 더 나누었다.

황후의 집무실에서.

“이제 황후 폐하께서 사용하실 집무실도 거의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긴 합니다만, 저곳이 조금 허전해 보이는군요.”

드한이 집무실 벽면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곧장 말을 이었다.

“아, 거긴 최근 인기인 화가의 그림을 걸어 둘 예정이에요. 그리고 이곳에는 앙헬의 조각상을 놓을까 하는데 드한 경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두 사람이 집무실 안 실내 장식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르네브는 덩달아 집무실 안을 한번 둘러봤다.

넓고 깔끔하면서도 적당히 호화롭고,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집무실 환경이 그녀도 꽤 마음에 들었다.

“그건 그렇고, 드한 경은 이만 돌아가 보지 않아도 괜찮나요?”

르네브의 물음에 드한이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는 최근 르네브에게 상황을 보고하러 온다는 핑계로 황후의 집무실에 들러 휴식을 취하곤 했다.

드한이 얼마나 바슈케르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 르네브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농땡이를 피우러 올 때마다 르네브도 함께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댕, 댕, 댕.

그때 3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드레스 시착을 위해 저희는 이만 가 봐야겠어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제법 호들갑을 떨며 드한을 쳐다봤다.

여전히 반 이상은 남은 찻잔을 내려다보던 드한이 벤더펠트 공작 부인을 빤히 응시했다.

그 또한 벨더펠트 공작 부인이 말하고자 하는 속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르네브와 자신은 이제 가 봐야 하니, 드한 더러 남은 황후의 업무를 처리하라는 것 말이다.

“드한 경?”

드한이 아무 말도 않고 차만 홀짝이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본격적으로 말했다.

“급히 돌아가 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시다니, 결혼 준비로 한창 바쁘신 황후 폐하를 위해 조금의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죠?”

“…….”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드한 경도 아시다시피…….”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르네브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예!”
드한이 곧장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귀부인께서 무슨 말씀하시려는 건지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남은 업무는 제가 보고 있습니다. 드레스 시착을 하고 오시죠.”

뜻하는 바를 이뤄 만족스럽다는 듯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깃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드한 경께서 친히 도와주신다고 하시니, 저희로서는 사양할 이유가 없겠네요. 그렇지 않나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시무룩한 드한과 그에게 일을 떠넘기고 기뻐하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을 번갈아 쳐다보던 르네브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드한 경.”

르네브의 대답에 만족한 듯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럼 가실까요?”

드레스 시착을 핑계로 르네브와 벤더펠트 공작 부인은 곧장 집무실을 나섰다.

황후의 집무실에 드한을 혼자만 남겨 두고서.

‘좀 미안하네.’

바슈케르로 돌아온 뒤로 이카르는 결혼식을 서두르길 원했다.

황실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어서 빨리 후계를 얻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이 부분에선 르네브도 동의했다.

현재 바슈케르 황가는 꽤나 위태로운 상태라 볼 수 있었다.

이카르를 제외한 직계 황족이 하나도 없는 실정이니.

게다가 그녀도 이카르를 꼭 닮은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카엘처럼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를 말이다.

다행히 르네브가 파라디움에 있는 동안에도 벤더펠트 공작 부인은 결혼식 준비를 쉬지 않았고, 그녀 덕에 르네브는 조금 더 수월하게 결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요령을 피우는 방법을 조금 연구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너른 황궁 복도를 걸으며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르네브에게 말했다.

르네브는 작게 웃었다.

“요령이요?”
“어머? 농담이 아니라니까요? 지금은 아직 시녀가 저뿐이라 영애께서 해야 할 일들이 많기는 하지만…….”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제 어려움을 은근슬쩍 토로하며 르네브의 걱정을 덧붙였다.

“부인께서 선별해 주신 목록에서 시녀로 들일 분들을 심사숙고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르네브가 해답을 내놓자, 이번에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시녀를 더 들이시게 되거든 꼭, 지금처럼 일하는 모습을 보이시는 건 삼가시길 바라요.”

“지금처럼이라 하시면?”

“매일매일 소처럼 일하고 계시잖아요.”

약간은 무례할 수도 있는 언사였으나, 벤더펠트 공작 부인 특유의 거침없는 언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머? 웃을 일이 아니래도 그러시네요. 시녀가 괜히 있나요? 황후 폐하의 수많은 일을 대신 부담하기 위해서…….”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시녀를 잘 부려 먹으라며 사견을 덧붙였다.

“……어쨌든! 적당히 열심히 일하는 시늉을 하는 건 정말 중요해요.”

천천히 복도를 걸으며 그녀는 자신만의 논리를 계속 설파했다.

“저는 벤더펠트 공작 가 내에서 제법 신망이 두터운 편이랍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르네브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 비법을 영애께만 살짝 알려 드릴까 하는데…….”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호위 기사에게 눈짓해 보였다.

지금부터 들은 이야기는 함구하라는 뜻이었다.

기사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깐 말이죠…….”

벨더펠트 공작 부인의 비법은 단순했다.

‘적게 일하고, 일하는 동안은 몰입하고 집중할 것.’

