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상당히 곤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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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상당히 곤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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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상당히 곤란해
2023.07.08.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홍차를 후, 불었다. 유백색 찻잔에 담긴 붉은 홍차 물이 포물선을 덧그리며 찰랑거렸다.
“반응이 아주 뜨거운 모양이에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곤 말했다.
“다행이네요.”
르네브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고는 홍차에 꿀을 한 스푼 넣고 휘휘 저었다.
“영애께서 철저히 준비하시는 걸 보고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기대 이상의 성과라 내심 많이 놀랐답니다.”
최근 파라디움에선 라이나와 베니스탄에서 생산되는 물건 수요가 대폭 증가했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울 지경이라, 물건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생산량에는 변함이 없고, 물건값만 오른 셈이니 라이나와 베니스탄에는 이득이었다.
그로 인한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는 건 비단 라이나와 베니스탄만은 아니었다.
르네브는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려 바슈케르에서는 비교적 구하기 쉽지만, 파라디움에서는 구하기 어렵고 값비싸게 팔리는 물건들을 찾아냈다.
그중 가장 경쟁력 있는 건 단연코 향신료였다.
향신료는 식물의 열매나 씨앗, 꽃, 뿌리 등에서 얻을 수 있었는데 주로 동대륙에서 구할 수 있었다.
파라디움에서 동대륙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파라디움 서부를 거쳐 바슈케르를 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라디움의 서부는 바슈케르에 막혀 있는 것과 같았기에 향신료를 구하려면 여러 나라를 거치거나, 서부와 남부로 우회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운송이 어렵다 보니 당연하지만, 가격이 높았다.
르네브는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파라디움의 서부를 통해 향신료를 들여보내고 가격을 기존보다 저렴하게 공급한 것이다.
“운이 좋았죠.”
르네브는 티스푼을 받침대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겸손하시네요. 그럼 영애께서는 파라디움의 향신료 시장을 독점하시려는 계획인가요?”
눈치 빠른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런 식으로 몇 달을 더 지내면 실상 파라디움에 공급되는 향신료는 바슈케르를 위시한 르네브가 독점할 가능성이 컸다.
르네브는 찻잔에 담긴 붉은 찻물로 시선을 내리깐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저 제 가족을 지키려 한 것뿐이에요.”
얼마 전 그녀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세이렌 후작에게 곧 남부로 출정 명령이 내려질 거예요. 평소 타인의 도움받기를 꺼리는 남부 귀족의 특성을 놓고 봤을 때 어딘지 석연찮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으나, 르네브는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지 금방 눈치챘다.
「추신, 이것으로 가족의 목숨 빚은 갚은 것으로 하죠.」
작게 N이라고 이니셜이 적혀 있었기 때문에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파라디움의 황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세이렌 후작이 남부로 출정할 거란 건 후작이 보내온 편지로 이미 알고 있었기에 놀라울 것은 없었다.
황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다.
이건 무언가 함정이 있을 거라고 언질을 주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세이렌 후작의 출정 소식을 듣자마자 이카르도 파라디움의 서부로 믿음직한 수하를 보내 상황 파악에 나섰다.
회귀 전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당장은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질 않았다.
해서 르네브는 회귀 전과는 다르게 행동하기로 했다.
바로 제국과 황제에 충성하지만, 정치 쪽으로는 전혀 관심이 없던 세이렌 후작 가를 바꿔 보기로.
그것도 파라디움의 귀족들이 아닌, 이제 연합국에 속할 라이나와 베니스탄의 귀족들과 친분을 쌓도록 해서.
“가족보다 소중한 건 없으니까요. 폐하께서도 이 일을 예의 주시하고 계시니, 세이렌 후작께서도 안전하게 돌아오실 거예요.”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이해한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르네브를 위로했다.
“고마워요. 귀부인.”
벽난로 안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불을 잠시 응시하던 르네브는 이내 따끈한 홍차로 속을 데웠다.
