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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말도 없이 가 버리면 (89/148)


#89화 말도 없이 가 버리면
2023.06.28.


그리고 이카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

‘설마. 세상모르고 자 버린 건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언제 황실 기사들이 뒤쫓아올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에 태평하게 잠이나 자다니.

그러나 이곳을 떠나 몸을 숨길 곳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생각과 달리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팔과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고, 눈을 깜빡거리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심지어 그동안 자지 못한 피로가 밀어닥치기라도 한 건지 자꾸만 졸음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설마, 황실 기사들은 아니겠지?’

이카르는 실눈을 뜨고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다행히 잠들기 전에 제 곁에 있어 주었던 그 여자아이였다.

자그마한 여자아이는 아주 조심조심하며 문을 닫았다. 마치 잠든 이카르를 깨우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런 생각이 맞았는지 여자아이는 발소리를 죽이려는 듯 다소 큰 동작으로 느리게 침대로 다가왔다.

그 모습이 꽤 우스꽝스럽기까지 해서 이카르는 웃음을 참느라 곤혹스러웠다.

여자아이가 의자를 들어서 침대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 이카르는 눈을 꾹 감았다.

이내 조금 전까진 이마에 올려져 있는지도 몰랐던 수건이 치워지고 대신 새 물수건이 그의 이마를 덮었다.

‘앗! 차가…….’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지만, 그것만은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이 아이가 어마어마한 이타심을 발휘해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던 자신을 불쌍히 여겨 구해 준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걸 알게 되면 여자아이는 아까처럼 어른을 부를 것이고, 그들은 이카르에게 와서 왜 그런 곳에서 피를 흘린 채로 쓰러져 있었는지 이유를 캐물을 게 분명했다.

자신은 사냥꾼이며, 산짐승을 잡다가 방심한 틈에 다쳤다고 하면 어느 정도의 변명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검에 베인 상처와 산짐승에게 물린 상처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 정도의 상태인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수상한 자가 있다고 고발하려거든 진즉 그렇게 했을 테고…….’

만약 그랬다면 근처를 배회하며 이카르를 찾고 있던 황실 기사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이대로 있는 편이 낫겠어.’

그렇게 이카르가 당장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고 있을 때였다. 여자아이가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대나무 숲에서 떠드는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알아?”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카르는 절로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겨우 단속했다.

“아, 그 이야기를 안다고 해도 지금은 대답할 수 없겠네.”

이카르는 눈을 꾹 감은 채로 이어지는 여자아이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이의 목소리는 또래 특유의 들뜨고 정신 사나운 느낌 없이 차분했다. 그래서 그런지 맑은 목소리가 제법 듣기에 좋았다.

“사실 내가 엄청난 비밀을 간직하고 있거든? 아직 누구한테도 이야기한 적 없어. 오빠가 눈만 뜨면 내가 전부 이야기해 줄게! 그러니까 얼른 기운 차렸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의식이 없다고 단단히 믿고 있는 모양인지 그 외에도 여자아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점심엔 뭘 먹었는지, 대장간의 스미스가 웬디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둥 시시콜콜한 그런 이야기들.

그렇게 얼마간 더 떠들던 여자아이가 돌연 제 아픔에 대해 털어놓았다.

“있잖아, 나는 엄마가 없어. 얼마 전에 돌아가셨거든. 그래서 장례식 때문에 이 별장에 와 있는 거야.”

여자아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엷은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면 나는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이곳은 내가 살기에는 환경이 좋지 않다고 말이야. 돌아가더라도 딱히 재밌는 일도 없을 텐데…….”

나름대로 밝고 활기차던 목소리가 조금 시무룩하게 변했다.

“사실 말이야, 난 친구가 없어. 다들 내가 친한 친구를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다들 내가 불편한가 봐.”

침울해진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여자아이가 조금 더 밝게 말했다.

“아! 잘 생각해 보니까 한 명은 있다. 남자아이인데, 걔는 조금 무서워. 언젠가 날 죽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대목에서 이카르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눈을 떠 버렸다.

“어……? 정신이 들어?”

깜짝 놀랐는지 여자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조금 전까지 속내를 털어놓은 탓일까?

이내 젖살이 통통한 뽀얀 뺨이 사과처럼 물들었다.

“……없어.”

“뭐가 없다는 거야?”

“세상에 엄마가 없는 사람은 없어.”

여자아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귀여운 미간을 살짝 모았지만, 이카르는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엄마가 없었다면 넌 태어나지도 않았겠지.”

“……그건 또 그렇네.”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던 여자아이가 곧 고개를 들어 이카르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옅게 미소 지었다.

‘아…… 또.’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이카르에게 다시 밀려들었다.

대체 무슨 약을 먹인 건지…….

‘조금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이 애가 활짝 웃을 것도 같았는데…….’

이카르는 아쉬워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정확하게 날짜를 셀 수는 없었지만, 한동안 이카르는 그곳에 머물렀다.

