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적의 적은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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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적의 적은 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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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적의 적은 동지
2023.07.15.
빠른 걸음으로 시종과 멀어진 앰버는 힐끔 뒤를 돌았다.
다행히 시종은 이미 이쪽에 관심을 뗀 듯 기사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좋아.’
앰버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곧장 주머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황궁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 르네브는 앰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황궁에 가거든 몇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거야. 그때 움직여 줘.’
앰버는 주머니에 가득 채운 금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지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외지인이었음에도 바슈케르 황궁에서 비교적 빨리 고용인들 사이에 녹아들었던 그녀였다.
그녀 특유의 사람에 대한 친화력에 더해 두둑한 금화까지 있다?
매수하지 못할 고용인이란 없을 터였다.
***
식사를 마친 황비가 식기를 내려놓자 곁에 있던 시종이 그녀에게 냅킨을 건넸다.
받아 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황비가 물었다.
“세이렌 후작의 여식은 어찌하고 있다던가?”
“얌전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황비가 말했다.
“식후 차를 내오게.”
“예, 황비 전하.”
황비의 말이 떨어지자 기다리고 있던 고용인들이 말끔히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달콤한 디저트와 곁들일 차를 한가로이 즐긴 황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로 가시겠습니까?”
앤드니 백작 부인의 물음에 황비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야지. 곧 해도 떨어질 텐데. 그래도 명색이 후작 가의 아가씨이니 너무 늦은 귀가는 조금 곤란하지 않겠어?”
“맞습니다.”
동의한다는 듯 앤드니 백작 부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침부터 세이렌 후작 가를 찾아가 입궁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몇 시간 째 기다리게 한 것치고는 뻔뻔한 말이었지만, 앤드니 백작 부인은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이제 오십니까. 황비 전하.”
조금 피로한 낯을 하고 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황비를 보고는 밝게 말했다.
“오늘 안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워낙 많다 보니…… 다소 늦어졌네.”
황비의 너스레에 시종이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닙니다. 황궁의 안정보다 중요한 게 있겠습니까.”
황궁의 안정이란 무릇 황후의 몫이었다.
하지만 황비 본인은 물론이고, 시종 또한 황궁의 안정에 크게 기여한 것은 황비인 것처럼 대화를 나눴다.
황비의 아들 루시우스 황자가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드시죠. 황비 전하.”
기사가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자 시종이 안쪽으로 정중하게 손짓했다.
“조금 더 수고해 줘요.”
황비는 그렇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은 다소 어두웠다.
내부를 밝힐 것이라고는 반쯤 드리워진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이 전부였지만, 황비는 익숙하게 중앙 테이블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세이렌 후작의 여식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흐음…….’
황비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벌써 몇 시간 째,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을 터.
감금 아닌 감금이 되어 있던 사람이라 치기엔 세이렌 후작의 여식은 너무나 멀쩡했다.
‘시종을 매수한 건가?’
황비는 슬쩍 문가에 선 시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시종이 건치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아니지, 저런 반푼이에게 그런 융통성이 있을 리가 없지.’
황비는 속으로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석에서 따로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세이렌 후작 영애.”
그제야 세이렌 후작 영애가 황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오늘 영애를 황궁으로 부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황비는 천천히 말을 내뱉으며 그녀를 탐색하듯 훑어 내렸다.
나이가 어린 영애들은 쉬이 발끈하는 경향이 있었다.
해서 가문에서 귀하게 자란 그녀들은 이런 수모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몇 시간 동안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가둬 두다시피 하면 대번에 눈물을 쏟거나,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하지만 세이렌 후작 영애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깊은 눈으로 황비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게 더욱 황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화를 내거나, 불평을 쏟아 내거나, 울거나.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상대는 제압하기 쉬웠으니까.
“……먼저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해 주고 싶었답니다.”
“그러셨군요. 친히 황궁까지 불러 축하 인사를 건네실 거라곤 미처 예상 못 했네요. 감사합니다.”
세이렌 후작 영애가 옅게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딘지 여유로워 보이는 그 태도가 황비의 신경 줄을 긁었다.
“그건 그렇고, 얼마 전에 루시우스 황자 전하와 만나신 모양이더군요.”
“황자 전하께서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게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아, 발뺌하시겠다?
꼬투리를 잡았다 생각한 황비의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파라디움의 사교계는 상당히 보수적인 편이었다.
약혼자가 있는 미혼의 영애가 늦은 밤 남자와 단둘이 있었다는 소문이 퍼져서 좋을 게 없었다.
“이 일이 영애 약혼자의 귀에 들어가도 될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따로 말씀드린 적이 없으니 폐하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시긴 할 겁니다. 하지만…….”
“흐응…….”
“먼저 황비 전하의 오해를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루시우스 황자 전하와 저는 만남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황비의 한쪽 눈썹이 비죽 올라갔다.