따뜻한 찻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배 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곧 파라디움의 건국제에 다녀오시겠네요?”
“다녀오는데 며칠이면 되겠지만, 저 없는 동안 잘 부탁드릴게요.”
“염려 놓으시고, 여유 있게 다녀오세요.”
“선물, 사 올게요.”
르네브가 던진 말 한마디에 벤더펠트 공작 부인이 뭉클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가 없는 르네브에게 벤더펠트 공작 부인은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 주고 있었다.
세이렌 후작 가의 상황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만큼이나.
그런 그녀를 르네브의 곁에 두려 한 이카르의 사려 깊은 배려를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에도 르네브의 사고는 자연히 이카르에게 흘렀다.
결혼 준비 이야기로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르네브는 어느새 빈 찻잔을 보고 말했다.
“그럼, 이제 남은 업무를 해 볼까요?”
***
파라디움 건국제가 있는 날.
해도 뜨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부터 르네브는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하루 먼저 파라디움에 도착해 세이렌 후작 저에서 머물러도 되겠지만, 이카르의 바쁜 일정도 있고, 르네브도 그 나름대로 바빴다.
벤더펠트 공작 부인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결혼 준비만으로 벅찬 일정에 더해 황후가 해야 할 일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폐하와 결혼하신 뒤에는 평생 하셔야 할 일인데, 벌써부터 서두르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르네브에게 서류를 건네던 드한의 표정이 매우 해맑았다.
이카르의 앞이라 그런가?
아닌 척은 하지만, 제 업무가 줄어든 것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는 드한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베인도 내심 기뻐하는 것 같았다.
‘영애께서 자주 방문해 주시니, 이제는 집무실 안에서 홀아비 냄새가 덜 나는 것 같습니다.’
르네브의 경험상 황제의 집무실엔 언제나 좋은 향기가 났지만, 베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물론 베인의 그 말에 이카르의 심기가 살짝 불편해진 것 같았지만.
그다음부터 이카르의 곁에 가까이 가면 진한 꽃향기가 풍겨 왔다.
사실 황후의 업무를 확인하기 위해 굳이 르네브가 이카르의 집무실을 찾아갈 필요는 없었다.
이카르는 르네브가 편히 업무를 볼 수 있도록 그녀를 위한 공간과 환경을 조성해 주었으니까.
하지만 르네브가 한차례 집무실을 찾아갔을 때 이카르가 너무나 기뻐했던 걸 잊지 않았을 뿐이었다.
“레이디, 잠시 눈을 감아 보시겠어요?”
메이크업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서류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는 르네브에게 키어넨이 말했다.
“그건 제게 주세요, 아가씨. 치장이 끝날 때까지 잘 보관해 둘게요.”
콘솔 뒤에서 부산스럽게 르네브가 신을 구두와 장신구들을 옮기던 앰버가 합세했다.
할 수 없이 르네브는 앰버에게 들고 있던 서류를 넘겨주고 눈을 감았다.
이내 부드러운 브러시가 눈두덩을 훑고 지나갔다.
조금 간지러웠다.
르네브가 흠칫 어깨를 떨자, 키어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조금 간지러웠던 것뿐이에요.”
“힘 조절에 주의할게요. 조금만 참아 주세요.”
키어넨이 그렇게 말하곤 조금 더 강하게 브러시로 눈두덩을 문질렀다.
그렇게 얼마간 르네브의 양쪽 눈에 아이섀도를 올리는 일에 열중하던 키어넨이 말했다.
“이제 눈을 떠 보시겠어요?”
르네브는 눈을 뜨고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회귀 전에는 늘 다소 진한 화장을 했으니까.
하지만 회귀한 뒤부터는 옅은 화장을 즐겨했다. 그다지 외모를 꾸미는 데 시간을 들이려 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달리 화려한 색감과 강렬한 눈 화장을 부탁했다.
