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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분명히 일부러 그랬어 (39/148)


#39화 분명히 일부러 그랬어
2023.05.09.


그 특유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두려움을 느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레 겁을 먹었다고 표현하는 편에 가까웠다.

실제로 이카르가 무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은 더더욱 처음 봤으니까.

르네브는 이내 잔뜩 화가 나 으르렁거리던 이카르의 앞을 막아선 자신의 무모함에 대해 생각했다.

‘겁이 없어도 그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나.’

그러면서도 르네브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카르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다시 생각해 봐도 근거가 없는 믿음이었지만, 은연중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순간 타오르는 불꽃 같던 이카르의 붉은 눈이 떠오르자 르네브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레이디, 제법 실내가 쌀쌀해진 것 같은데 이제 창문을 닫을까요?”

창문가로 성큼 다가간 키어넨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카르를 떠올리며 떨었던 것을 추워서라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게 좋겠네요.”

창문을 닫은 키어넨이 냉큼 숄을 하나 챙겨 와 르네브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공연히 번거롭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르네브는 한마디 덧붙였다.

“환절기라 그런지 날씨가 오락가락하네요. 챙겨 줘서 고마워요.”

“뭘요. 레이디를 보필하는 게 제 일인걸요. 벽난로에 장작을 조금 더 넣을까요?”

“부탁할게요.”

르네브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벽난로 속으로 마른 장작 몇 개를 던져 넣은 키어넨은 부지깽이로 안을 뒤적거렸다.

그때 앰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지금 온 황궁 안이 오늘 있었던 티 파티 이야기로 난리도 아니에요.”

“그렇겠지.”

르네브는 앰버에게 앉으라 손짓했다.

키어넨도 앰버가 황궁 소식을 전해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뭐라고들 떠들던가요?”

“이국의 왕녀님께서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으시다, 이런 티 파티 선물은 난생처음 본다. 뭐, 주로 이런 이야기가 화제로 오르는 모양이에요.”

“시원시원하다니?”

르네브의 물음에 앰버가 오늘 황궁 티 파티에서의 일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왕녀님께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장식되어 있던 꽃을 뽑으시더래요.”

“꽃을?”

“네, 뽑아 든 꽃을 엮어서 뚝딱 만들어 낸 꽃다발을 참석한 귀부인들께 선물했다더라고요.”

키어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선물을 준비하셨네요.”

“그렇죠? 아! 그리고 또 있어요.”

맞장구치는 키어넨을 힐끗 본 앰버가 다시 입을 놀렸다.

“티 파티가 열렸던 장소 근처에서 황제 폐하와 벨케인 소공작님께서 주먹다짐을 하셨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도는 것 같더라고요.”

“……!”

르네브는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짚었다. 키어넨 또한 입술을 말아 물고, 미간을 모았다.

“어떡해요, 레이디.”

“입단속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는지 조심스러운 분위기이긴 해요. 소문이 크게 번질 것 같진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앰버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평화 협정 기간만 채우고 조용히 파라디움으로 돌아가려던 르네브의 계획을 알고 있어서였다.

“폐하께서 입단속을 잘 시킬 테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르네브는 걱정하는 두 사람에게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내심 신경이 쓰였다.

회귀 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귀족들의 주목을 사서 그다지 좋을 게 없었다.

“레이디의 말씀이 맞아요. 폐하께서 소문이 도는 걸 원치 않으신다면 소문을 들어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적겠죠. 목숨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이니까요.”

키어넨이 확신에 차서 말했다.

바슈케르 황궁에서 오래 일해 온 키어넨까지 단언하자, 그제야 앰버의 미간이 풀어졌다.

“사실. 황제 폐하와 소공작님 같은 미남들이 레이디를 두고 다퉜다는 건 그만큼 레이디의 매력이 넘친다는 뜻으로 해석되잖아요. 오히려 소문이 돌지 않는 게 저는 조금 아쉬워요.”

키어넨이 덧붙인 말에 앰버가 히죽 웃으며 말을 보탰다.

“그건 저도 그래요.”

르네브도 겉으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속은 조금 복잡해졌다.

회귀 전 파라디움 황궁에서의 티 파티가 떠오른 탓이다.

에시카가 루시우스의 정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여전히 황궁의 안주인이라는 걸 귀족들 앞에 공공연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르네브의 시녀였던 랭커스터 백작 부인은 강경한 어투로 조언했다.

황제의 마음이 변했다고 떠드는 귀족들에게 황후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임신 초기엔 유산 가능성이 큰 만큼 르네브는 한동안 침실에서만 머물렀다.

그럼에도 결국 아이는 그녀 곁을 떠났지만.

유산 후에 몸을 완전히 추스른 상태는 아니었으나, 랭커스터 백작 부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 따위가 고개 빳빳이 들고 황궁 안을 휘젓고 다니게 가만히 두셔서는 절대 안 됩니다. 황후 폐하.’

