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네가 후회를 시작했을 때 (105/148)


#105화 네가 후회를 시작했을 때
2023.07.14.


“…….”

루시우스가 대답 없는 르네브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내게 차가워진 것은?”

“아뇨.”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럼?”

자신이 이런 남자를 사랑했다는 걸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저는 황자 전하께 마음이 있었습니다.”

“……있었다?”

르네브는 무감한 눈으로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이 없어졌어요.”

루시우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어째서?”

르네브는 회귀 전의 황제 루시우스와 지금 눈앞에 있는 황자 루시우스를 겹쳐 봤다.

그때의 루시우스와 지금의 루시우스는 나이, 인품, 경험 여러 면에서 달랐다.

아니, 그냥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것도 있었다.

과거에도 지금도 루시우스는 그저 르네브를 사용하기 편리한 체스 말쯤으로 여겼고, 여긴다는 것.

“르네브. 과거의 나는 몰랐던 게 많았어. 그래서 너를 지켜 주지 못했지. 하지만 지금은 알아. 그러니 이제는 너를 지켜 줄 수 있어.”

“누구로부터요? 대체 누구에게서 저를 지키신다는 말씀이신지요? 황비 전하로부터요? 아니면…….”

“그래. 네가 바슈케르로 떠나고 3년간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어.”

루시우스가 주절주절 그간 있었던 일들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르네브는 그와의 대화가 지루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3년간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얼마나 성장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것과 파라디움의 주요 귀족들과 인맥을 돈독히 쌓고 있다는 둥…….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르네브는 흐린 눈을 하고 루시우스의 말을 흘려 넘겼다.

그러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루시우스의 변명을 더는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황자 전하.”

황후 르네브는 황제 루시우스의 말을 단 한 번도 끊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의 말에 귀 기울였고, 지나가듯 흘리는 말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

놀랐는지 루시우스가 말을 멈춘 채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너무 내 이야기가 길었나 보군.”

루시우스가 머쓱해하며 르네브의 눈치를 살폈다. 르네브는 그런 그의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게요.”

“어? 어…….”

루시우스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지금 긴장한 건가?’

코웃음이 날 것 같았다.

‘내 앞에서 긴장하며 눈치를 보다니.’

여태껏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리고 이는 르네브가 언제나 루시우스 앞에서 보였던 반응과 닮아 있었다.

루시우스의 기분이 어떤지 살피고, 그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과 똑같이 저자세로 나오는 루시우스의 모습에 우월감이 들기는커녕 그저 그가 조금 하찮게 느껴졌다.

‘언제나 루시우스는 나를 이런 눈으로 바라본 걸까?’

그리 생각하자 입안이 떫었다.

“저는 황자 전하께 아무런 마음이 없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루시우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르네브. 내가 말했잖아. 황비 전하의 일로 그런 거라면…….”

“아뇨, 황비 전하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저 더 이상 제가 황자 전하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니까요.”

“……뭐?”

“그리고 저는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르네브는 그 말을 끝으로 남은 찻잔을 비워 냈다.

“대화는 오늘로 끝이었으면 해요. 저의 약혼자이신 황제 폐하께선 꽤 소유욕이 강한 분이시라…….”

르네브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눈치 빠른 루시우스라면 이것이 축객령이라는 뜻을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가 지난번처럼 제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분개하며 달려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르네브는 잔뜩 몸을 긴장시킨 채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

루시우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래. 시간이 늦었군.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순순히 돌아서는 루시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르네브는 미간을 모았다.

***

침실로 돌아온 루시우스는 소파에 앉아 잠시 멍하니 있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황궁까지 돌아온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저는 황자 전하께 아무런 마음이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던 르네브의 매몰찬 목소리가 귓가에 왱왱 맴돌았다. 그리고 곧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음성이 메아리쳤다.

‘저는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지?”

르네브를 믿었다.

그녀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어떠한 이유로 잠시 자신을 멀리했다 하더라도 결국 르네브가 제게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런 마음이 없다니…….

“이게…… 말이 돼?”

루시우스는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현실을 받아들기가 어려웠다.

그러면 자신이 너무 비참했으니까.

“…….”

한참 소파에 앉아 멍하니 바닥의 러그만 바라보던 루시우스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와인 진열장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망설임 없이 코르크를 뽑아 낸 루시우스는 병째로 독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화, 황자 전하……!”

한참이나 숨죽이고 곁에 있던 시종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루시우스가 시종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 있었군.”

“예, 계속 황자 전하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래그래…….”

시종이 채 말리기도 전에 루시우스가 벌컥벌컥 독주를 들이켰다.

입가에 묻은 액체를 쓱 닦으며 루시우스가 시종을 쳐다봤다.

“그대는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벌써 취기가 돌기 시작했는지 그의 눈은 살짝 맛이 간 듯 풀려 있었다.

“…….”

시종은 차마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언제부터인가 황자는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전에 없던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종은 냉큼 그 사실을 황비에게 알렸었다.

