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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이간질 (120/148)


#120화 이간질
2023.07.29.


해가 완전히 뜨고 난 뒤에야 이카르는 바슈케르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혼자 남겨진 르네브는 테이블 위에 놓인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르네브는 드한에게 추가 사항을 적어 넣은 기밀문서를 2부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1부는 황비에게 전해질 것이고, 다른 1부는 오늘 당장 필요한 것이었다.

“……솜씨가 제법인데.”

르네브는 이카르가 두고 간 기밀문서를 보며 짧게 감탄했다.

그녀가 요구한 추가 사항은 전혀 이질감 없이 원래의 문장 사이에 잘 끼워 넣어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적혀 있던 하나의 문장처럼.

‘그럼 이제 슬슬 외출 준비를 해 볼까.’

밤새 이카르를 상대하느라 잠은 한숨도 못 잤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오히려 이카르가 걱정이었다.

바슈케르로 돌아가는 대로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숨 돌릴 틈이 없을 테니까.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이제 파라디움에서의 일도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는 점일까.

파라디움과 바슈케르를 오가느라 체력을 낭비 중인 이카르를 위해서라도 오늘 일은 아주 중요했다.

“하암…….”

연거푸 터져 나오는 하품을 하며 르네브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

“기다리게 했군요. 이야기가 좀 길어져서 말이에요.”

응접실로 들어서는 황후의 낯이 조금 피로해 보였다.

르네브는 황후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지금 막 도착한 참이에요.”

보편적으로 알현 시간이 끝날 때를 맞춰 찾아온 것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늦어진 모양이었다.

“일단 앉죠.”

황후가 르네브에게 맞은편 소파를 권했다. 르네브가 소파에 앉자 황후의 시녀 크산테 후작 부인이 손수 차를 준비해 주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후가 이내 르네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중요한 전달 사항이란 게 대체 무엇일지 궁금하군요.”

르네브는 제 앞에 찻잔을 놓아 주는 크산테 후작 부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사람을 좀 물려 주시겠어요?”

잠시 시선을 내린 채로 눈을 깜빡이던 황후가 크산테 후작 부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크산테 후작 부인이 시종을 쳐다봤다. 두 사람 다 응접실을 나간 걸 확인한 뒤에야 르네브는 입을 열었다.

“오늘 만남의 이유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황후 폐하께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르네브는 테이블 위에 양피지를 내려놓았다. 황후가 별다른 질문 없이 양피지를 집어 들고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입수한 거죠?”

황후가 슬쩍 입매를 가리며 물었다. 입매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아 문서의 내용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남부 해적 소탕 건은 세이렌 후작의 명성에 비하면 꽤나 하찮은 일이라 판단했습니다.”

사실이었으나, 황제의 명령이었다.

황제의 명령을 하찮다고 표현했음에도 황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르네브는 그만큼 황후와 황제 사이의 골이 깊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상당히 갑작스러웠죠.”

동의한다는 듯 황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황비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하던 황후가 이내 말했다.

“서둘러 내게 이 사실을 전달해 준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이건 제 선에서 해결할 만한 문제가 아닌 듯하네요.”

르네브도 바라는 바였다.

황후의 선에서 일을 처리하기보단 사태가 크게 부풀려지기를 원했으니까.

“모르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살짝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이 말했으나, 황후의 입꼬리 끝이 살짝 씰룩이는 것을 르네브는 놓치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 말씀드리실 건가요?”

“그 외에 이 일을 처리할 마땅한 방법이 또 있을까요?”

르네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황후가 곧장 설렁줄을 당겨 시종을 불렀다.

“부르셨습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를 만나 만나야겠습니다. 가능한, 최대한 빨리. 제국의 중대사라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꾸벅 허리를 숙인 시종이 다급한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

시종장이 다급하게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급히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황제는 대공을 힐끗 쳐다보며 시종장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대화 나누시죠.”

대공이 문 쪽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황제는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다며 대공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대공의 눈치를 살피던 시종장이 황제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황후가?”

“예, 그렇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의무적으로 정한 주에 두 번, 저녁 식사를 하는 것 외엔 자신을 전혀 찾지 않는 황후였다. 그런 그녀가 먼저 자신을 보자고 하다니.

“어지간히도 급한 일이 있나 보군.”

황제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약간의 고민 끝에 대답했다.

“대공과의 대화를 마무리한 뒤에 보겠다고 전하게.”

“예, 폐하.”

황제는 그로부터 한 시간 정도 더 대공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는 내내 황후의 갑작스러운 요청이 신경 쓰였다.

“폐하, 오늘은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공이 물었다.

그도 황제가 다른 곳에 신경을 빼앗겼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지. 내일 다시 이야기하세나.”

“예,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황제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대공이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복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얼마간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리고 황후가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대공과 선약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랬지.”