마치 자신이 황후라도 된 듯 구는 에시카의 오만방자함에 르네브의 시녀들은 분개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르네브를 위한 조언이라기보다는 황후의 입지가 약해짐과 동시에 자신들의 권위 또한 추락할 것을 걱정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러나 당시 르네브는 깊게 생각할 심적 여력이 없었다.

어렵게 얻은 첫 아이의 유산에 이어 세이렌 후작의 사망 소식.

거기에 더해 남편의 외도까지.

여러모로 마음이 무너져 내렸던 시기였기에, 르네브는 시녀들의 조잘거림에 쉽게 동요되었다.

그래서 에시카를 의식하듯 황궁에서 티 파티를 열었고, 또 그 자리에 루시우스를 초대했다.

정부를 들였지만, 여전히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변함없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일종의 쇼였다.

다행히 루시우스는 르네브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 에시카를 데리고 나왔다.

그 덕에 르네브의 꼴은 아주 우스워졌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티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을.’

과거를 회상하며 르네브가 씁쓸하게 입매를 당겼을 때 앰버가 말했다.

“근데 조금 고소하긴 했어요.”

르네브가 시선을 주자, 앰버가 눈매를 휘며 말했다.

“소문은 곧 잠잠해지겠지만,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 거예요.”

“……?”

“솔티 왕녀님의 티 파티가 한창인 중에 그 옆에서 아가씨를 두고 벨케인 소공작님과 바슈케르의 황제 폐하가 주먹다짐을 하셨다는 것 말이에요.”

“앰버. 다시 말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라니까.”

르네브는 오해에서 발단한 사고였다고 또 한 번 설명했다.

그러나 앰버도 키어넨도 고개를 끄덕일 뿐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회귀 전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다니.’

르네브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참으로 공교로운 상황이라는 점만큼은 틀림없었다.

‘이 일이 에시카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

티 파티가 끝나고 바로 침실로 돌아온 에시카는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어 침대 위에 패대기쳤다.

에시카의 심기는 전에 없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분명히 일부러 그랬어…….”

그렇지 않고선, 굳이 초대하지도 않은 곳까지 와서 행패를 부릴 이유가 없다.

에시카는 그간 바슈케르 귀족들의 친절이 자신이 가진 왕녀 신분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겪어 보니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다.

일부 바슈케르 귀족들이 이국의 왕녀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맞다.

하지만 곧 그들의 관심과 친절 대부분이 이카르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만 해도 그랬다. 마치 차기 바슈케르 제국의 황후라도 되는 양 자신을 모시는 걸 보면.

그래서 에시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꽉 잡으려 했다.

평화 협정 기간이 끝나고 솔티로 돌아간다면 솔티의 왕이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까?

제 딸 대신 먼 곳에서 고생했다며 포상을 내릴까?

‘절대 아니겠지.’

포상을 내리기는커녕 제거당할 가능성이 훨씬 컸다.

해서 평화 협정이 끝나기 전까지 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던 중 이카르와의 소문은 그야말로 찬스였다.

만약 자신이 이카르와 결혼해서 바슈케르의 황후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솔티의 왕이 사실은 에시카가 아드리아 왕녀의 대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절대 말 못 할 것이다.

수년간 이카르를 기만했다는 증거를 스스로 내놓는 셈이니.

지금처럼 솔티 왕녀의 신분으로 바슈케르에서 계속 머무는 것만이 자신이 살길이었다.

‘그래서 그 귀찮은 티 파티도 직접 준비한 거였는데.’

에시카는 조금 더 움직이기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다음 소파에 편히 앉았다.

“하아…….”

에시카가 한숨을 내쉬자, 조금 전부터 좌불안석이었던 하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왕녀님. 티 파티로 오늘 많이 피곤하시죠?”

“조금, 피곤하긴 하네.”

“손님들을 맞으시느라 정말 힘드셨겠어요. 제가 마사지를 해 드릴까요?”

에시카의 눈치를 살살 살피던 다른 하녀도 빠르게 동참했다.

“꿀을 넣은 따끈한 차를 함께 드시면 피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준비해 올까요?”

다른 누군가의 기분을 살펴야 하는 처지가 아닌, 제 기분을 맞추려 드는 하녀들을 보자 에시카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꿀은 세 스푼, 페퍼민트도 띄워서.”

“네! 꿀은 세 스푼. 페퍼민트도 띄워서 가져올게요.”

에시카의 주문을 그대로 따라 읊으며 하녀가 침실을 떠나자, 남겨진 하녀가 에시카의 어깨를 주물렀다.

조물조물 주무르는 손놀림이 제법 괜찮았다.

에시카는 잠시 눈을 감고 하녀의 손길을 즐겼다.

하지만 이내 티 파티 때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이렌 영애가 일부러 그런 것 같아. 네 생각은 어떠니?”

하녀가 에시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왕녀님께 감히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에시카는 하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역시 하녀 따위와 나눌 종류의 대화 주제는 아닌 듯했다.

“아니야, 됐어.”

하녀의 마사지로 분노와 당황으로 굳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을 때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에시카를 찾아왔다.

마침 대화 상대가 필요했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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