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어떤 맛일지 (90/148)


#90화 어떤 맛일지
2023.06.29.


‘그래도 가져다준 성의를 봐서 먹고 가는 게 좋으려나.’

이카르가 살짝 작은 탁자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열린 창문 너머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카르는 얼른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저택의 입구를 향해 달려오는 세 필의 말이 보였다.

“하아…… 결국 여길 찾아냈구나.”

이카르의 예상보단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 오래 걸린 셈이었지만.

이카르는 엄청나게 달아 보이는 디저트에서 아쉽게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고 창문을 넘었다.

‘어떤 맛인지 조금 궁금하긴 하네.’

눈만 뜨면 알려 주겠다던 여자아이의 비밀이 뭔지도 조금 궁금하고.

***

시간이 흘러 황제가 된 이카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황궁 인력 배치였다. 그중에서도 황제 직속 요리장을 뽑는 일을 서둘렀다.

신 황제의 등극 이후 바슈케르 각지에서 실력을 갖춘 요리사들이 모여들었다.

앞으로 황제만을 위해 요리하게 될 거라는 공고를 받고서.

이카르는 수십 명이 넘는 요리사들을 쭉 둘러보며 한마디만 했다.

“구겔호프를 만들 수 있는 자가 있나?”

바슈케르 전통 음식을 선보일 만발의 준비를 하고 모인 요리사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생소한 요리에 당황했다.

‘……구겔호프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하지만 이내 냉정하게 구겔호프에 대한 추측을 시작했다.

‘호탕한 남자는 술을 즐기는 법!’

그래서 구겔호프가 술에 곁들일 음식이라 추측한 이도 있었고, 또 누군가는 바슈케르 황가에서 즐겨 먹던 음식일 거라 추측했다.

이처럼 저마다 새 황좌의 주인이 무심하게 툭 던진 요리가 무엇인지 추측하느라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한 요리사가 손을 들었다. 자연히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카르는 용기 있게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뭔가?”

그러자 요리사가 떠듬떠듬 고했다.

“화, 황제 폐하! 저는 구겔호프를 만들 줄 압니다.”

“그대의 고향이 어디지?”

“……바슈케르 동부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그의 대답에 모여 있던 요리사들은 속으로만 코웃음을 쳤다.

황제의 직속 요리장을 모집한다는 공고에 허겁지겁 황궁으로 달려온 요리사들 중 대다수가 최소 그 일대 부호의 요리장 혹은 고위 귀족 가문에서 일한 경력자였다.

바슈케르의 태양이자, 누구보다 고귀한 신분의 황제 폐하께서 저런 애송이를 황궁으로 불러들일 리 만무했다.

‘허참. 여기가 어디 변방의 하급 귀족 가의 요리장을 구하는 자리도 아니고. 번지수를 단단히 잘못 찾아온 모양이구먼.’

‘고작 변방 시골 마을 출신이 염치도 없지. 황궁 요리장 자리를 노리다니…….’

하지만 요리사들의 그런 예상을 뒤집고 황제는 몹시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구겔호프는 어떻게 접하게 되었지?”

“제가 살던 지역은 파라디움의 서부 변경 지역과 근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좋지 않은 주변 분위기에 남자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감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내심 안도했다.

‘잠깐이라도 황제 폐하의 관심을 끈 것은 대단하지만 거기까지겠구먼.’

하지만 이어진 황제의 발언에 요리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대를 내 전속 요리장으로 채용하지.”

다들 오늘만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를 선보이려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여기 모인 요리사들은 작게는 5년, 많게는 30년간 요리 외길을 걸어온 경력자가 다수였다.

그런데 구겔호프를 만들 줄 안다고 답한 애송이는 많이 쳐도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정도로 보였다.

하지만 높은 연봉, 요리사 가문, 요리 대회 출신 같은 것들은 이카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구겔호프를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것만이 중요했을 뿐.

“폐하, 이렇게 빨리 결정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드한이 이카르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제로 즉위 후 처음 인력을 뽑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작지 않았다.

역대 황제들은 즉위 후 가장 먼저 재상과 대신, 신전의 대신관부터 새 사람으로 바꿨다.

최대한 제 입맛에 맞는 인물들로.

그리고 이는 황제가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셈이기도 했다.

금화의 흐름인지 정치인지, 종교인지 혹은 국방인지. 요리장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토록 빠른 결정도 매우 이례적이었고.

“저도 동의합니다, 폐하. 즉위 후 처음 선발하는 인력인 만큼 조금 더 신중히 처리하심이 어떠실지…….”

“구겔호프가 먹고 싶군.”

베인의 간언에도 개의치 않고, 이카르는 무심한 얼굴로 그저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럼 지, 지금 바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기대하지.”

“예! 폐하…….”

모두의 관심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새로 뽑힌 요리장은 침착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완성된 요리를 만들어 냈을 때가 되어서야 다른 사람들은 구겔호프가 디저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제가 그토록 원한 음식이 고작 달콤한 디저트라는 사실에 모두가 기함했다.

냉철한 자신들의 새 군주는 당연히 피가 뚝뚝 흐르는 생고기를 물어뜯으리라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으니.

“여, 여기 있습니다. 폐하.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부디 즐겨 주시길…….”

테이블에 진상된 접시를 힐끗 내려다본 이카르는 포크를 들었다.

꿀꺽.

