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아주 긴 꿈
(100/148)
100화 아주 긴 꿈
(100/148)
#100화 아주 긴 꿈
2023.07.09.
마차가 출발하고도 르네브와 이카르,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
“…….”
항상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특히 오늘의 르네브에게는 더욱 눈길이 갔다.
하지만 이카르는 르네브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평소와 다르게 꾸민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 마저 들었다. 배로 긴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치솟은 열기 또한 쉽사리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의 평화…….’
이카르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럼에도 자제가 되지 않아 곤란하던 차에 르네브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 폐하.”
이카르는 르네브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뭐지?”
“많이 힘드시면…… 제가 도와 드릴까요?”
뭐, 도와줘?
이카르의 잇새로 헛웃음이 터졌다.
“하…….”
괴로워하는 자신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하면, 냉큼 좋다고, 그렇게 하자며 기뻐할 줄 알았나?
“영애, 지금 영애가 하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 줄은, 알고나 있는 거겠지?”
이카르는 반듯한 미간을 좁히며 으르렁거렸다. 르네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많이, 힘들어 보이셔서…….”
이카르는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자그마한 머리통으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안을 열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자신 있으면 어디 해…… 보든가.’
이카르는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꾹 내리눌렀다.
그녀는 안간힘을 써 가며 자신을 통제 중인 이카르의 고충을 제대로 모르는 게 틀림없었다.
‘손장난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 분명 그녀에게 더한 걸 요구하게 될걸?’
이카르의 머릿속에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작은 이카르가 말했다. 그러자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또 다른 작은 이카르가 끼어들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영애에게 내맡겨 버려. 지금 참기 힘들잖아. 그렇지?’
이카르의 본능과 이성이 다투기 시작했다.
그런 속내도 모르고 르네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괜찮으세요?”
이카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르네브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살짝 치켜뜬 눈매가 앙칼진 고양이처럼 도도해 보이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뺨에만 살짝 오른 홍조와 붉은 입술은 몹시 탐스러워 보였다.
결국, 참고 참았음에도 이카르의 인내심의 끈이 뚝! 하고 끊어졌다.
***
르네브는 마차 창을 열어 열기가 가득한 내부를 환기했다.
번화가에 들어서면서 빠르게 내달리던 마차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녀는 창 너머 세상을 바라봤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게 움직였다.
그중 어떤 이는 르네브가 탄 마차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고, 또 어떤 이는 마차 속에 있는 귀한 분과 혹여나 눈이 마주칠까 주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차가 광장으로 접어드는 순간.
“……!”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패트릭에 이어 제 목이 떨어졌던 그곳. 마차가 그곳과 가까워지자 꾹꾹 눌러 놓았던 분노와 설움 같은 복합적인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죽기 직전의 기억이 짧은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 재생되었다.
‘생각하지 마…….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야.’
르네브는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듯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그날의 일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3년간 그때를 떠올리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한 게 우습게도.
그날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과 자기 파괴적인 생각들이 르네브를 좀먹어 갔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지금껏 애써 묻어 두었다.
복수의 기회가 주어지기 전까지 무너져 내려서는 안 되니까.
그걸 잘 아는데도 손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르네브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
그때 꽉 그러쥔 르네브의 주먹 위로 커다랗고 따뜻한 이카르의 손이 포개어졌다.
이카르가 떨리는 르네브의 손을 감쌌다.
“추운가 보군.”
그렇게 말하며 이카르가 르네브를 제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카르의 표정은 무감했으나, 눈빛은 따뜻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르네브를 향한 염려가 묻어났다.
“……춥지는 않아요.”
“나는 좀 춥군.”
그는 르네브를 곰 인형처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카르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까?’
르네브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당장 속에 있는 말들을 전부 토해 내 버리면 아주 잠깐은 기분이 개운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감정들은 르네브가 해결해야 하는 숙제와도 같았다.
누군가에게 전가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그 감정을 받은 사람의 안에 쌓이기 마련이니까.
그동안 잘 버텨 온 만큼 올라온 감정을 다스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에 르네브는 이카르의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채로 호흡에 집중했다.
“…….”
말없이 품에 안고 등을 쓸어 주는 이카르의 다정함에 격앙되어 있던 감정이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목이 떨어졌던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한없이 평화롭고 활기찬 번화가.
그곳을 지나쳐 어느새 창밖의 풍경은 다른 곳을 보여 주고 있었고, 르네브는 이내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쉬는 호흡도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영애, 설마 자는 건 아니겠지?”
부드럽게 르네브의 등허리를 어루만지며 이카르가 물었다.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은 이카르의 목소리에 르네브는 왜인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잠시 흐려졌던 이성을 되찾은 르네브는 천천히 입을 뗐다.
지금이라면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예전에 제가 폐하께 했던 약속 기억하세요?”
“영애의 비밀 말인가?”
“네. 폐하께서 부상을 이겨 내고 눈을 뜨면 제 비밀을 알려 드린다고 했었죠.”