상처의 회복 속도는 빨랐고, 타는 듯한 통증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몸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제법 몸을 움직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카르는 누군가 침실 안에 들어오거든 계속해서 자는 척을 했다.

정신을 차린 걸 알고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하면 골치 아팠기 때문이다.

“목말라…….”

막 잠에서 깬 이카르는 침실 안을 둘러봤다. 곧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냉수를 발견하고는 마른 목을 축였다.

시원한 물이 버석한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가는 느낌이 제법 괜찮았다.

살아남으려면 적절한 수분 보충은 필수였다.

이카르는 어떤 상황에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았다.

보란 듯이 살아남아 줄 것이다.

그래야 황제 놈에게…….

물 한 잔을 전부 비워 낸 이카르가 작은 탁자 위에 물컵을 탁, 내려놓았을 때였다.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카르는 얼른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집중했다.

‘몇 명이지? 둘…… 둘인가?’

그렇게 셈을 끝마쳤을 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태는 좀 어떤가?”

“흠…… 완쾌하려면 조금 더 시일이 걸리겠지만, 빠른 회복 중입니다.”

이카르는 실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한 사람은 붕대를 갈아 주러 오던 사람이었다.

이카르는 그가 이 저택의 주치의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다른 쪽은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은발을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자색 눈의 남자는 상당한 미남이었지만,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가 제법 서늘하고 냉랭했다.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겠지?’

머리와 눈 색 외에도 제법 닮은 생김새였기에,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카르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남자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기사인가?’

키도 크고 근육질인 걸로 보아 맞는 것 같았다.

이카르가 천천히 남자를 탐색하고 있을 때였다.

‘……!’

돌연 남자가 이카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이카르는 얼른 눈을 감았다.

“……왜 그러십니까?”

잠깐의 침묵 끝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별일 아닐세. 그런데 왜 깨어나질 않는 거지?”

“그것이 저도 의문입니다……. 상처의 회복이 기이할 정도로 빠르거든요. 평범한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와 보면 언제나 잠들어 있더군요.”

“흠…… 딸아이가 수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정신을 차리면 좋으련만.”

“아가씨께서 이 소년의 걱정을 많이 하시던데, 정신을 차린 모습을 보지 못하고 떠나게 되면 상당히 아쉬워하시겠군요.”

“그렇겠지…….”

두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에야 침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도 이카르는 한참 그대로 누워 있었다.

완전히 이 안에 아무도 없다고 확신했을 때 눈을 떴다.

그는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로 셔츠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 붕대를 살짝 걷어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회복이 빠르다던 말대로 상처가 많이 아물어 있었다.

이카르는 가장 먼저 제 무기부터 찾았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무기를 발견했다.

‘딱히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건가?’

몸도 거의 다 나았겠다, 무기도 찾았으니 이곳에 계속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뜨는 게 좋겠지.’

자신에게도 그들에게도.

창가로 다가가던 이카르는 제 옆에 줄곧 있어 주었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잠깐 떠올렸다.

‘말도 없이 가 버리면, 서운해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 너머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카르는 황급히 침대에 누웠다.

곧 문을 열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카르는 실눈을 뜨지 않고도 누가 침실에 들어왔는지 대번에 알았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아주 느리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건 그 여자아이밖에 없었으니까.

‘……응?’

순간, 침실 안을 채운 화한 약 냄새 속에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섞여 들었다. 여자아이가 먹을 걸 가져온 모양이었다.

“아가씨. 혼자 드시지 않고서요?”

“난 또 먹을 수 있으니까.”

“아가씨도 참, 다른 사람 먼저 챙기시다니 너무 기특하세요.”

칭찬에 약한 편인지, 여자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주무시니까, 방해되지 않도록 이제 나가요. 아가씨.”

“알았어.”

속삭이는 목소리와 두 사람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가씨. 번화가에 나갔던 제이미 말로는 근처에서 어린 소년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 어떤 사람들이었다고 해?”

“그게 차림을 봐선 기사 같다고 했어요…….”

이카르는 두 사람이 완전히 침실을 빠져나가자마자 곧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끈질긴 놈들…….’

황실 기사들이 자신을 찾고 있다면, 이곳도 곧 발각될 가능성이 컸다.

그럼 황실 기사들이 이곳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까?

이카르는 조용히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내가 얌전히 잡혀 줄 것 같냐고.’

문밖의 상황은 알 수가 없었기에 탈출로는 창문이 유일했다.

그간 정신이 들 때마다 창밖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봐 두기도 했고.

이카르는 무기를 챙긴 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훅 불어옴과 동시에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제야 이카르는 여자아이가 다녀간 이유를 상기했다.

‘아, 맞다……!’

이카르는 작은 탁자 위로 힐끔 시선을 내렸다. 좁은 탁자 위엔 설탕이 잔뜩 뿌려진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윽.

‘엄청 달게 생겼네…….’

이카르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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