그래야 고된 황후의 삶에서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서. 일에만 너무 매진하다 보면 균형이 깨지기 쉽다고.

“무엇보다 황제 폐하께 소홀해지는 것만큼은 경계하셔야 해요.”

이 부분에선 르네브도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과중한 업무에 집중하느라, 아이도 남편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

그때의 르네브는 그게 옳은 길이라 믿고 행했다.

남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파라디움 제국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파라디움 제국을 통치할 제 아이, 카엘을 위해서.

그다지 좋지 못한 결과만 가져왔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조언 감사드립니다.”

“의견이 일치하다니, 저도 기쁘네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만족스럽게 입매를 휘어 웃으며 트왈렛 룸 문을 열었다.

커다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아래 순백의 드레스가 눈에 확 들어왔다.

수십 명의 재봉사들이 오랜 시간을 들여 한 땀 한 땀 만들어 낸 것답게 우아하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풍기는 드레스였다.

“어떠신가요?”

“무척 마음에 드네요.”

“그럼 어서 입어 보시겠어요?”

르네브는 트왈렛 룸 안으로 들어서며 다짐했다.

과거의 실수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이번엔 잘해 보겠다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바슈케르 제국의 황후로서.

***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르네브는 인사를 하러 온 하객들을 맞이했다.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은 제법 훈훈한 바깥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양털 옷을 입고 나타났다.

물론 결혼식을 위해 바슈케르 북부에서 달려온 이들보다는 덜했지만, 살짝 과한 감이 없지는 않았다.

“축하한다, 르네브.”

세이렌 후작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고, 패트릭도 한마디 보탰다.

“행복해라.”

“잘 살게요.”

평화 협정 기간이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갔던 라이나 왕국의 왕녀 레이첼과 베니스탄의 벨케인 소공작도 르네브와 이카르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찾아왔다.

“세상에……! 정말 너무 예뻐요.”

레이첼이 헉, 숨을 들이켜며 호들갑을 떨었고, 이제는 벨케인 공작이 된 그도 거들었다.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우십니다.”

수차례 입술을 달싹이던 벨케인 공작이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레이첼 왕녀, 벨케인 공작. 축하해 주기 위해 직접 바슈케르를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 이제 정말로 황후 폐하 같으시네요.”

제 일처럼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레이첼과 달리 벨케인 공작은 약간 음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직 그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참. 저도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에요. 부디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 주세요.”

“물론이죠. 결혼 축하드립니다.”

레이첼의 말에 르네브는 미소를 머금고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인사를 했으니 이제 식장으로 가겠다며 레이첼이 돌아섰다.

반면 르네브에게 할 말이 있는 건지 벨케인 공작은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서 있었다.

“할 말 있으신가요?”

벨케인 공작이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을 힐끔 보더니 르네브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혹여나 힘든 일이 있거나 하시면 언제든 제게 연락 주십시오. 가령, 새 남편을 구하시게 되거든…….”

그때, 별안간 불쑥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벨케인 공작의 손목을 잡아챘다.

“……?”

르네브는 물론이고 벨케인 공작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남의 아내에게 수작질인가?”

한껏 으르렁거리는 이카르가 무서울 만도 한데 벨케인 공작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잘하십시오. 아내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말입니다.”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빛이 살기등등했다.

자연히 대기실 안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이렇게 좋은 날 주먹다짐을 보고 싶지는 않네요.”

르네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차단했다.

그러고는 이카르의 뒤에 선 드한을 쳐다봤다.

그는 붉은 공단 방석 위에 놓인 티아라를 든 채로 동의한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벨케인 공작이 르네브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기다릴 테니, 저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곤 흰 장갑을 낀 르네브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이카르가 곧장 르네브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기며 벨케인 공작을 노려봤다.

“그럼 저는 이만…….”

벨케인 공작이 유려하게 눈매를 휘어 웃으며 빙글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죽일 듯 노려보던 이카르가 주변 사람들의 허리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검을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대로 오늘은 황궁 기사들 모두가 무장 해제를 하는 날이었다.

“……폐하?”

르네브는 큼큼, 헛기침하고는 이카르의 단단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고는 드한이 들고 서 있는 티아라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곧 식이 시작될 테니, 티아라를 씌워 달라는 뜻이었다.

“때아닌 불청객의 등장에 내가 좀 흥분했군.”

그제야 냉정을 되찾은 이카르가 르네브의 머리 위에 황후의 관을 씌워 주었다.

파라디움에선 대신관이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게 관례였으나, 바슈케르에선 달랐다.

이카르는 신전의 대신관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

황후의 관을 쓴 르네브를 바라보는 이카르의 눈빛이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결혼식 따위는 집어치우고 신방에 들고 싶다는 듯.

“그럼, 가실까요?”

르네브는 홀린 듯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카르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러지.”

이카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손을 잡고 붉은 카펫이 길게 깔린 복도로 나아갔다.

그리고 모두의 축복 속에서 다시 한번 황후가 되었다. 이번에는 파라디움이 아닌, 바슈케르의 황후가.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새 남편 이카르가 함께였다.

폐위된 황후는 새 남편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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