“그랬지.”
르네브는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아주 긴 꿈을 꾼 적이 있어요.”
“꿈?”
르네브가 겪은 일을 이야기하거든 누군가는 허무맹랑하다며 매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에겐 믿음이 있었다.
이카르만큼은 그녀의 이야기를 그저 웃어넘기지 않을 거라는.
“네. 너무나도 생생해서 현실 같은 꿈이었어요…….”
이카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어지는 르네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덕분에 르네브는 회귀 전의 일들을 담담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 꿈속에서 자신은 파라디움의 황후였고, 제 남편은 황제였다고.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은 결혼 후 몇 년 동안이나 아이를 낳을 수 없었고, 겨우 잉태한 아이의 생명은 배 속에서 꺼져 버렸다고.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후계를 낳아 줄 정부를 들였고,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전장에서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마지막엔 코앞에서 어렵게 낳아 애지중지 기른 아이를 빼앗기고, 눈앞에서 가족의 목이 떨어졌으며 자신도 죽었다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여전히 치가 떨렸다.
하지만 르네브는 이카르 앞에서 제법 담담하게, 마치 남의 이야기인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었다.
“……너무 열을 낸 것 같네요. 제 꿈 이야기가 지루하셨죠?”
르네브의 비밀을 전부 듣고 난 이카르는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주 길고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그러니 빨리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대신 이카르는 르네브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영애는 어떻게 하고 싶지? 꿈속에 등장했던 인물들에게.”
르네브는 농담처럼 말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저는 복수가 하고 싶은 게 아닐까요?”
르네브는 현실로 겪은 일들이었지만, 이카르에겐 꿈이라고 이야기했다.
‘꿈속의 인물들에게 당하고, 현실에서 복수라니.’
제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이카르는 이를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영애가 원한다면 나도 그 복수에 끼고 싶군.”
이카르는 미동도 하지 않고, 르네브의 눈만 지그시 바라봤다. 네가 그렇게 하길 바란다면 너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는 듯이.
르네브는 제 가족과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고,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회귀 전과 다른 미래를 위해 도피하듯 3년간 바슈케르로 떠나 있는 동안에도 그러한 생각은 여전했다.
평화 협정이 종료된 지금 르네브는 자유였다. 전처럼 바슈케르에 묶인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굳이 오늘, 파라디움 황궁으로 향하는 길에 이카르에게 꿈 이야기를 꺼낸 건 앞으로 있을 변화 때문이었다.
이카르에게 회귀 전의 일을 꺼내 버린 이상 돌이킬 수도 없었고.
“…….”
르네브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이카르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으로도 원하는 게 있을 땐 그렇게 말 한마디만 하면 돼.”
이카르가 르네브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가 유독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
마차에서 내린 르네브는 잠시 파라디움 황궁을 바라봤다.
한눈에는 전체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은 건물 외관과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올린 첨탑은 파라디움의 번영과 영광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근 3년 만의 재방문이 되겠군. 다시 돌아온 감상은?”
그렇게 물으며 이카르가 절도 있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르네브는 단단한 그의 팔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낯설어요.”
이카르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어떤 면에서? 꿈속에서의 영애는 줄곧 이곳에서 살았을 텐데?”
파라디움의 황궁은 3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아니, 회귀 전과도 크게 달라진 곳은 없는 것 같았으나, 눈에 익지 않았다.
“꿈속에선 언제나 안에서 밖을 내려다봤거든요.”
회귀 전엔 지금처럼 밖에서 황궁을 올려다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10년을 훌쩍 넘게 살았던 이곳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카르가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세웠다.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이카르의 비유가 너무나 적절했다.
르네브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누구도 가두지 않았거늘 스스로 새장에 갇힌 꼴이었지만.
“맞아요.”
새장 안이 황궁이라면 르네브는 이번 생에도 새장 안에 갇혀 지내는 길을 택했다.
이카르는 황제였고, 그와 결혼한다는 건 그런 의미를 내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영애가 뛰어놀기엔 새장 안이 터무니없이 좁았던 모양이군.”
이카르가 중얼거리듯 내뱉었고, 르네브는 생경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파라디움 황궁은 여러 제국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에 속했다.
그런데 좁다니?
“파라디움의 황후와 바슈케르의 황후 사이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지.”
“그게 뭔가요?”
이카르가 르네브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일단 바슈케르에는 파라디움엔 없는 이동 마법이란 게 있지. 그러니 새장 안이 그대에게 비좁다고 느낀다면 어디든 데려가 달라고 조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사실 회귀 전에도 황궁 안이 비좁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드넓은 황궁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었을 뿐.
하지만 르네브는 굳이 그런 말을 덧붙이는 대신 옅게 웃어 보였다.
우울감과 패배감에 찌들어 있던 제 과거의 모습이 싫었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든든한 벽처럼 자신을 지탱해 주는 이카르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네,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언제든 말씀드릴 테니 꼭 데려가 주세요.”
르네브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이카르가 시원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