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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황궁 밖으로 첫 외출 (40/148)


#40화 황궁 밖으로 첫 외출
2023.05.10.


“왕녀님께서 곧 오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귀부인.”

하녀의 안내에 따라 솔티 왕녀의 응접실에 도착한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내부를 둘러봤다.

‘폐하께서 귀빈들을 극진히 대접하신다던 말이 정말이었구나.’

내부는 웬만한 공작 저 못지않게 화려했다. 내부를 찬찬히 훑어보며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왕녀와 나눌 대화를 복기했다.

‘일단은…….’

첫 티 파티를 무사히 치른 것을 자축한 다음, 제 노력과 수고를 잊지 말아 달라며 생색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후의 일을 논의하면 될 것 같았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마침 생각 정리를 끝마쳤을 때 왕녀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마침 잘 오셨어요.”

그녀는 티 파티 때보다 조금 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왕녀가 소파에 앉는 모습을 지켜봤다.

“앉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마침 귀부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던 참이었거든요.”

그제야 소파에 앉은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계획한 순서대로 말을 꺼냈다.

“다행이네요. 큰일 치르고 쉬시는데 괜히 찾아온 건 아닌지 조금 걱정했답니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그나저나 티 파티 중에 조금 불미스러울 뻔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던데……. 귀부인께서도 알고 계셨나요?”

“어머 그랬었나요? 제가 보기에 오늘 티 파티는 매우 완벽해 보였거든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티 파티가 성공적이었다고 강조한 뒤에야 질문의 답을 했다.

“물론 약간의 불편한 상황이 펼쳐질 뻔하긴 했던 것 같더라고요.”

왕녀의 벽안에 이채가 돌았다.

“귀부인께서도 우리가 힘들게 준비한 티 파티를 망치려 한 누군가가 있었다는 걸 알고 계시는군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면 넓고 넓은 황궁 안에서. 그것도 하필, 그 시간 그곳에서 일을 벌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왕녀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파라디움의 귀족만 쏙 빼놓고 초대장을 돌린 게 화근이었을까요?”

왕녀의 뼈 있는 질문에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세이렌 후작 영애의 초대를 보류하자고 왕녀에게 제안했던 게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왕녀가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는 이유를 금방 알아챘다.

가령, 세이렌 후작 영애 쪽에서 티 파티 일을 문제 삼았을 경우 제게 책임을 전가할 가능성을 남긴 것이다.

‘맹한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부분에서는 예리하다니까.’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이미 자신이 솔티의 왕녀와 한배에 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 부분은 차차 논의하는 것으로 하고…….”

그래서 그간 들추지 않았던 진실 하나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마침 왕녀님을 잘 찾아뵈었네요.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릴 게 있거든요. 파라디움의 귀빈에 대해서.”

***

‘개인 맞춤이라더니 정말이구나.’

벨케인 소공작의 응접실은 그의 취향을 반영한 듯 르네브의 공간과는 또 달라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르네브가 안내받은 응접실 안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저벅저벅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탁한 미성이 울렸다.

“살다 보니 영애께서 먼저 저를 찾아 주시는 이런 영광스러운 날이 다 있군요.”

인사치레치고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지만, 르네브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벨케인 소공작은 소매와 칼라에 금사로 수가 놓인 흰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장 차림이 아닌 것으로 보아 편히 쉬고 있던 것 같았다.

“쉬시는 중에 제가 불편을 끼친 건 아닌지 조심스럽네요.”

르네브의 말이 끝나자마자 벨케인 소공작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르네브는 살포시 웃었고, 벨케인 소공작이 정중히 소파로 손을 뻗었다.

“앉으시겠습니까?”

“네.”

르네브가 소파에 앉자 벨케인 소공작도 자리에 앉았다.

“오늘이 처음입니다.”

벨케인 소공작의 말에 르네브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눈매를 예쁘게 휘며 벨케인 소공작이 말했다.

“영애께서 먼저 저를 찾아 주신 것 말입니다.”

“아……. 그, 뺨의 상처는 괜찮으신지 걱정이 돼서요.”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의 뺨을 힐끗 쳐다봤다.

벨케인 소공작이 멋쩍게 웃으며 멍이 약간 남은 뺨을 매만졌다.

언뜻 보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멍 자국이 옅었다.

“병 주고 약 준다고 하던가요? 그날 처소에 돌아와 보니, 황제 폐하의 주치의가 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러셨군요.”

“주치의 덕분에 흔적이 옅어지기는 했습니다.”

르네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의 몸에 상처가 생길 일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그처럼 공작 가를 물려받을 사람의 얼굴에는 더더욱.

벨케인 소공작의 뺨에 남은 멍 자국은 귀족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자연히 그날 일을 설명해야 할 테니 외출을 삼가는 모양이었다.

귀족 사회에서 노코멘트란 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할 뿐이니.

“폐하께 확실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세요.”

르네브의 말에 벨케인 소공작이 한쪽 입매를 살짝 말아 올렸다.

