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황제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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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황제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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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황제의 선택
2023.07.30.
황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장 이득을 보는 건 황제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세이렌 후작이 죽으면 그의 군사력을 빼앗을 작정이었으므로.
하지만 세이렌 후작 영애가 의문을 제기한 것처럼 루시우스가 대공의 핏줄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눈빛을 보아하니 독이 오를 대로 오르신 모양이군.”
하지만 황제는 발언에 주의하라 경고하며 세이렌 후작 영애를 향해 고압적인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곤 이마를 짚으며 이만 나가 보라 손짓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치우라는 뜻임을 알아들은 시종장이 세이렌 후작 영애 쪽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말했다.
“낮의 회의로 폐하께서 많이 피로하신 모양입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죠.”
세이렌 후작 영애는 다소 무례한 축객령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황제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러곤 우아하게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황제를 힐끔거리던 황후 또한 그녀를 따라 집무실을 나갔다.
“자네도 나가 보게.”
황제는 곁으로 다가오려는 시종장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예, 폐하.”
집무실에 혼자 남은 황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현 상황을 곱씹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는 알아선 안되는 비밀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황궁의 방식이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를 조용히 해치워 버려?’
하지만 그러기엔 걸리는 게 많았다.
일단 그녀의 정보력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따지자면 바슈케르 황제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바슈케르 황제의 약혼녀가 돌연 파라디움에서 사망했다?
바슈케르의 황제가 제일 먼저 의심할 상대는 기밀문서와 관련된 자들일 것이다.
‘아니지…….’
황제는 미간은 모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 황궁에 찾아와 자신과 황후를 들쑤셔 놓은 것까지 바슈케르 황제의 계략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골치 아프군.”
황제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만약 정말로 이게 그 건방진 황제의 계획이라면? 그것도 모르고 그의 약혼녀를 제거한다면?
파라디움과 바슈케르, 양국 간의 전쟁에 명분을 제공하는 셈이 되어 버린다.
그것도 역사에는 파라디움의 선제공격으로 기록이 남겠지.
물론 전쟁에서 승리한 쪽은 얼마든지 역사를 왜곡할 수 있으니 나중의 일은 차치하더라도, 먼저 전쟁의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되었다.
최근 바슈케르는 무섭게 영토 확장에 나서는 중이었다. 황제는 내심 이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연이은 승전에 한껏 기세가 올랐을 바슈케르와 평화에 길든 파라디움.
정면으로 맞서면 어느 쪽이 우세할지는 불 보듯 빤히 답이 나왔다.
그것도 파라디움의 최고 전력인 세이렌 후작의 암살 계획이 그의 여식에 의해 밝혀진 지금은 더더욱.
이제 와 세이렌 후작이 파라디움 제국의 중요 인물이 되도록 둔 것을 후회하는 대신 황제는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황비의 외도라…….”
대공과 황비에 관한 의문이 대두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황비는 한사코 그런 일은 없었다며 부정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부 들어줬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가지고 싶다 하면 내주었고, 인기 있는 재봉사를 혼자 독점하길 원한다면 그녀의 의상만을 만들도록 황궁 전속 재봉사로 임명했다.
심지어 차기 황제감으로 황후 태생이 아닌, 루시우스를 신중히 고려해 보기까지 했다.
의회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황제는 올라오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며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어깨를 들썩이던 황제의 눈이 돌연 번뜩였다.
“그것 때문이었나…….”
황제 또한 처음부터 황태자로 내정되었던 건 아니었다.
해서 당시 미혼의 영애나 고위 귀족 가에선 그와의 혼약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았다.
이렇듯 그에 대한 관심도가 높지 않았을 무렵부터 그를 제국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대해 주던 이가 바로 황비였다.
그녀는 빼어난 미모만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영애들과도 달랐다. 특히 대외 사교술이 뛰어났고, 여러 방면에서 박학다식했다.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다.
황제는 그런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녀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될 거라 믿었다.
상황이 급속도로 달라지기 전까지는.
제국에 전염병이 돌았다.
황태자에 이어 황위 계승권을 지닌 황자들이 줄줄이 사망했고, 황제는 어부지리로 황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런 오명을 만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가능한 황권을 돈독히 할 가문과 혼인을 추진하셔야 합니다.’
황비와의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귀족들의 의견과 황제의 의견이 갈렸다.
지금이라면 그들의 의견을 싹 무시하고 독불장군처럼 제 뜻을 밀고 나갈 수도 있겠으나, 그때는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말만 황제일 뿐 실제로는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이 다반사였으니…….
그리하여 황제는 파라디움 귀족 중 힘을 가진 가문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해야 했다.
그게 지금의 황후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황비는 결코 황제를 비난하지 않았다.
‘폐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이 또한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격한 황제는 그녀에게 황후 다음가는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황제는 그녀를 황후보다 우위에 두고 아꼈다.
“그랬는데…… 배신을 해?”
루시우스가 제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따금 하기는 했다.
하지만 처음 연애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황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괜한 의심을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랬는데…….’