“말씀은 잘 나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쪽도 워낙에 급한 일이라서요.”

황후가 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대체 무슨 용건이기에?’

황제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황후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 전에 먼저 폐하께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는데 들어오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황제의 한쪽 눈썹이 비죽 솟았다.

‘소개? 급한 일이라더니…….’

황제는 미간은 모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라 하세요.”

황후의 명령에 시종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곧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황제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세이렌 후작의 여식. 아니, 이젠 바슈케르 황제의 약혼녀였다.

황제는 말없이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세이렌 후작 영애를 가만히 쳐다봤다.

세이렌 후작 영애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세이렌의 르네브.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

황제는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어째서 그 건방진 황제의 약혼녀가 황후와 함께 있는지. 자신을 긴히 보자고 했는지 그 이유 같은 것을 추측해 보면서.

하지만 바로 떠오르는 일은 없었다.

황후와 세이렌 후작 영애의 접점이라고 해 봤자 3년 전 황녀 대신 바슈케르로 떠났던 일 외에는 없었으니.

황제는 속으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인사를 받아 주고는 집무실 중앙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대공과의 선약을 무르고 응한 것이니, 대단히 중요한 일이어야만 할 거야.”

황제는 부러 으름장을 놓았다.

초장에 기를 눌러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다.

보통의 귀족은 제국의 황제라는 권위 앞에 고개를 조아리기 바빴으나 세이렌 후작 영애는 태연하기만 했다.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제국의 태양께 알현을 청할 만큼 중한 일이라고 판단되었사옵니다.”

기가 죽기는커녕 어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임을 알아듣고 황제는 속으로만 코웃음을 쳤다.

‘그 황제의 그 약혼녀로군.’

당당하고 거침없는 그녀의 태도가 내심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흥미가 생겼다.

황제는 부러 오만하게 턱을 들고는 느릿하게 말했다.

“그래. 대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이리 무도하게 나를 보자고 했는지 들어는 봐야겠군.”

조금 전부터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황후가 대뜸 양피지를 내밀었다.

“폐하, 이걸 먼저 보시고 말씀 나누시죠.”

황제는 황후가 건넨 양피지를 찬찬히 읽어 보았다. 황제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미간 또한 깊게 팼다.

종내에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면…….’

황제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게 어떤 연유로 세이렌 후작 영애의 손에 넘어갔는지는 둘째 치고, 문서의 내용은 상당히 신빙성 있었다.

피치 못할 사고로 위장해 세이렌 후작을 암살하려던 계획은 극소수의 최측근만이 알고 있었고.

때문에 황제는 문서 내용이 사실무근이며 허무맹랑하다고 일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이렌 후작이 죽은 뒤의 계획이 문제였다.

문서에 정확한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해서 해석하기 나름이긴 하겠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세이렌 후작의 군사력을 흡수한 뒤 루시우스를 황제로 추존하자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

황제는 급격히 밀려드는 황비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최대한 초연한 척 입을 열었다.

“먼저 이 문서를 입수한 경로에 대해 들어야 봐야겠군. 그래야 누군가를 모함할 의도로 만들어진 가짜 문서인지 아니면 참인지 판가름할 수 있을 테니.”

황제는 노기등등한 시선으로 세이렌 후작 영애를 노려봤다.

“황제 폐하께서는 일말의 의심조차 해 본 적이 없으신가요?”

“……무엇을?”

“루시우스 황자 전하의 핏줄에 관해서입니다.”

세이렌 후작 영애의 발언에 황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황비의 외도를 거론하며 그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려던 작자가 과거에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황제는 꽤나 과격한 처벌을 내림으로써 그 소문을 일축했다.

“그 자그마한 입으로 잘도 떠드는군.”

황제는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세이렌 후작 영애를 빤히 응시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대지의 푸르름과 같은 녹안을 가지고 계시죠. 그에 반해 루시우스 황자 전하의 눈은 바다와 같은 파란색입니다.”

“근거는 그게 전부인가?”

황비와 자신 사이를 이간질하는 근거가 매우 하잖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세이렌 후작 영애가 집무실 문 쪽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대공 전하의 눈도 파란색이었던 것 같네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요.”

대공의 눈이 무슨 색인지 정도는 황제도 알았다. 조금 전까지 그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참이니.

황제가 어찌 대처해야 할지 짧게 망설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세이렌 후작 영애가 덧붙였다.

“황제 폐하께서 방금 보셨던 문서는 남부 귀족 중 한 사람과 황비 전하께서 주고받던 것입니다.”

“…….”

“대공과 남부 귀족들 사이가 꽤나 친밀하다는 사실 또한 폐하께서도 모르지 않으실 터…….”

잠시 말을 멈추고 황제를 바라보던 세이렌 후작 영애가 이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세이렌 후작이 함정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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