“물론입니다. 이번 일을 가볍게 넘긴다면, 차후 베니스탄과 바슈케르의 외교 관계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잘 생각하셨어요.”

벨케인 소공작의 말이 맞았다.

꼬리를 밟히면 고통을 호소하고 비명이라도 질러야 한다.

참고 인내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르네브는 회귀 전의 경험으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비록 오해로 인한 사고였으나, 국력에서 밀린다고 괜찮다며 한발 뒤로 물러나는 건 옳지 않았다.

“오늘 제가 소공작님을 찾아뵌 이유는 사과를 드리기 위해서예요.”

르네브의 말이 전혀 뜻밖이었는지 벨케인 소공작의 푸른 눈이 조금 커졌다. 이내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영애께서 사과하시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때 일은 오해로 인한 사고였고, 영애께서 책임을 느끼실 필요는…….”

거기까지 말한 벨케인 소공작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하며 벨케인 소공작을 쳐다봤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벨케인 소공작이 이내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물론 영애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신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제게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계신다면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요.”

벨케인 소공작이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머뭇거렸다.

“사실…….”

보증은 함부로 서는 거 아니랬는데. 설마 보증은 아니겠지?

“부디 편히 말씀해 주세요. 그럼 저도 오해의 발단이었다는 책임을 완전히 털어 버릴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들어 드릴 수 없는 부탁이라면 칼같이 거절할 거예요.”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의 망설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을 미리 차단했다.

“영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당당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보증은 안 된다.

르네브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벨케인 소공작이 금빛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말했다.

“곧 있으면 제 여동생의 생일이 돌아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챙길 수 없으니 선물이라도 보낼까 하는데. 뭘 좋아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보증은 아니었구나.

르네브는 안도하며 물었다.

“동생분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영애와 비슷할 겁니다.”

“그 문제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르네브가 싱긋 웃자, 벨케인 소공작이 덧붙였다.

“말 나온 김에 지금 나가서 선물을 함께 골라 주시는 건 어떠십니까?”

예쁘게 눈을 휘어 웃으며 벨케인 소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르네브는 그저 여동생의 관심사나 취향을 물어본 다음 선물을 추천해 주려 했다.

그런데 직접 함께 나가서 선물을 고르자고 하다니?

“영애의 오후 일정이 괜찮다면 말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벨케인 소공작은 이미 하녀에게 제 겉옷을 챙겨 오라고 지시를 내린 참이었다.

더불어 그는 르네브에게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응접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르네브는 헛웃음을 뱉었다.

“뭐야…….”

평소 그는 신사적이었으며 르네브에게 맞춰 주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 그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 줄이야?

그게 밉지는 않았다.

이카르와 벨케인 소공작의 다툼은 오해에서 비롯했지만, 두 사람 모두 르네브를 도우려다 빚어진 사고였다.

분명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알지만, 발단이 저였다는 부분에서 약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벨케인 소공작은 그런 르네브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조금쯤 이용하기로 한 같았다.

“……하, 진짜.”

조금 전 벨케인 소공작의 모습을 떠올리자, 또다시 르네브의 입에서 피식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살짝 뒷걸음질 친 자세 그대로 르네브 쪽을 힐끗 쳐다보며 벨케인 소공작이 물었다.

“영애, 안 일어나십니까?”

“……가요.”

르네브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벨케인 소공작의 얼굴에 만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복도로 나온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장성한 카엘의 모습을 그려봤다.

루시우스를 닮아 푸른 바다같이 투명한 눈에 밝은 금발을 가진 아이.

카엘과 벨케인 소공작은 조금 닮은 구석이 있었다. 티 없이 해맑은 표정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볼 때마다 르네브는 카엘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 르네브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케인 소공작이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르네브는 씁쓸한 미소를 지우고 정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과 마차를 타고 번화가로 나갔다.

마차가 중심 거리에 접어들자 여러 가게 중에서도 유독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관에 눈이 갔다.

“저길 먼저 가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보석상을 둘러보고도 두세 곳 정도 더 들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것 같았기에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르네브와 벨케인 소공작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점원이 친절히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선 르네브는 가게 안을 한번 둘러봤다.

파라디움에선 두 배 이상의 값을 줘도 구하기 어려운 장신구들이 즐비했다.

진열된 물건 중 마노를 정교하게 세공한 펜던트에 눈이 갔다.

회귀 전 르네브가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선물로 들어온 것 중 하나였는데 르네브는 그 펜던트를 꽤 마음에 들어 했었다.

연회나 모임에 갈 때 여러 번 착용했을 정도로.

그런 물건을 다시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 펜던트가 마음에 드십니까?”

르네브의 시선을 의식한 듯 벨케인 소공작이 물었다.

“마노로 만든 펜던트인데 이건 어떠세요?”

“세공도 정교하고, 보석 질도 상당히 좋아 보이는군요. 역시 영애와 함께 선물을 고르러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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