얼굴 전체에 가볍게 파우더 처리를 하곤 키어넨이 물었다.
“이제 다 됐어요. 레이디. 어떠세요? 마음에 드시나요?”
“네, 무척 마음에 들어요.”
조금 전부터 뒤에서 분주히 오가던 앰버가 콘솔 쪽으로 다가왔다.
“와! 아가씨. 진짜 너무 예뻐요.”
“앰버가 보기에도 그렇죠? 이런 분위기도 무척 잘 어울리시네요.”
키어넨이 말을 보탰고, 인정한다는 듯 앰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앙칼지면서도 도도한 귀부인 같으세요.”
“고마워요……. 칭찬인 거죠?”
“그럼요! 칭찬이고 말고요. 평소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도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카리스마 넘치는 어, 언니 같고 멋있으세요.”
키어넨의 말에 르네브는 푸스스 웃으며 콘솔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앰버가 가져다 놓은 은색 스틸레토 힐에 발을 꿰어 넣었다.
***
일찍 오전 업무를 끝마친 이카르는 서둘러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르네브와 함께 파라디움의 건국제에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가 막 마차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드한…….”
목이 졸린 듯 드한을 부른 이카르는 잠시 숨을 멈춘 채 이쪽으로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예, 폐하.”
이카르의 부름에 짐마차에 물건을 실어 나르는 하인들을 관리 감독하던 드한이 몸을 돌렸다.
“지금 이쪽으로 걸어오는 저 숨이 멎을 듯이 아름다운 여자가…… 내 약혼자가 맞나?”
드한이 이카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마주친다면 못 알아볼 만큼 오늘은 확실히 다른 모습이시군요. 어쨌든 저분은 폐하의 약혼녀이신 세이렌 후작 영애가 맞으십니다.”
드한이 여자의 변신은 무죄 같은 소리를 중얼거렸으나, 이카르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드한을 통해 교차 검증을 거쳤음에도 르네브의 생경한 모습에 벌어진 입이 쉽사리 다물어지지 않을 뿐.
이카르는 순간 제게로 걸어오는 여자가 낯선 사람인 줄 알았다.
바짝 올려 묶은 머리로 인해 훤히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 허리와 엉덩이로 흐르는 몸 선이 두드러지는 타이트한 드레스.
고양이처럼 앙칼져 보이는 눈매는 고혹적으로 보였다.
르네브 외에도 세상에 이렇게나 자신의 시선을 붙잡는 여자가 또 있다는 사실에 순간 이카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나 곧 그녀가 평소와 다르게 치장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했다. 역시 세상에 이카르의 마음을 훔칠 사람은 르네브 한 사람뿐이었다.
이카르는 넋을 잃고 르네브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사이 그녀가 사뿐사뿐 이카르의 앞까지 다가왔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뺨을 긁적이며 물었다.
“혹시…… 제 모습이 이상한가요?”
“확실히 이상하군. 아주 곤란하고.”
르네브가 당황한 듯 앙증맞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평소에 바르던 것보다 조금 더 색이 짙은 립스틱 때문일까?
유독 입술에 시선이 갔다.
결국, 이카르는 목이 졸리는 신음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일단 마차에 오르지.”
“폐하? 왜 그러세요?”
등 뒤에서 르네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카르는 홱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영애의 모습이 숨도 못 쉬게 아름답다는 말을…… 해도 될지 망설여졌다.
특히나 지금은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
황제가 예비 황후를 보고 발정하는 변태라는 소문이 돌게 할 것이 아니라면…….
드한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른 르네브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혹시 몸이 좋지 않으신가요? 만약 그런 거라면 파라디움의 건국제에는 저 혼자 가도 괜찮으…….”
빠르게 말을 내뱉던 르네브의 입이 무엇을 보았는지 순간 꾹 다물렸다.
이카르는 힐끗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금 내가 제법 곤란한 참이거든.”
“…….”
그녀의 흰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