‘역시 발뺌하려는 모양이네.’
그렇다면 루시우스와의 만남이 그녀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르네브 또한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비는 약점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두 분이 함께 있던 모습을 본 증인들이 제법 될 텐데요?”
“황비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루시우스 황자 전하께서는 주인의 동의 없이 저택에 들어오셨죠.”
“…….”
“그로 인해 저희 가문의 고용인이 크게 다치는 불상사도 있었답니다. 이는 가택 침입이라 봐도 무방하겠군요.”
이어진 그녀의 발언에 황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
“일개 귀족 저택의 출입을 허락받고 말고 할 만한 그런 신분이 아니십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대제국 파라디움의 적법한 황가의 핏줄이시라고요. 아시겠어요?”
황비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섞여 들었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빠르게 황비와 세이렌 후작 영애를 번갈아 쳐다봤다.
잔뜩 흥분한 채로 언성을 높이는 황비와 침착하게 제 할 말을 하는 세이렌 후작 영애.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의 주도권을 지닌 쪽은 명백히 세이렌 후작 영애였다.
황비는 감정의 고저가 큰 편이긴 해도 멍청하지는 않았다. 되레 여우처럼 사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오직 황후만이 그녀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의문을 품었다.
3년 전에도 앤드니 백작 부인은 세이렌 후작 영애를 고평가했다. 조용하면서도 제법 내면이 단단한 편이라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세이렌 후작 영애는 훨씬 더 성장해 있었고, 그때와도 다른 사람 같았다.
‘대체 무엇이 세이렌 후작 영애를 이토록 변하게 만든 거지?’
앤드니 백작 부인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황비가 미간을 모은 채로 앤드니 백작 부인을 쳐다봤다.
‘분명 사람을 들이지 말라 단단히 일러두었건만…….’
앤드니 백작 부인은 황비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말했다.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곧장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시종에게 제대로 주의를 시키려던 앤드니 백작 부인은 문 앞에 선 이를 보고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화, 황후 폐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세이렌 후작 영애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약속 시각을 훌쩍 넘기고도 영 나타나지를 않더군요.”
“…….”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후작 저에 사람을 보내 확인을 해봤더니 영애는 한참 전에 황궁으로 떠났다고 하지 뭔가요.”
“…….”
“걱정되는 마음에 뒤늦게 행적을 추적했는데…… 영애와 선약을 한 사람이 있더군요.”
그게 황비라는 소리였다.
앤드니 백작 부인은 입안 여린 살을 깨물었다.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은데…….’
이렇게 되면 황비가 일부러 세이렌 후작 영애를 붙잡아 둠으로써 황후를 바람맞힌 꼴이 된다.
“그래서 말인데, 안을 한번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황후가 근엄한 표정으로 앤드니 백작 부인에게 명령했다.
‘이를 어쩌면 좋지…….’
앤드니 백작 부인은 이후 벌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빠르게 셈해 보았다.
이대로 황후를 안으로 들이게 되면 이다음에 내놓을 변명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황비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앤드니 백작 부인 그녀 본인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황후를 막아설 수도 없었다.
황비가 제 신분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건 제국 사람 다 알지만, 그녀조차 어쩌지 못하는 게 황후였으니까.
‘하아…….’
난감해하며 응접실 안을 힐끔 돌아본 앤드니 백작 부인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황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황후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조용히 황후의 뒤편에 서 있던 황후의 시녀 크산테 후작 부인이 호통쳤다.
“비켜 서세요! 앤드니 백작 부인. 감히 황후 폐하의 앞을 막아설 셈입니까?”
앤드니 백작 부인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비켜섰다.
황후는 앤드니 백작 부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성큼 응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종일 찾아다녔는데…… 여기에 계셨군요. 세이렌 후작 영애.”
자신의 허락도 없이 응접실로 사람을 들인 게 영 못마땅한 얼굴로 입구를 쏘아보던 황비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황후 폐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지난 3년간 못 나눈 대화를 나누시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했으면 좋겠군요. 황비.”
황후가 근엄한 표정으로 설교하자, 황비의 한쪽 눈매가 씰룩였다. 그러나 황비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단속하며 내뱉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밖을 보세요. 벌써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황비가 창문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황후는 그녀에게 발언권도 주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세이렌 후작 영애와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해 두었는데 애써 준비한 식사가 다 식어 버렸지 뭔가요?”
“황후 폐하. 제 불찰입니다. 예상보다 황비 전하와의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송구합니다.”
그러자 세이렌 후작 영애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그녀에게 시선을 뗀 황후가 황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나눌 대화가 많았던 모양인가 보죠?”
“오, 오늘 세이렌 후작 영애와 약속이 있으셨나 봅니다?”
“황비는 진정 모르고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