황제는 까드득,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분노에 휩싸여 결정을 내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하지만 증거까지 나온 이상 그들이 버젓이 나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둘 만큼의 인내심 또한 없었다.
결정은 미루지 않는 게 좋다.
황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의심조차 남기지 않고 명명백백하게 진위를 밝히기로.
“시종장! 밖에 있나?”
황제의 외침에 시종장이 냉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예, 폐하.”
“대공과 황비, 그리고 남부 귀족들을 구금하라.”
황제의 명령에 시종장이 놀란 눈을 하곤 황제를 올려다봤다. 그러나 이내 그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예, 황제 폐하.”
황제의 눈빛에 흔들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황제의 집무실을 벗어나 몇 발자국 떼지 않았을 때 황후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르네브 쪽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너무나 상심이 큰 나머지 폐하께서 조금 예민하게 반응하신 것 같네요.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셨으면 해요.”
르네브는 황후의 처세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진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 또한 높아지는 법이니까.
신분 체계의 최정점에 있을 때야말로 자만하지 않고 굽힐 때는 굽힐 줄 알아야 했다.
회귀 전 1황자와 2황자가 죽고, 황제마저 죽고 난 뒤 사교계는 황비의 손아귀에 좌지우지되었다.
당연하게도 황비는 이전부터 눈엣가시였던 황후부터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황후는 루시우스가 황제로 등극한 후에도 한동안 살아남았다. 황비의 계획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가며.
물론 그 끝까지 좋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직까지 파라디움 황궁에서 르네브를 타국의 황후로 대우하는 건 황후뿐인 듯했다.
“전 괜찮습니다, 충격이 크실 만도 하죠. 믿었던 사람들이 등에 칼을 꽂은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니까요.”
르네브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후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큼큼,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함께 식사하시는 건 어떠세요? 귀한 포도주를 곁들여서 말이에요.”
축배를 들자는 뜻임을 알아들었으나, 아직은 시기상조라 판단했다.
“제안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오늘은 이후 일정이 있습니다. 다음번엔 꼭 함께하고 싶네요.”
르네브는 축배를 드는 건 일이 깔끔하게 잘 마무리된 뒤로 잠시 미루자는 말을 가려서 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저의 고발로 인해 공연히 마음 상하셨을 황제 폐하의 마음을 황후 폐하께서 잘 어루만져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르네브는 황비와의 관계가 틀어진 지금이 기회라는 힌트를 흘렸다.
“물론이죠.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황후가 시종에게 눈짓을 보내며 몸을 돌렸다.
“마차로 모시겠습니다, 영애.”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후와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복도를 걸으며 황제의 심리를 추측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황후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이토록 오래 그녀를 두둔하게 만든 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황제가 모르고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황비는 영악한 사람이었다.
‘황제의 앞에서는 철저하게 사랑하는 연인이란 가면을 유지했겠지.’
진실이야 영영 알 길 없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황제에게 심어 놓은 의심의 싹이 무럭무럭 자라나 황비와 루시우스를 꿀꺽 집어삼키리란 것.
이전 생에서도 황제가 죽고 루시우스가 황제가 된 뒤 황비와 대공이 은밀히 손을 잡은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건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고, 지금은 황제에게 작은 의심의 불씨를 지핀 것만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는 루시우스의 친부가 누구인지 가릴 방법은 없으니까.
마차에 오르기 전 르네브는 파라디움 황궁을 올려다봤다.
그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야.
아이의 아버지에게 이런 의심의 싹을 틔우는 방법은 과거의 황비가 사용했던 것이었다.
카엘이 르네브의 외도로 낳은 아들이며 루시우스의 아이가 아닐 거라는 의심을 하게 만들도록.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얼 믿는지가 중요하지.
‘이걸로 과거의 빚 하나는 갚은 셈인가…….’
르네브는 무감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마차 창 너머의 황궁 전경을 바라봤다.
***
그날 저녁 황후는 술로 고독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는 황제를 찾아갔다.
정부처럼 황제의 비위나 맞추는 것은 그녀의 성격과 맞지 않았지만, 고지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만 잘 해결되면 지긋지긋한 황제도, 황비도 더는 황궁에서 마주칠 일이 없겠지.’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치워 버리고 제 아들은 황제가 되어 제국 제일가는 권력을 손에 넣을 테니까.
“…….”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황후는 절로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애써 단속해야 했다.
“그대는…… 황후가 아니신가? 황후께서 이런 늦은 밤에 나를 다 찾아오다니.”
얼마나 마셨는지 몽롱한 눈을 하고 황제가 그녀를 쳐다봤다.
‘역겨워.’
황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부드럽게 잡아챘다.
“대체 얼마나 드신 거예요…….”
“이제 보니 잔소리를 하러 나를 찾아온 게로군?”
황후는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떼어 냈다.
“그저…… 낮의 일로 마음 상하셨을 폐하께서 어떠신지 들여다보러 온 것뿐이에요.”
“호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황후께서 내 걱정을 하고 말이야.”
그렇게 말했지만, 황제의 입꼬리 끝이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