음식을 맛본 황제가 처음 내뱉을 말이 무엇일지 저마다 추측하며 요리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구겔호프를 한 입 떠먹고 난 황제의 감상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달군.”

이카르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모두가 기대한 음식 평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지만, 그 속에는 내심 안도하고 희망을 품는 이도 있었다.

이제 황제가 뜨내기를 요리장으로 임명하기로 했던 결정을 무를 것이라고.

하지만 황제는 미간을 모은 채로 구겔호프를 전부 먹어 치웠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난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부터 황궁에서 일하도록.”

“……!”

이는 파격적일 정도로 빠른 의사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황궁에선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나 하인을 들일 때도 여러 각도에서 따져 보고 결정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

***

르네브는 깜짝 놀랐다.

“그것만으로 요리장을 결정하셨다고요?”

과거의 이야기를 끝낸 이카르가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르네브를 응시했다.

황궁 안이라 하더라도 황제를 한 번이라도 직접 대면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런 만큼 요리장은 제법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황제의 입속으로 들어갈 음식을 만드는 자리이니 더더욱.

그런데 구겔호프가 다 뭐라고 그렇게 쉽게 결정한단 말인가.

회귀 전 루시우스가 무수히 많은 요리장을 갈아 치우면서도 매번 신중에 신중을 기해 사람을 뽑았던 것과는 확실히 대조되었다.

“잠깐, 잠깐만요. 폐하……. 제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겠어요?”

“얼마든지.”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이곤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를 마시는 모습조차 그림 같은 그에게서 르네브는 억지로 시선을 떼어 내곤 생각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카르에게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이전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 하나 풀렸다.

어째서 원작에서는 루시우스 성장의 도구로 사용된 후 죽음을 맞이했던 이카르가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멀쩡히 살아 있는지.

‘내가 원작과 다른 행동을 했던 게 이카르가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던 까닭이었어.’

원작의 르네브였다면 다 죽어 가는 소년을 마주쳤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테니까.

이카르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 또한 기억이 났다.

오래전 책 속에 막 빙의했던 9세의 르네브가 작은 선의를 보였던 그때 그 잘생긴 오빠가 이카르였다는 사실부터 모든 게다…….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중요한 사건을 잊고 있었지?’

자문을 해 보자 금방 답이 나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카르에겐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르네브에겐 20년도 더 된 예전 일이었다.

책에 빙의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던 무렵의…….

그 당시 원작의 악녀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자각한 르네브는 루시우스와의 관계를 바꿔 보려 노력했다.

그 결과 원작과는 달리 황후가 되었고, 카엘을 낳았다.

하지만 마치 네 운명이니 받아들이라는 듯 원작에서처럼 에시카가 등장했고, 루시우스의 마음도 변했다.

9세 아이의 몸에 빙의해서 루시우스와 결혼을 했고, 그의 아이를 낳았고, 죽었다.

그리고 회귀까지. 워낙 많은 일이 있었었다. 그러니 갓 빙의했던 어린 시절의 일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다시피 했을 수밖에.

“…….”

이번에도 이카르는 르네브가 생각을 이어 나가는 내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곁을 지켜 주었을 뿐.

그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르네브는 이카르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맞아. 그때도 참 잘생긴 소년이라 생각하긴 했어. 크면 정말 대단한 미남이 될 거라고.’

이제 보니 그때의 생김새가 조금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저 폐하……?”

이카르가 힐끗 눈만 굴려 르네브를 쳐다봤다.

“이제 기억이 난 모양이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르네브는 알 수 있었다. 그에게서 어딘지 서운해 보이는 기색이 묻어난다는 걸.

“서운, 하셨겠어요……?”

르네브는 이카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운하다니?”

“제가 바로 알아보지 못했잖아요.”

르네브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이카르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얽으며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의 일이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어. 나도 다시 영애와 만나게 되었을 때는 상상조차 못 했거든.”

“……?”

“그때의 그 작고 귀엽던 꼬맹이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했을 거라고.”

르네브는 살짝 시선을 떨어뜨리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겠지. 계속 눈길이 갔어. 이상하게 끌리더군.”

어느새 르네브를 바라보는 이카르의 붉은 눈이 한층 깊어졌다. 똑바로 마주하기에 부끄러울 만큼이나 뜨겁게.

그래서 그런지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빈틈없이 꽉 맞물린 손에 살짝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르네브는 침을 꿀꺽 삼키며 깍지 낀 손을 살짝 빼내려 했다.

그러자 그러지 말라는 듯 이카르가 더욱 손바닥이 밀착되게끔 손을 고쳐 잡았다.

“……폐하께선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제가 그때의 그 꼬맹이였다는 사실 말이에요.”

“다시 만나고 하루쯤 뒤였나.”

“그렇게 빨리 눈치채셨단 말인가요?”

“당시에는 그 저택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로 알아볼 겨를이 없었지.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곧장 거처를 이동해야 했거든.”

이카르가 르네브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쳤다.

“그래도 잘 따돌리셨나 보네요.”

“그렇지. 그러지 못했다면 영애를 다시 보지 못했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이카르가 르네브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미안해요. 잊어버리고 있어서.”

르네브는 담담히 사과했다.

“사과는 내가 해야겠지.”

“폐하께서요?”

“영애는 내 생명의 은인이야. 영애가 그날 나를 발견해 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 여기에 없었을 거다.”

부드러운 손길로 르네브의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이카르가 낮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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