황비도 루시우스의 관심이 조금 과하다고 판단했는지 서둘러 황자의 눈을 돌리려 했다.

가령, 아름다운 다른 이성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다행히 황자는 데뷔탕트에서 만난 크로프트 남작 영애에게 매료된 것 같았다.

그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린 것에 안심한 것도 잠시였다.

특정한 누군가를 지속해서 곁에 두지 않던 황자가 이번에는 크로프트 남작 영애를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이 깊어지기 전에 황비는 두 사람을 떼어 놓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세이렌 후작 영애조차 완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 하던 황비의 눈에 하급 귀족 가의 여식 따위가 들어올 리 없었다.

크로프트 남작 영애의 처리가 끝나기도 전에 이 사달이 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만.

“거기 그러고 서 있지 말고, 그만 나가 봐도 좋아.”

멀찍이 서 있는 시종에게 루시우스가 짧게 명령했다.

위태로워 보이는 황자를 혼자 두고 나가는 것이 못내 걱정되었지만, 시종은 꾸벅 허리를 숙이곤 침실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제 선에선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에, 시종은 침실을 나가는 대로 곧장 황비를 찾아갔다.

***

“저 아가씨. 황궁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르네브는 깃펜을 내려놓고 집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급히 입궁하라는 말만 하곤 떠나 버려서 이유는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 바로 입궁하라고만 하던가?”

“예, 가능한 한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습니다.”

당일에 입궁 소식을 알려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매우 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고선.

르네브는 옅게 한숨을 내쉬곤 몸을 일으켰다.

“바슈케르 황제 폐하와의 약혼 문제를 추궁하려는 걸까요?”

앰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글쎄……. 일단 직접 황궁에 가 보면 알겠지.”

황궁으로 가기 위한 외출 준비를 하기 전 르네브는 책상 위에 양피지를 펼쳐 놓았다.

“아가씨, 뭐 하시는 거예요?”

앰버가 흥미로운 눈을 하고 물었다.

“급히 입궁해야 하긴 하지만…… 어쨌든 황궁에 갈 일은 많지 않잖아. 그러니 이 기회를 잘 살려야지.”

잠시 르네브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앰버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저는 아가씨가 바로 떠나실 수 있도록 외출 준비를 해 둘게요.”

앰버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준 르네브는 빠르게 깃펜을 놀렸다. 얼마간 바쁘게 오가던 앰버가 다가와 물었다.

“혹시 지도를 그리고 계신 건가요?”

“맞아. 일단 설명은 가면서 할 테니, 외출 준비를 서둘러 줘.”

***

“여기서 잠시 대기해 주십시오.”

시종은 그 말만 하고 응접실을 나갔고, 30분이 지나도록 르네브와 만남을 청했다는 상대는 나타나질 않았다.

하지만 르네브는 누가 자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는지 이미 눈치챘다.

태도가 무례했기에 대충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황비인 모양이었다.

먹을 것은 고사하고, 차 한 잔이나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상황에서 몇 시간이나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는 것.

이 또한 회귀 전에 겪어 본 바 있었다.

기다림에 지친 르네브가 그냥 발길을 돌리기라도 하면, 황비는 자신을 무시했다며 루시우스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 르네브는 난데없는 황비의 부름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법을 터득했다.

“앰버.”

그녀가 시선을 주자 앰버가 들고 있던 큼지막한 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네, 아가씨.”

르네브는 그 속에서 양피지를 하나 꺼내 앰버에게 건넸다.

양피지를 받아 품에 잘 숨긴 앰버가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 이제 밖에 나갔다 올까요?”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앰버가 문을 향해 크게 외쳤다.

밖에서 르네브를 감시하고 있는 시종 들으라는 듯이.

“계속 앉아만 있었더니 너무 답답해서요. 이럴 시간에 황궁을 돌아다니면서 뭐라도 알아보는 게 아가씨께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안 될까요?”

이곳에 붙잡아 두고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게 하는 건 르네브 한정이었다.

그러니 함께 따라온 앰버까지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황비가 앰버에게까지 관심을 둘 리도 없고.

“그렇게 해.”

“네, 다녀올게요.”

앰버가 응접실 문을 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물었다.

“어딜 가려는 거냐?”

“화장실을 다녀오려고요.”

“화장실이라면 안쪽에 있다.”

“어떻게 그래요. 하녀 된 신분으로 아가씨와 같은 곳에서 용변을 볼 수는 없죠.”

빤히 앰버를 응시하던 시종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하급 귀족 가의 차남으로 특히 신분에 따른 차별을 즐겼다.

그러나 황궁이 어떤 곳인가?

황족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이 드나드는 드는 곳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황궁 고용인 중 평민만을 골라 괴롭히기로 유명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하다고 확인을 받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하녀 따위가 귀족인 르네브와 같은 곳에서 볼일을 볼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는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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